초연결사회에 접어든 오늘 우리의 시민지성은 자신의 이념에 따라 차별화된 정보를 맥락화시킬 수 있다. 전문가 집단이 정보를 일방적으로 가공하여 제공하던 방식은 이제 옛말이 되었다. 미디어라는 이름의 '민주주의 기계'가 정치패러다임을 바꾸기 시작한지도 이미 오래되었다. 미디어의 경제법칙은 국가 대사인 선거에서조차 공약검증을 선거 의제 밖으로 내던지도록 강요하가도 한다. 정당정치에서 미디어 의존성은 심화되고 있는 것만이 아니다. 미디어는 정치 패러다임의 한 축이 되고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한 정당들의 인식은 많이 부족해 보인다.

이번 20대 총선에서 정당들이 보여준 미디어 공약은 한마디로 '철학 없음'에 다름 아니다. 먼저 새누리당의 미디어 공약을 보자. 별도의 미디어 공약이 없고 전체 공약집에 들어있는 내용도 너무 소박해서 안쓰러운 마음마저 든다. 이 당은 교육, 문화융성, 사회적 약자, 국민안전 등의 분야에서 미디어 관련 공약을 제시했다.

교육 분야의 경우, 중등교육과 영어교육을 위한 EBS 교육방송 채널 한 개를 더 신설하려는 내용인데, 사교육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한 것이라는 말씀이다. '입시교육'-이 한물간 표현을 다시 꺼내야 하는 현실-을 위한 채널을 만들겠다는 이 고뇌에 찬 '침소봉대의 철학'에 따르면 미디어는 기껏해야 시험공부를 위한 도구에 불과하다. 사회적 약자 분야에서는 취약계층에 스마트기기를 보급하겠다는 '편의주의'가 돋보인다. 금융 해킹 보이스피싱 등 소위 '탈탈 털린' 기업과 국민의 정보를 보호하려는 사이버보안 강화 공약은 그래도 존중받을 수 있겠다.

하지만 음란물 규제 강화의 내용까지 가면, 차단에 급급해하는 조악한 말씀이어서 실망스럽다. 물론 '밥상머리' 인터넷 윤리교육은 필요한 것이지만, 넘쳐흐르는 콘텐츠의 홍수를 차단이라는 수단만으로 버티시려는 무모함에는 안타까운 심정이다. 자율규제의 필요성이 강하게 제기되고 있는 오늘 새누리당의 공약에는 진정 깊은 고뇌가 보이지 않아 참담하다.

더불어민주당과 정의당은 전체 공약집뿐만 아니라 별도의 미디어 관련 공약을 제시하고 있는 정당이어서 다행스럽다. 새누리당이 엉터리 미디어 공약을 내세우는 까닭이 현존 지배구조와 미디어 시스템의 현상유지(status quo)를 위해서라면, 이 두 당은 변화와 개혁을 위한 세력으로서 보다 적극적인 스탠스를 취했다. 현상유지보다 진화(evolution)가 양당의 정체성에 더 맞는다는 사실은 미디어 공약에서 잘 드러나는데, 두 당 모두 '공영방송 거버넌스 개선'을 내세웠다. 공영방송 이사회를 여야 동수로 구성하여 정치적 독립을 달성하겠다는 말씀이다. 방송 문제의 본질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고민하는 모습은 멋지다.

미디어 콘텐츠산업 분야 동일서비스 동일규제 원칙을 강화하여 종합편성채널을 정상화시키려는 의지도 돋보인다. 해직 언론인의 명예를 회복시키고 원직 복귀시키려는 의지는 정의당이 다소 강해 보였다. 아예 특별법을 만들어서 이를 실현시키고자하기 때문이다. 더민주는 새누리당과 달리 인터넷 자율규제를 제도화 시키겠다는 공약도 내걸었다. 여기 자율규제의 모범을 보이고 있는 독일, 프랑스 등 주요 국가의 실태가 많은 시사점을 줄 수 있겠다.

디지털영상콘텐츠산업 분야 비정규직, 영세업자에 대한 불공정 행위를 근절시키고 표준계약서를 의무화하는 등 미디어노동자들의 노동조건 개선에 약속은 반드시 정책으로 실현되어야 할 중요한 공약이다. KBS 드라마 <태양의 후예>로 다시 뜨기 시작하는 이른바 한류의 공은 온전히 미디어 노동자들의 정신적 육체적 노력의 대가이기 때문이다.

정의당의 경우, 노사정협의체를 구축하여 표준보수지침을 의무화하고 최저임금을 보장하도록 하며, 10인 미만 중소출판사의 근로감독을 강화하겠다는 공약도 담고 있었다. 포털의 뉴스제휴평가위원회에 시민단체, 노동조합도 참여하도록 한다는 제안 또한 바람직하다. '포털'이라는 대단히 '한국적인' 현상에 대한 깊은 논의가 더 필요하지만, 우선 기존 오프라인 이익단체의 이데올로기만 반영되는 것에 저항하겠다는 정치적 고뇌가 엿보인다.

더민주가 내세운 지역미디어센터와 공동체라디오방송 활성화 공약은 새누리당과 동일했다. 여기 다소 행정편의주의적 발상이 보인다. 미디어교육을 진흥하고 동네라디오를 만드는 것은 중요하지만, 모든 시민이 모두에게 말할 수 있는 초연결사회에서 그 실효성은 어떠한지 치밀한 검토가 필요한 대목이다. 아날로그 시대적 발상은 시민의 디지털 생활을 따라가기 어렵다.

상대적으로 늦게 창당한 국민의당이나, 녹색당은 별도 공약 없이 전체 공약집에서 미디어 공약을 제시했다. 국민의당의 경우 더민주, 정의당과 마찬가지 공영방송 거버넌스 개선을 내걸었고, 콘텐츠산업 표준계약서 의무화의 공약도 있다. 다만 농어촌 인터넷 사각지대를 개선한다는 공약은 새누리당의 스마트기기 보급과 사실상 동일한 맥락이다. 소위 좌와 우의 모습을 모두 가진 독특한 공약집이다. 녹색당은 인권 분야에서 미디어와 표현의 자유 관련된 공약을 제시하고 있다. 위험커뮤니케이션이 매우 중요한 기능을 하는 오늘, 환경정당으로 미디어에 대한 관점은 더 많은 논의가 필요해 보인다.

노동당의 공약에는 깊은 울림이 있었다. '미디어도서관' 건립이 그것인데, 독일을 비롯한 유럽 주요 국가들은 대부분 커뮤니케이션 박물관이나 커뮤니케이션 도서관을 갖추고 있다. 그들은 근대 이후 역사적 관점을 커뮤니케이션의 역사로 확장시키고 있다. 이런 미디어 철학을 보여주는 정당은 노동당이 유일했다. 대한민국의 정당들은 미디어라는 ‘민주주의 생산기계’에도 정치철학을 더 강하게 불어넣어야 하겠다.

베를린자유대 언론학 박사
경희대 강사
정책소통연구소 연구실장

서 명 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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