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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일 박지원 국민의당 원내대표가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국회의장직 선출과 관련한 언급이 여의도 정치권의 큰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박 대표는 이날 "국회의장은 민의에 따라 (1당인 더민주가) 해야 한다는 게 원칙이지만 무엇이 국가와 국민을 위해 바람직하냐는 게 더 중요하다. 개원협상과정에서 대통령이 솔직하게 지난 3년의 실패를 인정하면서 도움을 구하면, 나머지 2년 대통령의 성공을 위해 '국회의장도 우리에게 협력해달 라' 그런 이야기를 한다면 우리는 국가와 국민을 위해 협의를 하겠다. 대통령이 성공해야 나라가 살고 대통령이 실패하면 나라가 망한다는 걸 IMF때 경험해봤지 않느냐."라고 말했다.

정치권은 ‘박 대통령 요청 시 협력’ 발언은 전제조건인 ‘국정 실패 인정’을 박 대통령이 받아들일 가능성이 사실상 제로라는 정치적 수사에 불과하다는 분석이 나온다. 더민주를 향해 부의장과 상임위원장 등 국회직 확보를 위한 협상력을 높이기 위한 수단으로 평가 절하하는 이들도 많다.

박 원내대표의 이 같은 발언에 각 당 관계자들에게서 즉각 반응이 터져 나왔다. 더민주 유력 국회의장 후보로 거론되는 문희상 의원(6선)은 28일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국회의 권위와 품격을 떨어뜨리는 말”이라고 직격했다. 그는 “국회의장을 대통령과 제3당 원내대표가 임명하는 것인가. 삼권 분립에도 어긋나고 소가 웃을 일이다. 박 의원의 경륜과 정치 감각을 높게 평가하지만 이는 다른 문제다.”라고 박지원 의원을 비판했다.

여당인 새누리당 새 원내대표 후보로 거론되는 나경원 의원은 29일 SBS 라디오 방송프로그램에 출연해 “박지원 원내대표는 워낙 오래 전부터 정치를 하셨기 때문에 조금 올드 스타일(old style) 아닌가."라고 혹평했다. 그는 또 “박 의원은 늘 정치의 신이라는 말을 달고 다닐 정도로 탁월하신 분이긴 하다.”며 “그런데 국민은 정치인들끼리 나눠먹고 정치인들끼리 거래하는 것에 대해서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이제 20대 국회는 새로운 정치를 해봐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박 원내대표를 에둘러 비판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2000년에 치러진 16대 당시 한나라당이 다수당이 됐지만, DJ 정권의 국정운영의 안정 운영을 위해서 처음 전반기에는 양보를 해드렸다.”고 설명하면서 20대 국회 초반기 여당의 국회의장직 정당성을 주장했다.

한편 29일 오전 김대중 전 대통령의 3남인 김홍걸 더민주 국민통합위원장은 페이스북에 글을 올려 박 의원을 정면 비판했다. 그는 “군사독재정권 이후 여당에서조차 국회의장 선출 건을 청와대와 상의하겠다고 노골적으로 말한 경우가 없다.”며 “삼권분립의 원칙을 정면으로 위배하는 일이기 때문이죠.”라고 덧붙였다. 김 위원장은 박 의원을 가리켜 “4선이라 그 정도는 아시는 줄 알았다.”라고도 꼬집었다. 박 의원은 이날 국민의당 최고위원회 직후 기자들과 만나 “김홍걸 씨 문제에 대해 제가 답변하는 것은 적절치 않고 제 부덕의소치다.”라고 말했다.

1987년 민주화 이후 헌법이 개정되고 대통령의 국회해산권이 폐지되었다. 국정조사 및 감사권, 일상적인 자료 요구권 등 의회의 권력은 갈수록 증대해왔다. 특히 2004년 이른바 오세훈법 등장 이후로는 곳곳에서 대통령 권력은 약화되고 3권 분립이 정착되는 방향으로 흘러오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의 ‘배신의 정치’ 발언을 유발한 2015년 4월 8일 당시 유승민 새누리당 원내대표의 국회 연설은 기존 개념으로 보자면 도전이지만, 이러한 거대한 정치권의 변혁과정을 이해한다면 오히려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나경원 의원의 말을 빌자면 여야를 가릴 것 없이 그것을 읽어내지 못하는 올드 스타일이 문제인 것이다.

국회법 제15조 제①항 규정에 의하면 “의장과 부의장은 국회에서 무기명투표로 선거하되 재적의원 과반수의 득표로 당선된다.”고 돼 있다. 제③항을 보면, “제1항의 득표자가 없을 때에는 2차 투표를 하고, 2차 투표에도 제1항의 득표자가 없을 때에는 최고득표자가 1인이면 최고득표자와 차점자에 대하여, 최고득표자가 2인 이상이면 최고득표자에 대하여 결선투표를 하되, 재적의원과반수의 출석과 출석의원 다수득표자를 당선자로 한다.”라고 규정돼 있다. 따라서 이번에 123석을 당선시킨 더민주와 122석의 새누리당이 관행에 따라 각각 의장 후보를 내면 제3당인 국민의당은 적절한 의장 후보를 선택하면 그만이다. 문희상 의원의 말처럼 국회법 어디에도 대통령과 제3당 원내대표가 국회의장을 ‘임명’하도록 할 근거는 없다.

그런데 김홍걸 위원장이 “군사독재정권 이후 여당에서조차 국회의장 선출 건을 청와대와 상의하겠다고 노골적으로 말한 경우가 없다.”고 했지만 이 역시 그 근거는 빈약하다.

13대 전반기 국회의장은 여소야대였지만 1당인 민정당 출신의 김재순 의원이 맡았다. 샘터사 이사장 출신인 그는 4·13 호헌조치가 발표되자 각종 일간지에 이를 철회하라는 칼럼을 여러 차례 기고해 노태우 민정당 대표와 만나게 됐고, 6·29 선언 이후 민정당에 참여했다. 5·16 당시 민주당에서 공화당으로 변절하였고 DJ 비토에 앞장선 점 등을 들어 평민당과 일부 통일민주당 의원들이 반대했으나 결국 그는 개원협상을 통과했다.

무려 3선 국회의장을 지낸 고 박준규 의장은 3번 모두 청와대의 낙점을 받았다. 13대 후반기는 야당의 불참 속에 의장으로 선출되었고, 14대 전반기는 총선 결과 민자당이 과반에서 1석 모자랐지만 무소속 의원들의 영입으로 과반의석을 채움으로써 손쉽게 의장 연임에 성공했다. 이때도 그는 동향(TK)인 노태우 대통령의 낙점을 받았다. YS의 재산공개 파동으로 1년 남짓 만에 의원직을 사퇴한 그는 15대 JP의 자민련의원으로 화려하게 복귀한다. 1998년 DJ-JP의 합의에 따라 15대 후반기 국회의장 후보로 여권 단독 후보로 출마해 야당 후보인 오세응 의원을 상대로 3차 투표까지 가는 접전 끝에 149 대 139표, 즉 10표 차이로 승리했다. 한편 야당이었고 최종 당선에 이르지 못했지만 한나라당 오세응 의원은 당내 경선에서 신상우 의원을 상대로 1표 차이로 신승한 첫 국회의장 후보였다.

1996년 15대 전반기 의장은 YS계 김수한 의원이었다. 청와대는 8년 만에 여의도로 복귀한 YS계 김 의원을 국회의장으로 노골적으로 지명했다. 신한국당 역시 13, 14대에 이어 139석에 그침으로써 과반수가 미달이었으나 무소속과 통합민주당 의원들을 포섭해 개원 당시는 156석으로 여유 있게 국회의장직을 차지했다.

2000년 16대 전반기 의장은 이만섭 의장이다. 273석(IMF로 26석 감축) 중 공동여당은 132석(새천년민주당 115석, 자민련 17석), 한나라당은 133석을 차지해 또 다시 여소야대였다. 이에 민국당 2석을 연정에 합류시키고 호남지역 무소속 4석을 합류시키며 공동여당은 138석으로 과반의석(137석)을 간신히 넘겼다. 당초 이윤수, 안동선 의원 등 민주당 중진들은 “본선 경쟁력 있는 후보를 합의 추대해야 한다.”고 설득했지만, 정범구 의원 등 초·재선 의원들이 의원총회에서 “자유투표로 선출토록 한 국회법을 따라야 한다.”라고 주장하면서 이만섭 의원도 “당당하게 경쟁해서 우리끼리 투표로 후보를 정하자”고 동의했다. 결국 386세대 당선자들이 제시한 교황식 선출 방식을 선택했고 이만섭 의원이 국회의장 후보로 최종 선출됐다.

2004년 17대 전반기 국회의장은 김원기 의원이다. 17대 최다선인 김 의원은 열린우리당 의원총회에서 만장일치로 국회의장 후보로 선출됐다. 그는 대통령 또는 제1당 총재가 임명하지 않은 최초의 국회의장으로 기록됐다. 2004년 6월 7일 개원식에서 김원기 신임 국회의장은 “17대 국회는 반세기 동안 보여준 과오를 극복하고 민의의 전당이자 국정 논의의 중심무대로, 국민통합의 산실로 거듭 태어나 제2의 제헌국회로 만들자”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후 김 의장은 이를 몸소 실천했다. 국회 사무총장(장관급)과 도서관장, 의장 비서실장 등 임명직 인사도 대통령의 입김을 철저히 배제하고 국회 자율로 실시했다. 고(故) 노무현 대통령 역시 ‘의회를 존중하고 의회가 정치의 중심이 돼야 한다.’는 소신에 따라 이를 존중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정치적 사부로 불리는 김원기 의장이 이끈 17대 국회는 더 이상 통법부(通法府)가 아니었다. 노 전 대통령은 개원 직후 첫 번째 맞이한 제헌절에 국회의장 공관을 방문해 5부 요인 부부와 만찬을 함께했다. 대통령이 의장 공관을 찾은 것은 정부 수립 이후 전무후무한 일이다.

김 의장은 국회의장 직권상정을 요구하는 대통령과 여당 지도부를 끝까지 설득하기도 했다. 2006년 3월 2일 국회 본회의는 비정규직 관련 법안을 놓고 국회의장 직권상정까지 시도하며 처리를 강행하려는 열린우리당과 이에 반대하던 야 4당 간 대치 상태였다. 당시 노 대통령은 노동부장관의 건의로 직접 김 의장에게 전화를 걸어 비정규직 법안 얘기를 꺼냈다. 그러나 김 의장은 “여당은 급하겠지만 직권상정은 적절치 않다.”고 거절해버렸다. 그러자 노 대통령은 “김 의장의 정치적 판단은 단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으니 그대로 하십시오.”라며 김 의장의 뜻을 수용했다.

이후 국회의장 선출에는 당내경선이 정착됐다. 17대 후반기는 4선인 임채정 의원이 5선의 김덕규 의원을 물리쳐 파란을 일으켰다. 18대 전반기는 한나라당이 과반수를 차지해 김형오 의원이 경선을 통해 안상수 의원을 꺾었고 본회의에서 형식적 절차만을 거쳤다. 19대 전반기는 강창희 의원이 정의화 의원을 누르고 과반의석의 새누리당 의장 후보로 선출됐으며, 후반기에는 비박계 정의화 의원이 친박계 황우여 의원을 더블스코어 이상 차이로 앞서며 의장 후보에 선출됐다.

이상을 살펴보면 국회의장의 민주적 선출이 시작된 것은 사실상 1997년 12월 김대중 대통령의 평화적 정권교체 이후이다. 그것도 당시 야당인 한나라당이 먼저 시작했고 이어서 열린우리당이 뒤를 따랐다.

대한민국 제46조 제②항을 보면, “국회의원은 국가이익을 우선하여 양심에 따라 직무를 행한다.”라고 돼 있다. 즉, 우리 헌법의 가치는 “정당의 이익과 국가의 이익이 충돌하면 국가의 이익에 우선해야 한다.”는 지상명령이다. 4·13 총선에서 38석 원내교섭단체와 635만표라는 정당투표 2위를 지지해준 유권자의 의사는 결코 국민의당에 대한 ‘당리당략’을 보고 한 것이 아니다.

국민의당은 현재 6선 1명, 4선 6명, 3선의원이 2명인 가분수 정당이다. 경륜과 노회함이 장점으로 작용할 수 있지만 이번 실수처럼 자칫하면 걸림돌로 작용할 수도 있음이다. 더욱 더 겸손하고 낮은 자세로 임해야 할 것이다.

 

 

 

최 광 웅

데이터정치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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