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대로 하자, 헌법대로 하라

4.13총선, 유권자가 내린 구태 정치에 대한 사망 선고

얼마 전 서귀포 혁신포럼에서 총선을 둘러싼 우리 정치 현실에 대해 강연을 할 기회가 있었다. 강연 중 이번 총선의 승자는 누구인가 물었다. 대다수 참석자들이 한결같이 ‘국민’이라고 답했다.

이처럼 유권자들은 국민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정치권에 보여주는 선거였다고 평가한다. 그렇다 이번 선거는 구태정치에 대한 국민의 승리이며, 여론 선동과 정치공학에 대항해 정의와 진실을 향한 국민 열망의 승리라고 규정할 수 있다.

총선 전 언론들의 보도를 행태를 살펴보았다. 진보, 보수를 떠나서 언론들이 쏟아 내놓은 표현들은 친박, 진박, 살생부, 옥새반란, 친노, 친문, 패권, 호남홀대론, 야권 분열, 독선, 호남 자민련 등이 지배적이었다. 이 담론들을 무작위로 지면위에 뿌려 놓고 국내 사정을 모르는 외국인에게 무슨 사건을 의미할 것 같으냐고 물으면 어떤 대답이 나올까 자못 궁금하다.

10여년전 프랑스 친구 막 마르땡이 한양대학교 건축학과 교수로 임용되어 나보다 먼저 한국에 오게 되었다. 나도 1년 뒤 학위를 마치고 귀국해서 광화문의 한 까페에서 그를 만났다. 그는 우리사회를 이해하기 위해 매일같이 코리아 헤럴드를 읽었다고 한다. 그런데도 한국사회가 어떤 사회인지 전혀 이해가 가지 않았다는 것이다. 매일같이 사건과 사고가 일어나고, 정치는 매순간 대립하고 갈등하며 눈살찌푸리는 장면만을 연출하고 있는데, 정작 이 사회가 지향하고 있는 것이 무엇이며, 어디로 향해 나가고 있는지 그리고 어떤 공동체적 가치가 있는지 전혀 찾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10년 만에 한국 땅을 밟은 나로서도 어떤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그로부터 10여년이 지난 오늘, 총선에서 보여주는 정치 풍경을 보면서 문득 마르땡이 한 이야기가 새삼 떠올랐다. 한 치도 변함없는 우리의 정치 현실을 보면서 국민들이 얼마나 큰 자괴감과 분노를 가슴에 안고 있었겠나 하는 생각이 든다. 총선 결과를 보고 많은 지식인들은 이번 선거는 정치에 대한 국민적 분노의 표출이자 사망선고였다고 평가한다.

그렇다면 유권자들은 어떤 마음에서 이러한 선거 결과를 만들었을까?

먼저, 현 정치의 구조적 모순에 대한 불만과 강한 경고의 메시지를 읽을 수 있다. 과연 우리의 대의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가? 지금의 정치가 우리 사회의 평범한 시민들과 다수의 약자들을 대의하고 있는가? 이번 총선에서 정치세력들은 정치적 비전과 정책 대안 보다는 자신들만의 리그 속에서 공천 갈등, 권력투쟁만을 보여주면서 사회적 불안과 대립을 부추기는 꼴을 보였다. 이런 와중에 시민들은 이 선거가 자신들의 삶에 어떤 변화를 줄지에 대해 전혀 예측할 수 없이 오히려 불안감만 가중시켰다. 아울러 유권자들은 투표를 통해 과연 선거가 국민 모두가 주인이 되는 민주주의의 축제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던졌다.

둘째, 정치인 개개인의 자질에 대한 국민적 실망이 얼마나 컸는지를 보여주었다. 정치인들의 비방과 정제되지 않는 저급한 언행들은 서로간의 갈등을 더욱 확대시키면서 선거판을 난장판으로 만드는 결과를 보였다.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톡과 같은 SNS를 통해 즉흥적이고 절제되지 않는 저급한 표현들이 정치 담론을 주도하면서 오히려 정책이나 정치적 비전, 가치를 이야기하는 언어들은 공론장에서 배제되었다. 언론들은 진보와 보수를 떠나 이에 부응하면서 저급한 상업적 정치저널리즘의 정수를 보이며 톡톡한 재미를 봤을 것이다. 언론 공론장은 정치공학적 언어게임의 장으로 전락하면서 시민들의 삶과 사회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였다. 오히려 자신들이 지지하는 세력과의 정치적 이해관계만을 표출하거나 진영논리를 대변하는 선동의 장이 돼버렸다.

셋째, 정치공학과 경마식 여론조사 정치에 대한 단죄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이번 총선이 보여준 두드러진 문제는 여론조사 프레임에 갇힌 최악의 정치공학이 판쳤다는 점이다. 경선방식에서부터 선거운동, 정당의 대응 전략에 이르기까지 여론조사가 지배하는 산술 정치(arithmetic politics)가 경마식 경쟁을 부추기면서 정책 경쟁을 선거판에서 배제시켜버렸다.

여론조사기관들은 신뢰도가 낮은 온라인 RDD 방식의 조사를 반복하면서 결과의 대표성이 부족함에도 지속적으로 언론에 흘려보내면서 정치판을 좌지우지하는 주군노릇을 했다. 이들은 무응답, 역선택, 거짓진술 등의 응답자 통제가 불가능하고, 샘플이나 패널 군이 정치적 바이어스(bias)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음에도 산술적인 결과를 정치 현실의 결과로 포장하여 유권자들의 의식에 영향을 주고자 했다.

월터 리프만(Walter Lippmanne)의 지적처럼, 여론조사기관들은 이러한 여론조사를 통해 만든 산술적 정치 프레임 속에 자신들이 제시하고 있는 개념과 이름을 유권자들에게 강요하고 스테레오타입화하면서 진정한 민의를 왜곡하는 선봉장이 돼버렸다. 또한 여론조사 조작 사건은 정치적 신뢰를 땅에 떨어뜨리는 결정타가 되었다.

결국, 이번 선거는 여의도 안에 갇힌 이러한 자폐적인 정치공학과 이미지 정치에 대한 사망선고였다.

민심 알파고가 정치공학에 던진 경우의 수

투표 결과는 어느 누구도 예상치 못한 국민의 의지를 드러냈다. 투표 전 모든 언론과 여론조사 기관은 여당 160석에서 200석까지 내다보면서 새누리당의 완승을 예견하면서 각종 조사 결과를 쏟아놓았다. 종편에 출현한 정치 평론가들은 온갖 정치공학적 상상력을 발휘하면서 예언자들처럼 논평을 쏟아냈다. 그러나 투표함을 열었을 때 어느 누구도 예상치 못한 성적표를 받아들게 되었다. 새누리당 122석, 더불어민주당 123석, 국민의당 38석, 정의당 6석, 무소속 11석. 국민이 매긴 이 성적표는 과연 무슨 메시지가 들어있을까?

얼마 전 이세돌과 알파고 사이에 바둑시합이 있었다. ‘딥 러닝(deep learning)’이라는 인공지능 프로토콜이 장착된 알파고는 경기를 하면 할 수록 스스로 학습하며 발전함으로써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경우의 수를 훨씬 뛰어넘어 승리할 수 있는 수만을 두게 되고 종국에는 이세돌을 궁지에 몰아넣었다.

이번 총선에서도 ‘민심 알파고’를 보게 된다. 민심의 딥 러닝(deep learning)은 정치세력들의 정치공학(political engineering)이 얼마나 보잘 것 없는지를 보여주듯이 상상을 뛰어 넘는 정치공학의 정수를 보여주었다. 새누리당의 예상 밖 참패, 제1당임에도 호남에서 전혀 지지를 받지 못한 더불어민주당, 제3정당으로 자리를 굳혔지만 수도권에서 당선자를 거의 내지 못한 국민의당 등.

총선결과는 어느 정치세력에게도 일방적인 힘을 실어주지 않고, 각 세력들에게 중대한 정치적 과제를 던져주었다. 민심 알파고 앞에서 지금까지 정치 세력들이 남발했던 전략과 전술이 얼마나 보잘 것 없고 무기력한 것인지를 확인한 것이 이번 총선의 정치사적 큰 의미가 아닌가 생각된다. 과연 민심이 정치권에 던진 문제는 무엇일까? 민심 알파고는 각 정치 세력들에게 정권 창출과 관련한 무수한 경우의 수를 던졌다. 민심은 끝내는 국민이 승리하는 방향으로 정치를 끌어갈 것이다. 그리고 이 민심에 부응하는 세력만이 권력을 창출할 수 있을 것이다.

ⓒ박태순

정치(Politiké)로 돌아가서 민주주의의 새판을 짜라!

20대 총선은 한마디로 정의한다면 ‘민주주의의 쓰나미’라 할 수 있다. 민심은 기존의 정치공학에 몰입된 정치판을 뒤흔들면서 바른 정치에 대한 열망을 쏟아내었다. 온 국민이 직면한 국가적 난제와 반민주, 반역사, 반인권, 반평화적인 행태에 대하여 준엄한 심판을 내리면서 민주주의의 새판을 짤 것을 명령한 것이다.

ⓒ박태순

이제 어떤 정당도 국민의 명령을 수반하여 민주주의의 새판을 짜지 않으면 수권정당이 될 수 없을 것이다.

플라톤은 정치를 두가지 형태로 구분하여 중우정치(mobocracy)를 극복하고 철인정치의 가능성을 제시하였다. 물론 오늘날 철인정치를 주창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플라톤의 정치론은 오늘날에도 중요한 메시지를 던져준다. 플라톤의 정치에는 기술정치(technical politics)와 숙의정치(epistemic politics)가 있다. 기술정치는 개개인의 정치 능력, 전략과 전술, 언술능력, 정치적 관계망 등 일종의 정치 공학의 영역이다. 숙의정치는 지식 혹은 철학이 내재된 정치로 정책, 제도, 공동체 및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 등에 대한 사유의 영역이다.

플라톤은 이 두 영역이 조화로울 때 진정한 정치(Politiké)가 가능하다고 보았다. 정치공학과 숙의정치가 조화를 이룰 때 정치는 예술적 차원으로 승화된다. 현대 민주주의 사회에서 이와같은 정치의 가능성은 ‘헌법’에 의해서 보장된다. 헌법은 현대 시민사회에서 사회계약의 최상위 결정체로 국가 조직, 기능을 제한하고 정치행위와 공권력을 한정함으로써 국민주권과 기본권을 보장한다.

이제 낡은 책장 속에 유폐되어 있던 헌법을 끄집어내어 높이 들고 민주주의의 새판을 짜야한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정치가 헌법대로 하도록 해야 한다. 정치가 공공선의 목적성을 재확인하고 헌법전문이 제시한 인권, 정의, 평등, 자유, 평화의 공동체 비전, 헌법 1장의 제시하는 국민 통합과 공동체 보호를 위한 실천, 헌법 3,4,5장이 규정한 권력 분립의 원칙에 따른 대의(代議)를 준수하며, 국민투표, 국민소환, 국민발안 등 국민의 정치적 기본권을 보장해야 한다. 정치의 새판은 바로 헌법에 기초할 때 가능하다.

둘째, 정치인도 헌법대로 해야 한다. 정치인은 우선적으로 윤리적인 덕성의 기본을 갖춰야 한다. 다산이 목민심서에서 제시한 율기(律己, 자신을 다스림), 봉공(奉公, 공익에 봉사), 애민(愛民, 국민을 사랑함)의 심성을 갖춰야한다. 그리고 200여개나 되는 특권을 줄여야한다. 이 특권이 권력에 대한 사욕을 부추기는 원인이 되고, 정치가 왜곡되는 시발점이 된다.

그리고 다음선거 보다 다음세대를 생각하는 정치 비전을 갖는 정치 인식이 필요하다. 올바른 정치 인식과 공공인식의 향상을 위해서는 정치 교육이 필요하다. 택시도 훈련을 받고 면허증을 딴 후에 운전할 수 있다. 대한민국을 운전하는 정치인들이 정치에 대한 전문 소양을 기르고 훈련을 받을 수 있는 정치 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 이를 통해 예비정치인들이 민주시민교육과 정치교육 그리고 민주적 소통 훈련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만들어졌을 때 우리의 정치 문화는 변화될 것이다.

ⓒ박태순

민주주의의 새판은 이와같은 구체적인 실천이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단순한 정치적 구호로 전락하게 된다. 헌법은 현대 국민국가가 존재해야하는 이유, 정체성, 목적을 명확히 제시하고 있다. 국민주권은 시민들의 정치적 생존조건이 현대 국민국가의 최고의 가치임을 명시하는 의미가 있다.

막스 베버(Max Weber)는 1895년 5월 프라이부르크 대학 교수 취임 강연에서 국가주의적 가치판단이 국민의 삶에 얼마나 중요한지를 상기시켰다. 그는 가장 중요한 인간의 사회적 생존조건이 정치 영역이라는 점을 명확히하면서 국민국가 내에서 경제적 생존조건과 더불어 정치적 생존조건이 사회의 다양한 계급과 계층을 경제적으로 그리고 정치적으로 성숙시킬 수 있음을 강조하였다. 따라서 베버는 국가는 최상의 윤리적, 도덕적 존재로서 그리고 사회정책의 담지자이자 주체로서 각 사회적 존재들, 집단들, 개개인들을 유기적으로 구성하고 시민들의 정치적 성숙에 기여해야함을 강조하였다.

또한 민주주의의 새판은 변화하는 시대정신과 국민들의 집단의지에 부응하면서 새로운 정치 주체가 변화를 이끌고, 또 국민들의 요구에 맞게 스스로를 개혁해야 한다. 에드워드 카(Edward Hallett Carr)는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한시대의 문명발전에 주도적 역할을 담당한 집단은 다음시대에서는 그같은 역할을 수행하기 힘들다.” 며, “그런 집단은 이전시대의 전통, 이해관계, 이념에 너무 깊이 젖어있는 탓에 다음시대의 요구나 조건에 적응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우리의 정치 현실에서 진정으로 필요한 말이 아닌가 생각한다.

총선에서 나타난 민심은 새로운 변화, 민주주의의 새판을 짤 것을 명령하고 있다. 그럼에도 기존 정치세력은 여전히 반민주 독재, 기득권 세력, 친노, 친문, 운동권, 패권주의라는 과거 역사의 흔적들에 매어 있는 형국이다. ‘87년 체제의 극복’이라는 담론은 유령처럼 존재하는 진보와 보수, 그 안에서 안주하며 상호간에 기득권을 누려온 과거 세력과 관습에 대한 비판적 격문이 아닐 수 없다.

 

박태순
파리1대학 정치학 박사
성균관대학 초빙교수
미디어로드 연구소장

 

<돌직구뉴스>후원회원으로 동참해 주십시오. 눈치보지 않고 할 말 하는 대안언론!  시민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당당한 언론! 바른 말이 대접받는 세상을 만드는데 앞장 서겠습니다.

 

저작권자 © 스트레이트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키워드

Tags #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