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혹을 택한 정치인 No는 그것이 Nothing임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Jon S

“No라는 정치인에 대한 민심의 갈망이 확산되고 있다”-이것은 언론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정치기사다. 주군에 대한 갈망이 늘어난다니 No의 지지세력은 흐뭇한 미소를 지을지 모른다. 민심을 먹고 사는 정치가 언론보도에 관심을 갖는 까닭이다. 여기 문제는 과연 언론이 민심을 반영하느냐이다. 언론보도는 민심과 일치할까.

요즘 자주 발생하는 살인사건을 나는 직접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자동차끼리 충돌하는 장면도 보지 못했다. 그런데도 나는 사건·사고가 일어날까 두려운 마음 없지 않다. 다름 아닌 언론보도 때문이다. 사실상 나와 무관한 세계의 일임에도 연일 터져 나오는 뉴스가 나의 일상을, 아마도 당신의 일상을 지배한다. 더구나 뉴스의 내용이 아니라 형식, 달리 말해 질이 아닌 양에 지배당한다는 사실 앞에서 우리의 독자적인 판단능력은 설 자리가 별로 없어 보인다.

이 메커니즘은 단순하다. 보도량이 많은 뉴스가 화두가 되고 우리 의식을 압도한다. 이런 사실을 인식하는 것조차 보도량에 좌우된다. 뉴스의 양보다 질이, 내용이 중요하다는 평범한 사실도 언론이 많이 보도해야 인식할 수 있을 정도, 우리의 인식은 언론에 종속되어 있다. 진실은, 더구나 민심은 단순히 언론보도량에 좌우된다. 많이 보도되지 않으면 그것은 우리의 인식 속으로 들어오지 않는다. 오늘 언론은 우리의 눈과 귀일뿐만 아니라 머리이고 마음이다. 우리의 마음은, 민심은 언론에 반영된 것이 아니다. 언론이 ‘민심’을 생성시킨다. 보도량은 민심이라는 질의 이름을 얻는다. 양이 질이 되는, 미디어의 양질전화 법칙이다. 정치가 주목해야 할 대목이 바로 여기에 있다.

지난 4·13총선은 정치와 언론, 여론과 민심에 대한 많은 물음을 던진 선거였다. 여기저기 난무한 여론조사는 물론 언론보도 역시 민심과 유리되어 있음을 잘 보여줬다. 흥미로운 점은 양질전화의 법칙이 작동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른바 선출되지 않은 권력으로서 그 동안 정치를 좌지우지했던 언론은 지난 선거에선 체면을 많이 구겼다. 종편채널과 이른바 메이저신문들을 중심으로 연일 터져 나오는 충격적이고 선정적인 기사들, 거기에 ‘공천’, ‘컷오프’, ‘친박’, ‘비박’, ‘친노’, ‘친문’과 같은 정치공학적 담론들, 그리고 이어지는 각종 함량미달의 여론조사-여기 민심은 담겨 있지 않았다. 그것은 국민의당의 선전에서 보이듯, 어떤 언론도 예측하지 못한 절묘한 선거 결과가 말해준다.

오히려 언론은 민심과 동떨어진 각종 흑색선전과 가십성 보도, 이른바 경마식 보도로 점철된 태도로 일관했다. 민언련의 총선보도평가서에 따르면 본격적인 선거운동 개시전 기간부터 77일 동안(1월 14일부터~3월 30일까지) 조선 167건>동아 137건>중앙 84건 순으로 문제 있는 보도 지적을 받아 3사 자존심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언론이 민심을 대변한다는 생각은 사실 멀리 조선 중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훈구파와 적대적 관계에 있던 사림파는 사간원, 사헌부, 홍문관 3사를 장악하고 관리의 비리를 감찰하거나 심지어 왕의 잘못을 비판하기도 한다. 홍문관은 왕의 자문기관이기도 했다. 이 언관직의 사림파가 내세운 정치는 이른바 왕도정치였는데, 왕조차 민심에 역행해서는 안된다는 민본주의의 다른 이름이었다.

경국의 기반을 민심에서 찾아야 한다는 말씀인데, 신문도, 방송도, 더구나 SNS도 없던 시절 왕은 어떻게 민심을 알 수 있었을까. 해답은 3사에 있었다. 3사의 견해가 곧 민심이었다. 사림은, 언관직은 이렇게 왕권 위에 군림한다. 변질된 붕당정치가 예송논쟁으로, 그리고 19세기 세도정치를 거쳐 구한말 사대주의 기회주의자로 이어지는, 저 유명한 사색당파의 공허한 논쟁 속에서 이 언관직들이 과연 얼마나 민심을 반영했겠는가. 예송논쟁이라는 멋스런 이름으로 불린 제사문제는 과연 얼마나 민생과 관련이 있는가.

오늘 사색당파를 능가하는 패거리 정치판이 저 조선의 망국적 정치현상의 재탕이 아니라고 확실히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임진왜란마저 초래한 내용 없는 논쟁에서 왕권을 지배한 3사가 아무런 책임이 없다고 말하기도 어렵다. 이는 마치 조중동 3사가 오늘 혼돈의 정치판에 아무런 책임이 없다고 말하기 어려운 것과 같은 것이다.

3사의 ‘미디어 엘리트’들은 민심을 대변한다고 자부한다. 사정이 그러하니 권력을 꿈꾸는 자는, 대통령이 되고자 하는 자는 먼저 3사의 권력에 굴복하라고 주문한다. “No라는 정치인에 대한 민심의 갈망이 확산되고 있다”는 뉴스와 그에 걸맞는 여론조사를 연일 보도하면 그것이 곧 민심이 된다고 유혹한다. 보도량에 지배당하는 우리의 인식지도는 이런 3사의 유혹에 자신감을 더한다.

그럼에도 지난 총선은 민심이 결정적인 순간에 보도량에 좌우되지 않고 독자적인 성격을 갖고 있음을 보여줬다. 언론이 민심의 진정한 요구를 정확히 파악하고 대량보도하지 않으면 미디어 양질전화의 법칙은 작동하지 않는다. 언론의 펜은 곧 칼이요, 양날의 칼이다. 한편은 법칙이요, 다른 한편은 유혹이다. 유혹을 택한 정치인 No는 그것이 Nothing임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미디어 양질전화 법칙의 메커니즘을 잘 알아야 한다.

 

 

베를린자유대 언론학 박사
경희대 강사
정책소통연구소 연구실장

서 명 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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