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의 사다리’를 살려내는 정당이 대선에서 승리한다

대한민국은 양반의 나라다. 2013년 행정자치부가 실시한 공무원 총조사에 따르면, 현대판 과거인 행정·외무·기술고시 등 5급 공채출신의 입신(立身)자료가 돋보인다. 5급으로 공직에 입문해 고위공무원단까지 승진하는데 걸린 기간은 5년 전보다 2년 6개월 단축된 총 21년 2개월이었다. 이에 반해 7급은 겨우 1개월 줄어든 28년 2개월, 9급도 7개월 단축된 32년 9개월이 소요됐다. 그래서 9급으로 시작한 경우는 고위공무원의 겨우 5.6%만을 점유할 뿐이다.

또 다른 자료도 있다. 지난 6월 인사혁신처가 공개한 바에 의하면 고위공무원단의 현원은 총 1505명이다. 이중에는 5급 공채출신이 1081명, 무려 71.8%나 된다. 그리하여 평균 승진소요연수는 다시 한 번 21년으로 조금 더 단축됐으니 나향욱 前교육부 정책기획관의 표현처럼 공직사회부터 신분제가 고착화되어가고 있다.

누가 뭐래도 관료의 꽃은 차관이다. 비록 정무직이긴 하지만 공직에 입문하면 누구라도 선망하는 자리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국민대통합과 탕평인사를 공약으로 내걸었으나 차관(급) 인사를 실시하는 과정에서는 고시출신 관료들을 우대했다. 첫 조각 당시를 보면 5급 공채출신 36명, 사법고시 출신 3명, 교수·전문가 13명, 경찰·소방관 3명, 직업군인 출신 2명, 기자 1명, 정치인 1명, 서기관특채 1명, 7급 공채 1명 등이었다. 무려 59%가 5급 공채출신이며 사법고시 출신 등 공직자 계열이 무려 73.8%다. 흙 수저라고 할 수 있는 7급 공채출신은 이충재 행정중심복합도시건설청 청장이 유일하다. 그는 고등학교만을 졸업하고 곧바로 공직에 들어왔으며 뒤늦게 방송대를 다니고 박사학위까지 취득했다. 이제 곧 박 대통령 취임 3년 반이 다가오는데 이전 정부에서는 간혹 있었던 9급 출신 차관은 이제는 양념으로도 전혀 배출하지 않고 이충재 청장이 유일한 非고시 관료다.

출신 대학 분포를 살펴봐도 단연 서울대가 22명으로 1위이다. 이는 6명인 성균관대를 크게 앞지른 숫자이다. 나머지 수도권 대학이 20명, 지방대 9명, 사관학교 2명, 경찰대 1명, 방송대 1명 등으로 나타났다.

9일 새누리당 당대표가 새로 선출됐다. 매주 정당 및 대선주자 지지도 등을 조사해 발표하는 한 여론조사회사가 이정현 의원이 간 발 승리를 한다고 예측했으나 그는 보기 좋게 1만2천여표 차이로 비박 단일후보인 주호영 의원과 이주영 前해양수산부장관을 꺾어버렸다. 주호영 의원은 영남대 고시반 출신으로 대구지법 부장판사를 퇴직하고 17대 때 정계에 입문한 대구 4선이다. 이주영 의원은 경기고와 서울법대를 나와 부산지법 부장판사까지 지낸 엘리트 중의 엘리트다. 16대부터 경남에서 내리 5선을 기록하고 있다.

이에 반해 이정현 대표는 출신 학교, 출신 지역, 내세울 만한 경력 등이 보잘 것이 없는 비주류 중의 비주류다. 그런 그가 집권 여당의 대표직을 움켜쥐며 일약 국가 의전서열 7위로 뛰어올라 인생역전에 성공했다. 이 대표는 전당대회장에서 펼친 수락연설을 통해 “비주류, 비엘리트, 소외지역 출신이 집권여당의 대표가 될 수 있는 대한민국은 기회의 땅이다.”이라고 강조했다. “가난한 사람들, 사회적 약자들, 방황하는 청년들의 문제 해결부터 시작하겠다.”라는 말도 분명하게 남겼다.

야당보다 3년 늦은, 1998년 8월 본격적으로 시작된 보수정당의 당 지도부 경선에서 비주류 다운 비주류가 당선된 건 이정현 대표가 유일할 만큼 지금 새누리당은 변화를 맞고 있다. 이회창, 서청원, 최병렬, 박근혜, 강재섭, 박희태, 안상수, 홍준표, 황우여, 김무성, 이정현 등... 역대 새누리당(한나라당) 선출직 대표(총재)는 총 13번의 전당대회를 거치며 11명(2명은 중복)이 선출됐다.

서울대 법대를 나와 판·검사로 사회생활을 시작한 이회창, 강재섭, 박희태, 안상수, 황우여 대표와 고려대 법대를 졸업하고 스타검사로 유명세를 탔던 홍준표 대표, 그리고 조선일보 기자 출신의 서청원·최병렬 대표는 그 출발부터가 달랐다. 어머니를 대신해 이미 20대 초반에 퍼스트레이디(걸스카우트 명예총재 등)로 정치를 익힌 박근혜 대표와 부친의 가업을 이어받아 사업부터 시작한 김무성 대표는 시쳇말로 금 수저들이다. 전직 원내대표와 사무총장 출신이 즐비한 가운데 이 대표는 가장 높은 당직이라곤 별 다른 힘도 없는 지명직 최고위원이 고작이었다.

비주류 이정현 대표는 1985년 2·12 총선 당시 고향을 선거구(곡성·담양·화순)로 하는 구용상 후보의 선거캠프에 몸을 담갔다가 그의 국회의원 비서로 정계에 입문했다. 3년 뒤에는 중앙당 당직자로 특채된 후 20년을 당료로 잔뼈가 굵었다. 당시도 대졸 취업난 속에서 민정당 5기(1984년) 공채는 30명 모집에 무려 50.3 대 1의 경쟁률까지 치솟을 정도로 인기 직종이었다. 동국대 출신인 이 대표는 뛰어난 경쟁자들이 버거워 1988년 평민당의 황색바람에 참패하고 민정당 제2사무차장으로 자리를 옮긴 구 前의원에게 도움을 청했다.

이 대표는 경남 거창군수를 거쳐 20대 총선에서 당선된 강석진 의원 등 공채 7기들과 함께 말단 간사로 출발했다. 그의 든든한 후원자였던 구 前의원이 전남도지사로 임명돼 나갔을 땐 비서실장으로 잠시 외도하기도 했으나 1995년 구 前지사가 사망하자 영남당에 홀로 남아 모진 세월을 견뎌야 했다.

일부언론과 야당인사들은 그에게 환관, 내시, 돌쇠 등의 폭언을 일삼고 있지만 기실 그는 생김과는 다르게 전공과목이 전략기획과 분석, 그리고 탁월한 홍보능력이다. 공채 출신이 아니면 행세하기 어려운 집권당 당료사회, 그것도 3류대학과 호남출신이라는 핸디캡을 딛고 살아남아 공을 들인 땀방울 때문이다. 2004년 천막당사 아이디어를 내며 위기의 당을 구해낸 사람이 바로 이정현 당시 국장이었다.

이정현 대표가 언론에 처음 등장하는 건 1995년 6월 지방선거 직전이다. 그는 당시 민자당 광주시지부 조직부장(3급)을 맡고 있었다. 본인이 직접 광주시의원으로 출마해 10.5% 득표율로 첫 번째 낙선의 고배를 마신다.

이듬해 그는 핵심보직인 여의도연구소 기획부장으로 전보되었고, 1997년 대선을 앞두고 다시 대변인실 자료분석부장으로 자리를 옮긴다. 2000년 총선 직전 대변인지원팀장(2급)으로 승진한 그는 16대 총선 선대위에서 미디어기획단장을 맡아 ‘한나라당 언론대책 공작문건’을 작성기도 했다.

이 대표는 2002년 대선 때도 정세분석국장 겸 대선기획단 전략기획팀장으로 정몽준 후보에 대한 내거티브 전략을 수립했다. 2003년 전략기획팀장을 거쳐 2004년 총선 당시 광주 서구(을)에 출마한 그는 겨우 1% 남짓한 득표로 참패했다. 총선 직후 운명적인 박근혜 대표와의 만남을 통해 상근부대변인을 맡은 그는 ‘박근혜의 남자’로 변신했다. 2007년 대선후보 경선 때는 공보특보, 2012년에는 선대위 공보단장을 맡아 ‘박근혜의 입’으로 맹활약했다.

따라서 이정현 대표의 인생역전을 단순한 우연이라고 치부해서는 안 된다. 2014년 7·30 보궐선거에서 26년 만의 광주·전남지역 최초 보수정당 후보의 당선, 지난 20대 총선에서 재선 성공, 이번 전당대회에서 보수정당 최초의 호남 출신 당대표 당선 등등... 이 모든 일들은 결코 행운의 연속이 아니다. 세월호 참사와 KBS사태에 대한 책임을 지고 물러난 그는 아무도 예상 하지 않은 가운데 7.30 보궐선거 승리를 거두었다. 4·13 재선은 철저하게 ‘소부겸’(소탈하고 부지런하고 겸손하다.) 전략의 성공이었다. 언론이 과장한 예산폭탄도 사실은 소규모 민원 위주로 풀어냈고 이는 그대로 적중했다. 소선거구제의 특성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서울과 순천을 왕복하는 비행기를 240차례 탔으며 읍·면·동을 2번씩 샅샅이 훑었다. 언론활용에 대한 이해도가 높은 이 대표는 이번 전당대회 기간 동안 최대한 언론을 통해 ‘이정현’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었다. 그래서 당원과 지지자들에게 그의 진정성을 전달하는데 최선을 다했다. 따라서 그는 무식한 돌쇠가 아니라 탁월한 선거 전략가다.

현재 더불어민주당의 직접적 기원은 1987년 탄생한 평민당이다. 이 당은 새누리당보다 1년 앞선 1997년부터 당대표 경선이 시작돼 총 9명을 배출했다. 정치인(김대중), 교수(손학규), 변호사(문재인), 기자(정동영), 회사원(정세균), 국회의원 비서(한화갑), 사회운동가(한명숙·이해찬) 등 다양하다. 출신대학은 역시 서울대가 가장 많고 텃밭 호남 출신이 많았다.

오는 27일 열 번째 배출될 더민주 당대표는 서울대 출신(김상곤·이종걸)이거나 판사 출신(추미애)이 될 것이다. 이종걸 의원도 변호사 자격증이 있으며 김상곤 후보는 1983년부터 25년 넘도록 한신대 교수로 재직했다. 문재인 前대표 시절 지명직 최고위원을 맡으며 그의 호위무사를 자처한 추미애 의원은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한양대 고시반에 진학했으니 그나마 스토리가 있는 편이다. 그렇지만 추 의원은 2004년 노무현 前대통령에 대한 탄핵을 주도한 원죄를 씻어야 하는 부담을 여전히 안고 있다.

“이제 우리도 명문 학교를 나온, 좋은 가문 출신의, 훌륭한 경력을 가진 사람이 대통령이 돼야 한다.” 새천년민주당이 노무현 대통령후보를 확정하고 본격적인 선거운동 국면에 들어가자 한나라당 관계자들이 퍼부은 대표적인 악담이다. 190만명이 참여해 선출한 국민후보를 인정하지 않은 그들은 명문 학교, 좋은 가문, 훌륭한 경력을 두루 갖춘 이회창 후보를 두 번째로 내세웠지만 끝내 실패했다. 상대를 무시하고 깔본 후과는 상상보다 대단히 컸다.

우리나라 최초의 고졸 대통령은 15대 김대중 前대통령이다. 그는 15대 총선에서 참패하며 대권 가도에도 빨간 신호가 켜졌으나 흙 속의 진주가 도움을 주어 3전4기를 완성했다. 오바마 캠프의 데이비드 플루프처럼 우리 한국도 유능한 전략가들은 대개 당료나 국회의원 보좌관 출신이 많다.

1996년 총선에서 국민회의를 창당한 김대중 총재가 79석에 그치며 대권 준비에 차질을 빚게 되자 이에 대한 전략적 대안을 내놓은 이는 바로 아태재단의 바로 이강래 박사였다. 그는 호남고립구도를 깨기 위한 전략으로 DJP연합 방안을 보고서로 제출한다. 이 박사는 1990년 민주당 공채 1기 당직자 출신으로 정책실 전문위원, 정책연구실장, 김대중 총재 비서실차장(14대 대선), DJ정계은퇴 후 영국동행, 아태재단 상임연구위원, 국민회의 정책연구실장 등을 거쳤다. 1997년 대선과정에서 김대중 후보의 기획담당특보로 맹활약했으며 국민의정부 출범과 함께 국정원 기획조정실장으로 임명됐다. 그는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대경상고를 나와 명지대 입학도 또래들보다 6년 늦은 1978년에야 이룬 흙 수저 출신이다.

2200년 前에도 중국 땅에는 장자방이 건달이나 다름없던 유방을 도와 한(漢)을 건국했다. 오늘 날에도 수많은 책사들이 선거현장에서 ‘전략가’라는 이름으로 맹활약을 펼치고 있다.

정부는 당초 사법고시를 2017년 폐지하려고 했으나 ‘희망의 사다리’를 놓지 않으려는 흙 수저들의 강한 반발에 부딪혀 4년 뒤로 연기했다. 이정현 대표가 비주류, 비엘리트, 사회적 약자, 방황하는 청년에게 더욱 많은 희망의 사다리를 제공한다면 보수정당 3연속 집권은 결코 불가능한 일만은 아닐 것이다.

진보언론과 야당, 그리고 깨어 있다는 시민들아! 영남 파시스트의 마름이라고 우습게 볼 일이 아니다. 환관·내시라고 무시하지 말라. 이정현 대표, 그는 적지 않은 내공이 있는 전략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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