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일 세상을 떠난 구봉서(90) 옹은 한국 코미디계의 대부이자 거목으로 불렸던 인물이다.

1945년 악극단 생활을 시작하며 희극배우의 삶을 산 고인은 1950년대에 방송·영화계로 활동 반경을 넓히며 1960~70년대 한국 코미디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우리나라 국민이 배고프던 시기에 특유의 재치있는 말솜씨로 큰 웃음을 줬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이후 그는 80년대 후반까지 왕성한 활동을 선보이며, 2002년 세상을 떠난 고(故) 이주일과 함께 대한민국 최고 코미디언 중 한 명으로 불렸다.

고인은 1926년 11월 평양에서 태어났다. 3세 때 부모님을 따라 서울로 내려와 대동상업고등학교, 일본동양음악전문학교를 수료했다. 1945년 가수 김정구의 친형인 김용환이 이끄는 태평양악극단에서 아코디언 악사 생활을 시작으로 연예계에 발을 디뎠다. 이후 그는 백조가극단, 육군 군예대, 해병대 군예대 등을 거치며 18년 동안 악극단 생활을 했다.

그는 1956년 '애정파도'로 영화계에 진출한다. 1958년 영화 '오부자'에서 막내 역을 맡아 인기를 끌어 '막둥이'란 별명을 갖기도 했다. 이후 '구봉서의 벼락부자'(1961) '돌아오지 않는 해병'(1963) '단벌신사'(1968) '구봉서의 구혼작전'(1970) '형님 먼저 아우 먼저'(1980) 등 30년 간 400여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고인은 1969년 TV 프로그램 '웃으면 복이 와요'를 통해 TV 코미디에 진출하면서 최고 코미디언 자리에 올랐다. 그는 1985년까지 장장 15년 8개월 동안 '웃으면 복이 와요'에서 활동하며 한국 코미디의 최전성기를 이끌었다.

그는 비실이 배삼룡, 후라이보이 곽규석, 살살이 서영춘, 합죽이 김희갑 등과 함께 우리나라가 가난하고 살기 힘든 시기에 국민에게 큰 웃음을 선사하며 큰 사랑을 받았다. 지금도 회자되는 '김수한무 거북이와 두루미…'는 고인이 만든 유행어다.

'일요일밤의 대행진' '주말코미디극장' '코미디세상만사'와 같은 코미디 프로그램에서 활약했고, TV 드라마와 라디오에도 출연했다.

고인은 한국 코미디계를 이끈 공로를 인정받아 1992년 옥관문화훈장을 받았고, 2000년 MBC 코미디언부문 명예의 전당에 올랐다. 또 2006년 제13회 대한민국 연예예술상 연예예술발전상, 2009년 제1회 대한민국 희극인의 날 자랑스러운 스승님상을 받았다.

<사진=뉴시스>은관 문화훈장을 수상한 코미디언 구봉서가 18일 오후 서울 송파구 방이동 올림픽공원 올림픽홀에서 열린 '2013 대한민국 대중문화예술상' 시상식에서 소감을 말하고 있다. 2013.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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