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권자의 ‘감성’에 호소하는 것이 과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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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선투표가 없는 소선거구 다수대표제 아래에서 이른바 유권자의 ‘전략적 선택’이라는 의미는 과연 무엇일까?

지난 4·13 총선 당시 모든 여론조사기관과 대다수 정치평론가들은 야권 분열로 인한 새누리당의 과반수 의석을 전망했다. 심지어 180석 예측까지도 서슴지 않았다. 그렇지만 새누리당은 탄핵 역풍이 거세게 불었던 2004년에는 761만표(지역구 808만표), 경제실정을 심판한 이번에는 796만표(지역구 920만표)를 얻었으니 그 사이 유권자수 증가(285만명)를 감안하면 득표수로는 사실상 패배라고 평가할 수 없다. 야권 분열에 따른 반사이익만 즐기며 거대한 민심의 흐름을 제대로 읽지 못했던 새누리당의 총선패배는 이미 예고되어 있었다.

헌정 사상 최초의 여소야대 국회를 탄생시킨 13대 총선결과는 유권자의 현명한 ‘전략적 선택’이 주효했을까? 4당 체제로 치러진 이 선거에서 가장 치열한 경합이 이루어진 곳은 서울지역으로 유력한 무소속 후보 등 평균 6 대 1의 경쟁률을 보였다. 총 42개 선거구 중 무려 32개 선거구에서 야권 후보가 당선됐는데 이것이 결정적이었다. 특히 득표율 3분의 1 미만의 당선자가 25명, 이중 21명이 5% 미만의 피 말리는 승부일 만큼 접전이었다.

따라서 13대 총선 유권자들은 자신이 지지하고 싶은 ‘민주성향’ 정당·후보자들을 지지했을 뿐이지만 우연히도 그 결과가 여소야대로 나타난 것이다. 13대 대선일 이후 겨우 132일 만에 치러진 총선이었기 때문에 대선 당시 민정당이 17개 자치구에서 단 1곳도 승리하지 못한 민심이 그대로 움직이지 않고 이어진 선거결과였다.

두 번째 여소야대와 김영삼 대통령에게 타격을 안긴 15대 총선의 접전지역은 대구·경북이다. 이때도 4자 구도였지만 이 지역은 전국 평균(5.5 대 1)보다 높은 7.3 대 1의 경쟁률이었다. 개표결과는 1년 전 창당한 자민련이 32석 중 10석이나 차지해 신한국당의 아성을 허물어뜨렸다. 마찬가지로 11개 선거구에서 득표율 3분의 1 미만의 당선자가 나왔고, 이중 7곳은 5% 미만의 접전이었다. 박준규 前국회의장, 박철언 前장관 등 문민정부의 ‘개혁과 세계화’ 추진에 밀려 퇴출된 민정계 인사들이 주축이 되어 反YS 정서에 호소한 점이 주효했다.

북한의 5차 핵실험이 실시된 지난 9일 이후에도 여권의 중진 인사들은 영악하게 ‘모병제’ 논쟁을 통해 대통령선거 이슈를 선점하고 있다. 연일 모병제 주장을 펼쳐온 남경필 경기지사가 10일 오전에도 곧바로 ‘작고 강한 군대, 첨단과학무기로 무장해야 한다.’고 SNS에 글을 올렸다. 그는 국회 외교통일위원장 출신이자 접경지역을 관할로 두고 있는 인물이다.

이에 맞서서 국회 국방위원장과 여당 원내대표를 역임한 유승민 의원은 7일 한 강연에서 “병사 월급을 200만원 주는 식으로 모병제를 시행하면 부잣집 자식은 군대 가는 경우가 거의 없고 없는 집 자식만 군대에 가라는 것”이라며 이를 ‘정의’의 문제로 호소하고 나섰다.

사실 이성적으로만 따져보면 남경필 지사의 주장에 옳은 대목이 많다. 지금 우리나라는 유례없는 저출산 현상으로 인구절벽과 1가구 1자녀 시대를 맞이해 있다. 그러므로 모병제 반대를 외치기 전에 이 상황을 어떻게 타개해나갈 것인지 그 대안부터 내놓아야 한다. 군 정예화는 첨단 장비로부터 비롯되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병력자원의 충성도이다. 지금까지처럼 값싼 청년인력을 공짜로 무제한 공급받던 생각일랑 이제는 버려야 한다. 강한 군대는 첨단과학 무기가 아니라 병사들의 강인한 정신력에서 나온다. 사병 개개인에 대한 동기 부여가 우선되지 않으면 정신전력은 결코 향상되지 않는다. 따라서 유승민 의원이 주장한대로 ‘정의롭지 못한 병역’은 강한 군대를 만들지 못한다.

1984년 도입돼 1992년 폐지된 석사장교 제도는 사실상 합법적인 병역면탈 수단이었다. 그 기원은 KAIST 대학원생을 대상으로 국내 연구기관에서 일정기간 근무를 조건으로 혜택을 주는 교수요원 제도였으나, 이것이 모든 대학교 석사 학위소지자들로 대상이 확대되었으며, 외국의 석사학위까지 인정하였다. 따라서 음악이나 미술을 전공하여 석사학위를 받은 경우에도 시험만 통과하면 석사장교로 임관될 수 있었다. 다만 아무래도 시험이 있다 보니 SKY(서울대·고려대·연세대) 중심의 명문대 출신 석사들이 대체로 혜택을 많이 받았다.

전두환의 장남인 전재국(1985년 예편)이 제도 시행 초창기 이를 활용해 군복무를 마쳤고, 노태우의 아들 노재헌(1991년 예편)이 거의 막차를 탔기 때문에 석사장교 제도는 끊임없이 의혹의 눈초리를 받았다.

지난해 국회 국방위원회 국정감사에서는 “4급 이상 고위공직자 병역면제 비율이 일반국민 평균보다 2배 가까이 높은 10% 정도다.”라는 자료가 제시됐다. 금년에도 국민의당 김중로 의원이 병무청 자료를 분석해보니 최근 5년간 4급 이상 고위공직자 본인과 직계비속의 군 면제비율이 각각 9.9%와 4.4%로 나타났다고 한다.

이에 반하여 금년 상반기 징병검사에서 일반국민의 병역면제 비율은 0.26%이므로 고위공직자 본인과 비교하면 38배 차이가 난다. 고위공직자의 직계비속과도 약 17배 정도에 이른다. 면제사유도 시력장애, 폐결핵, 대관절(십자인대·무릎) 등 질병(78.9%)이 대부분을 차지했다. 이는 합법을 가장한, 의심할 바 없는 병역 면탈행위이다.

사회지도층의 병역에 관한 모럴해저드는 어제 오늘의 얘기는 아니다. 2000대 후반부터 동원되고 있는 사구체 신염, 괄약근에 일시적으로 힘을 줘 본태성 고혈압으로 위장하기 등 다양한 ‘특이질병 가장’ 수법은 강남 부자들이 아니면 흉내 낼 수 없는 방식이다. 이처럼 공직불패는 높은 보수, 안정된 정년뿐만 아니라 병무행정 안에서까지 특권으로 자리 잡고 있다. 

명백한 불법은 아니지만 가장 악질적인 병역기피 수단으로 병무행정이 공정하지 못하다는 것을 입증하는 하나가 바로 국적을 포기하는 방식이다. 유학 뒤 영주권 방식인데 강남 부자들이 아니면 도저히 엄두를 낼 수 없다. 국회 국정감사를 앞두고 제출된 ‘병역기피 해외미귀국자 관련’ 자료에 따르면, 병역기피를 목적으로 해외에서 귀국하지 않고 있는 병역기피대상 의심자가 2013년에만 총 801명으로 5년 사이에 두 배 이상 증가했다. 특히 눈여겨볼 대목은 이들 병역기피의심 대상자 중 강남 3구(강남구·서초구·송파구)에 주소지를 둔 인원이 108명으로 5대 광역시(부산·대구·광주·대전·울산)를 합한 83명보다 훨씬 많았다는 점이다.

모병제 논쟁도 좋지만 상대적으로 더 많이 군대에 끌려가는 흙 수저 청년들을 우선 배려해야 한다. 현역병 복무기간 동안의 월급은 제대로 지급하지 못하지만 이제부터라도 제대사병에 대한 퇴직금 지급을 검토하는 방안을 고려할 수 있다. 지난 총선 당시 국민의당에서 그 공약을 낸 바 있다. 학업을 중단하고 입대한 대학생에게는 등록금을, 창업과 취업을 앞둔 젊은이에게는 종자돈을 마련해주는 것이다. 연간 2조 5천억원이라는 계산도 나와 있다. 내년 정부예산은 금년보다 3.7%가 증가해 사상 최초로 400조원을 돌파한다. 공무원 임금인상(기본소득월액 기준 3.5%, 개인 호봉승급분 포함 평균 5%) 금액만 기본소득월액 기준으로 약 2조 5천8백억원이다. 예산이 부족하다는 말은 핑계일 뿐이다.

실제로 2015년 현재 소득상위 10% 가구의 전문대 이상 고등교육비 지출은 171만원으로 하위 10%보다 5배가량 많았다. 취업준비를 위한 학원비 지출 등 흙 수저들은 돈이 없어서 대학진학도 제대로 못하지만 대학에 들어가서도 등록금을 마련하지 못해 도중에 군 입대를 선택한다는 경우도 적지 않다는 근거로 충분하다. 성인교육비 역시 소득상위 10%가 20만원으로 하위 10%보다 3배 정도 많았다. 흙 수저들은 취업준비를 위해 익히고 싶은 기술도 배우고 싶은 외국어도 제대로 배우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다. 상위 10%는 전문가(의사, 변호사 등), 공무원, 공공기관 임직원, 관리자, 대기업 정규직 등이 대부분이다. 이들 다수는 SKY 대학 출신으로 강남 3구에 거주한다. 이들은 자녀까지 강남불패·명문불패를 대물림하기 위해 갖은 사교육비로 월 145만원을 투자하지만 하위 10%는 그 8분의 1 정도밖에 지출하지 못한다.

가장 최근에 발생한 대형 병역비리는 2007년 가수 싸이의 산업기능요원부실근무 등을 밝혀낸 사건이다. 경찰에 따르면 2003∼08년 적발된 병역비리 혐의자 가운데 고위 공직자나 부유층으로 분류되는 사람이 전체의 60%를 차지했다고 한다. 가수 MC몽이 연루된 2009년 병역비리가 터지자 병무청은 장·차관급 인사의 11%, 여야 국회의원의 18%가 병역면제자라고 공개했다. 이들 대부분도 SKY 대학 출신으로 강남 3구에 거주한다. 공직자나 부유층의 병역면탈은 상대적 박탈감을 안기고 사회통합을 저해한다는 점에서 근본적인 대책이 필요하다.

한편 ‘정의론’을 화두로 꺼내든 유승민 의원은 아예 한 발 더 나아가 야권 대선주자인 박원순·이재명 성남시장의 청년수당정책까지 언급하고 나왔다. 유 의원은 “가난한 집 청년·학생들의 취업활동은 어떤 식으로든 지원해줬으면 하는 마음이지만 청년수당 지급은 서울과 성남과 같이 부자 도시나 할 수 있는 정책이다. 정부와 서울·성남시가 서로 싸우지 말고 서로 설득해서 청년 일자리 하나라도 더 만들라.”고 정의론을 이어갔다. 학부모의 소득 서열화 방지를 위하여 “과학고, 체육고 등 특별히 인정되는 경우를 제외하고 특수목적고와 자립형사립고는 폐지하는 것이 맞다.”며 공교육 정상화를 강조했다. 이는 최근 교육부 폐지를 주장해온 안철수 前대표와 일부 국민의당 의원의 ‘교육혁명’ 세부 실천방안이라고도 할 수 있다.

2014년 결산 기준으로 전국 17개의 시·도의 재정자립도는 겨우 50.2%에 그치고 있다. 전국 74개 기초 시(市)지역은 37.4%이다. 그렇지만 서울과 성남은 각각 82.6%와 54.2%로 평균 수준을 훨씬 웃돌고 있다. 박원순·이재명 시장이 청년수당정책을 밀어붙일 수 있는 근거는 바로 이 때문이다.

지방세는 11종의 보통세와 4종의 목적세로 운영돼 오다가 2010년 지방소비세가 신설됐다. 그러나 여전히 부동산 중심의 과세인 취득세·등록세·재산세·종합토지세가 핵심이다. 그렇기 때문에 강남과 분당을 끼고 있어서 부동산 가격이 상대적으로 높은 서울과 성남시가 매우 유리한 구조다. 보다 근본적으로는 지방분권과 지방재정권 확대가 필요하지만 청년수당문제에 대해 양비론으로 접근한 유승민 의원의 태도는 그래서 지방자치단체 간 불평등 문제를 ‘이슈’로 제기한 것이다.

지난 8월 27일 실시된 더불어민주당의 당대표 선출을 위한 전당대회는 너도나도 ‘공정한 경선관리’가 공약으로 등장했다. 사실상 20%대 지지율을 유지하는 ‘문재인’이라는 유력한 대권후보가 존재하기 때문에 후발주자 연합도 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김부겸 의원 등이 간접적으로 대선 출마 선언을 하면서 “문재인 대세론은 무난한 패배로 이어진다.”는 주장을 했지만 그 역시 여전히 여권주자들 만큼 논쟁거리가 될 만한 의제 생산은 하고 있지 않다.

당선되기 위해서는 결국 유권자의 환심을 사야 한다. 뇌를 연구하는 인지과학자 또는 심리학들은 유권자의 이성보다 감정에 호소하는 선거 전략을 짜야 한다고 충고한다. 미국 에모리대 심리학자 드루 웨스턴은 2004년 미국 대통령 선거를 관찰했다. 공화-민주 양당 핵심 당원의 뇌를 기능성자기공명영상(fMRI) 장치로 들여다보면서 1년 동안 연구를 이어갔다. 결과는 예상했던 대로 유권자의 정치성향이 무의식적인 확증편향에서 비롯되며, 확증편향은 정서의 지배를 받는다는 사실을 밝혀내고 2006년 미국 심리학회 총회에서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웨스턴은 2007년 6월 ‘이성보다 감정이 정치에 미치는 영향이 더 강력하다’는 주장이 담긴 저서 ‘정치적 뇌(The Political Brain)’를 출간했다. 그는 머리말에서 “정치적 뇌는 감정적이다. 결코 냉정하게 계산하거나 합리적 결정을 내리겠다며 정확한 사실이나 숫자, 정책을 객관적으로 찾아가는 기계가 아니다.”고 전제한 뒤 “유권자들이 합리적으로 어떤 결론에 이르리라는 선거 전략을 짜면 백전백패한다."고 주장했다. 이른바 전략적 투표에 대한 함정을 경계하라는 충고다.

경제위기에 처한 1992년 미국 대선에서 《문제는 경제야, 이 바보야!"(It's the economy, stupid!)》라는 구호를 내건 ‘빌 클린턴’이 승리한 배경은 바로 이 유권자의 정서를 파고든 전략이 주효한 것이었다. 박근혜 대통령에게 ‘선거의 여왕’이라는 별명을 안기게 한 결정적인 사건은 2006년 지방선거다. 당시 박근혜 대표는 면도칼 테러를 당한 이후 “대전은요?”라는 발언으로 지지층은 물론이고 스윙보터까지 감동시켰다.

2015년 전 가구의 평균소득은 2519만원이지만 상위가구 10% 소득은 1억 2208만원(흑자금액 4276만원)으로 하위가구 10%보다 10배 가까이 많다. 하위 10%는 1225만원(적자 322만원)이다. 최근 국회예산정책처가 공개한 2012년 기준 상위 10%의 소득 집중도 역시 44.9%라고 한다. 야당의 대선주자들은 공직불패 강남불패 명문불패 등 3대 불패와의 전쟁을 선포하라! 서민들의 분노를 조직하라.

최 광 웅

데이터정치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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