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적 어떠냐" "왜 이리 살쪘냐" "집 몇 평이냐"

"손이 귀한 집…임신 스트레스 받는다"
"부모님 용돈 드리고도 금액 눈치 보여"

직장인 박모(32·여)씨는 명절이 왔지만 아직도 큰집 방문을 망설이고 있다. 혼기가 찬 나이로 어른들이 한 마디씩 던지는 결혼 질문에 벌써 머리가 지끈거리기 때문이다.

박씨는 "최근 아버지 생신을 맞아 친·인척들이 한자리에 모였는데 결혼 질문만 수차례 받았다"며 "심지어 큰아버지는 '나이도 찼는데 결혼도 못 하고…. 이 쓰레기야'라고 하더라. 농담이겠지만, 기분이 언짢았다"고 털어놓았다.

3년 전 결혼한 신모(33·여)씨는 추석을 앞두고 며칠째 소화가 잘 안 돼 병원을 찾았다가 위염 진단을 받았다. 지난 설에 겪은 '임신 압박'이 자꾸 떠오르면서 끼니를 걸렀던 게 화근이었다.

신씨는 "결혼 전에 남편과 아이를 갖지 않기로 얘기를 끝낸 상황인데 지난 설에 시어머니가 '아이 소식은 없냐' '옆집 손자는 돌이라더라' '우리 집은 손이 귀하다'고 말씀하셔서 당황했다"며 "결국 시어머니께 '우리 부부는 아이를 안 갖기로 했다'고 말씀드렸더니 화를 내셨다"고 한숨을 쉬었다.

그는 "남편과 아이 없이 잘 살기로 했는데 시댁에서 '아이 못 낳으면 죄인'이라는 식으로 취급해 답답하다. 요즘이 조선 시대도 아니고 꼭 아이가 있어야 하는 건 아니지 않으냐"고 반문했다.

한가위가 찾아왔다. 오랜만에 가족이 한자리에 모여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누며 정을 느끼는 자리지만 취업, 결혼, 성적 등을 둘러싼 '잔소리 공포증'으로 바늘방석에 앉은 듯 불편한 사람이 적지 않다.

'더도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는 말이 무색할 만큼 오랜만에 만난 가족의 말 한마디에 과한 스트레스를 받으며 마음의 상처를 받는 것이다. 일부는 '언어폭력'을 경험하기도 한다.

취업포털 사람인이 직장인 1037명을 대상으로 '추석 때 듣기 싫은 말'에 대해 설문조사를 한 결과 '사귀는 사람은 있니 결혼은 언제 하려고'(27.5%)가 1위에 올랐다. 2위는 '월급은 얼마나 받니 먹고 살만해'(15.9%)가, 3위는 '돈은 얼마나 모았니'(12.1%)가 꼽혔다.

이밖에 '몸 관리도 좀 해야지'(8.8%), '회사 다니니까 살 많이 쪘구나'(6.4%),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 계획은 있니'(4.8%), '네가 몇 살이지'(4.3%), '그러다 애는 언제 가지려고'(4.1%), '아직도 그 회사 다니니 이직 안 해'(3.3%) 등의 말도 듣기 싫다고 응답했다.

'추석 때 듣기 싫은 말을 들어서 상처받은 적이 있다'는 답변도 51.9%에 달했다. 설문조사 참여자 중 45.5%는 가족·친지들의 듣기 싫은 말 때문에 명절 귀성이나 가족모임을 피한 적이 있다고 밝혔다.

12월 결혼을 앞둔 이모(37)씨는 "여자친구와 추석 때 큰집에 함께 방문하기로 했다"면서 "우리는 투룸에서 소박하게 신혼생활을 시작하기로 했는데 최근 큰어머니가 동갑내기 사촌이 내년 초 결혼을 앞두고 집을 마련했다고 어머니께 자랑했다더라"고 말했다.

이씨는 "여자친구와 동행하는 첫 명절인데 '집은 얼마짜리냐' '대출은 얼마나 받았느냐' '집은 몇 평이냐' 등 친척들의 질문세례가 벌써 걱정"이라고 전했다.

재수생 김모(20)씨는 "지난 설 때 만나는 친척마다 '수능 몇 점 받았느냐' '대학은 정했냐'고 묻는 바람에 스트레스를 받았다"면서 "심지어 '인서울(서울에 있는 대학) 대학이 아니면 다닐 필요도 없다'는 말에 상처를 많이 받았다"고 토로했다.

주부 최모(32·여)씨는 "지난 명절 때 부모님 용돈으로 30만원 드렸는데 시어머니께서 '작은어머니는 며느리한테 50만원 받았다더라'고 말씀하시더라"면서 "남편 혼자 벌어 세 식구가 생활하기도 빠듯한데 용돈을 드리고도 좋은 소리를 못 들으니 불쾌했다"고 말했다.

가족 간의 '언어폭력'을 피해 고향을 찾는 대신 회사 근무를 자처한 사람들도 있다. 일 핑계를 대고 휴일에 출근해 맘 편히 돈이나 벌겠다는 심산이다.

부산이 고향인 이모(34)씨는 "지난 추석과 설날에 할머니 댁을 찾았다가 작은아버지로부터 '왜 이렇게 살이 쪘냐, 그러니깐 결혼을 못 하지'라는 말을 들었다"며 "아직 결혼하고 싶은 마음이 없는데 결혼, 다이어트 등 지적을 받고 나니 마음이 불편했다. 올해 추석은 회사 핑계를 대고 서울에 남을 계획"이라고 밝혔다.

직장인 한모(31·여)씨는 "올해 추석은 친척들의 잔소리를 피해 남자친구와 해외여행을 가기로 했다"면서 "가족에게는 미안하지만, 집에는 회사에 출근한다고 거짓말을 했다"고 털어놨다.

그는 "고향에 가는 데만 5시간 이상이 걸리고 가봤자 결혼, 월급 등 듣기 싫은 말만 듣다 보니 명절이 하나도 즐겁지가 않다"고 솔직한 심정을 드러냈다.

전문가들은 가부장적인 부모들이 가족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이병훈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기성세대, 부모세대는 자녀세대에 대한 훈계하는 가부장적인 전통이 있다 보니 가족들을 배려하기보다 듣기 꺼리는 결혼, 취업 등의 문제를 직설적으로 표현하는 경향이 있다"며 "자주 만나면서 소통을 하면 언행을 조심할 텐데 가족들끼리 멀리 떨어져 살다 보니 이해가 적어 감정적으로 민감한 대화가 나오기도 한다"고 분석했다.

임명호 단국대 심리학과 교수는 "옛날과 달리 가족들이 모이는 기회가 적고 혼자 사는 집도 늘었는데 기성세대들은 아랫사람들 훈육하던 '갑을(甲乙) 시대'만 생각하고 잔소리를 할 가능성이 있다"면서 "예전에는 헌신과 수용이 미덕이었지만 지금은 친밀감과 동등한 관계가 우선적이다 보니 이러한 말에 스트레스를 받는 것"이라고 진단했다.

임 교수는 "이번 추석에는 가족 간에 심한 막말 대신 '10번 칭찬해주기' '나이, 결혼, 외모, 취직 얘기하지 않기' '좋은 뉴스 전하기' 등 적극적인 실천 방법을 세우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라고 조언했다.

<사진=뉴시스>다문화가정 주부들이 7일 추석을 앞두고 강원 강릉시 교동 강릉향교에서 강릉시다문가족지원센터 주최로 열린 2016 한가위문화 체험에서 한복을 곱게 차려 입고 절을 해보고 있다. 2016.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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