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는 ‘먹고사니즘’이다

트럼프 당선은 결코 이변이 아니다. 공희준 정치칼럼니스트의 말을 빌리자면 ‘먹고사니즘’이요 졸저 <바보선거>의 한 구절을 인용하자면 “유권자의 마음은 항상 살림살이”를 향하고 있다. 트럼프의 반란은 쌓이고 쌓인 기득권 정치와 양극화에 신물이 난 미국 유권자의 정당한 의사표현이다. ‘구 정치 對 새 정치, 월스트리트 對 反월스트리트, 부자 對 가난뱅이’로 설정한 트럼프의 선거구도가 민심을 정확하게 읽어낸 것이다.

월가를 점령하라(Occupy Wall Street)! 우리는 99%다(We are the 99%)! 2008년 발생한 리먼 브라더스 사태 이후 미국 정부는 천문학적 규모로 국민세금을 월가에 쏟아 부었다. 그렇지만 월가 금융회사들은 상여금만 200억 달러를 나눠 갖는 등 부도덕은 극에 달했다.

2011년 9월 17일 뉴욕의 한 공원에서 시작된 시위는 겨우 1000명 모이는데 그쳤지만 이후 전국 대도시와 80여개국으로까지 확산하면서 ‘1% 대 99%’라는 빈부격차 심화에 대한 분노가 全세계적인 현상임을 확인했다. 73일에 걸친 반(反)월가 시위는 “부자 증세!”를 통한 소득양극화 해결이라는 근본적인 과제를 남기며 마무리됐으나 그 후에도 현실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당시 중산층에서 탈락해 反월가대열에 참여한 수백만 명 백인들은 아직도 여전히 주린 배를 움켜지고 회심의 일격을 기다려왔다.

농산물이 풍부해서 붙여진 이름, 미국(米國)은 부자 중에서도 부자들의 나라다. OECD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 근로자들의 연간 실질임금은 오바마 집권 7년 동안 겨우 5.7%(3154달러) 늘어났지만 지난해 말 현재 무려 5만 8714달러에 이른다. 이는 세계 최고 부국(富國) 스위스를 제치고 2위(1위·룩셈부르크)로 올라선 대기록(?)이다. 지표상으로는 아주 잘 먹고 잘 사는 미국(美國)이다.

8년 집권 기간 동안 실질임금 성장률 8.3%(4265달러)에 머물렀던 전임자 부시 2세를 비웃기라도 하듯 오바마는 초선 도전 당시 연방 최저임금 시급을 2011년까지 9.5달러로 인상하겠노라고 호언장담한 바 있다. 하지만 취임 첫 해인 2009년 겨우 0.7달러를 인상한 이래 8년째 시간당 7.25달러(약 8232원)를 유지하고 있다. 바로 이점이 힐러리 패배의 첫 번째 이유다.

<사진=뉴시스>미국 대선에서 공화당 도널드 트럼프 후보가 45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사진은 지난 1999년 5월29일 여의도에 짓는 대우트럼프월드 모델하우스 개관을 축하하며 방한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후보. 당시 미 트럼프사 회장 자격으로 방한했다. 2016.11.09. (사진=대우건설 제공)

우리 한국은 자영업자 비율이 매우 높아서 급격한 최저임금 인상에 대한 반대 핑계거리라도 댈 수 있지만 미국의 경우 취업자의 겨우 3.4%(2014년) 수준에 그치고 있기 때문에 그 무슨 변명이 통할 수 없다. 다행히 2015년 1월 현재 공화당이 과반수인 주지사들이 주도해 30개 주(州)가 연방에서 정한 최저임금보다 높게 책정하고 있어서 그나마 중위임금(전체 근로자의 임금소득을 금액 순으로 나열했을 때 한 가운데) 대비 최저임금 비율은 약 40% 가까이에 이른다.

看見的不一定是眞. 눈에 보이는 데이터가 모든 진실을 반영하지는 않는다. 미국 고용통계청 자료를 자세히 살펴보면 일자리의 질이 갈수록 불량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쉽게 읽을 수 있다. 2005~15년 사이 10년 동안 고용이 증가한 건 사업·금융직(170만명), 판매직(157만명), 가정·간병직(85만명), 음식·관련직(81만명), 고객서비스직(54만명) 등 사업·금융 분야를 제외하면 대부분 파트타임 일자리였다. 이에 반해 고용이 감소한 건 사무·행정직(94만명), 생산직(85만명), 토목·건설직(89만명) 등 전통적 정규직들이었다.

2010년 본격적인 경기회복이 시작되면서 지난해 말 현재 미국의 일자리는 외환위기 직전보다 340만개가 늘었다. 하지만 증가한 일자리 중 240만개는 파트타임이었고 35시간 이상 상용직은 오히려 28만개가 감소했다. 이처럼 고용시장에 새롭게 진입한 경우는 바로 우리 한국에서는 ‘비정규직’이라고 부르는 파트타임, 임시직, 계약직, 성과급직 등이다. 지난해 미국 임금근로자의 4분의 1이 넘는 무려 3616만명이 35시간 미만 파트타임이었다. 따라서 나쁜 일자리 때문에 분노한 유권자들이 너도나도 민주당 정권 심판대열에 나선 이유이다.

미국 풀타임 근로자의 중위임금 주급은 2014년 791달러에서 지난해 809달러로 겨우 2.2%(18달러) 인상됐다. 성별·인종별로는 아시아계 남성이 6.5%가 올라서 최고(1129달러)를 기록했다. 겨우 2.6% 인상으로 920달러가 된 백인 남성의 자존심이 상할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그것이 바로 이번 11월 8일 ‘앵그리 화이트 맨(Angry White Man)’으로 나타났다.

파트타임이 득실대는 직종인 판매직(673달러), 가정·간병직(467달러), 음식·관련직(441달러) 등은 풀타임 중위임금 주급조차 형편이 없다. 이 정도 수준이면 한 달을 뼈 빠지게 일해도 1900~3000달러, 우리 돈으로 210만원~320만원가량이다. 12시간씩 장시간노동에 시달리는 제조업 근로자도 819 달러에 그친다. 우리 한국의 상용직(5인 이상)도 지난해 월평균 임금이 349만원이었다. 세계 브랜드가치 1위 기업이자 영업이익률 30% 자랑하는 애플社 직원의 평균연봉이 경쟁업체 삼성전자보다 적다면 독자 여러분은 믿겠는가?

민주당이라는 간판은 세계인에게 착시현상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지만 힐러리는 결코 진보가 아니었다. 한 번에 3억원씩 초고액 강연료를 챙기며 곰팡이(黴) 썩은 냄새 풀풀 넘쳐나는 탐욕을 대변했을 뿐이다. 힐러리의 정체는 미국(美國)이 아니고 미국(米國)도 아니었으며 결국은 미국(黴國)임이 드러났다.

우리 한국에 소개된 트럼프는 막말을 일삼으며 품행이 문란하다는 이유로 사이코패스처럼 취급됐다. 미국의 정신과 의사 허비 클렉클리는 1941년 사이코패스에 대한 체계적인 분석을 처음 시작했다. 사이코패스는 철저히 자기중심적이면서도 상대에게는 공격적이다. 반사회적 인격 장애에 시달리며 무책임한 행동을 일삼는다. 충동을 억제하지 못해 난잡한 성생활을 즐기고 보통사람보다 더 극렬하게 반응한다. 사이코패스는 남을 배려하려는 마음이 부족하고 정서적으로 결함이 많다. 트럼프 대통령이 그렇게 형편없다는 말인가?

1년 이상 예선과 본선을 치르는 미국의 대선 현장은 정치학과 심리학을 융합·연구하는 좋은 소재가 되어 왔다. 라이스대 정치학자 존 앨퍼드는 2005년 <미국 정치학평론> 5월호에 "정치성향은 유전에 의해 결정된다."는 논문을 기고했다. 그는 무려 20년 동안 3만명을 대상으로 연구를 진행한 바 있다. 2007년 8월 캘리포니아대 정치학자 제임스 파울러 역시 미국 정치학회에 참석해 "투표행위에 미치는 영향은 유전적 요인(60%)이 더 크다."고 발표했다.

우리나라에서도 30년 가까이 지겹도록 나타나고 있는 지역주의 투표행태는 이와 같은 근거를 차용해 설명할 수 있다. 지난 18대 대선 당시 박근혜 후보의 대구·경북 투표율(80.5%)과 문재인 후보의 호남 득표율(89.96%)은 결코 이성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그러니 선거 때면 항상 ‘묻지 마!’ 공화당을 투표해왔던 절반의 미국 유권자를 간과하고 "트럼프 당선가능성 10% 운운"한 정치 분석가들을 생각하면 헛웃음만 나온다. 트럼프가 구사한 '먹고사니즘' 전략은 보너스였다.

 

최 광 웅

데이터정치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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