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 "한진해운의 계속기업가치의 산정이 사실상 불가능" 판단

서울중앙지방법원 제6파산부는 19일 오전 9시 40분 한진해운에 대해 파산을 선고했다고 밝혔다.

이로써 1977년 5월 고 조중훈 한진그룹 창업주가 '수송보국'의 꿈을 안고 설립한 국내 최초의 컨테이너선사 한진해운은 40년만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됐다.

법원은 "한진해운이 주요 영업을 양도함에 다라 계속기업가치의 산정이 사실상 불가능하고 청산가치가 계속기업가치보다 높게 인정됨에 따라 지난 2월2일 회생절차 폐지 결정을 했고 2주의 항고기간 동안 적법한 항고가 제기되지 않아 오늘 파산선고를 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법원은 앞으로 파산절차를 주관할 파산관재인으로 김진한 변호사를 선임했다. 파산채권의 신고기간은 오는 5월 1일 까지며 제 1회 채권자집회와 채권조사는 오는 6월 1일 오후 2시 서울중앙지법 3별관 1호 법정에서 열린다.

법원은 "파산절차를 통하여 모든 채권자에게 공정하고 형평에 맞는 최대한의 채무변제가 이루어지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파산이 선고됨에 따라 한진해운은 한국거래소에서 자동 상장폐지됐다.

한진해운의 역사는 우리나라 해운업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사진=뉴시스)

한진해운의 역사는 우리나라 해운업의 역사다.

한진해운은 1977년 고 조중훈 한진그룹 창업주가 국내 최초 컨테이너 전용 선사로 설립했다. 조 창업주는 박정희 대통령의 권유로 해운업에 뛰어들었고, 수송보국(輸送報國)의 창업정신으로 육·해·공 종합물류 기업을 꿈꿨다.

1978년 중동 항로, 1979년 북미서안 항로를 개설하며 글로벌 해운사로 성장했다. 1988년엔 대한선주를 합병하면서 규모가 커졌다. 1949년 정부가 만든 대한해운공사가 대한선주의 전신이어서 한진해운은 국적 해운사라는 명예를 얻었다.

1992년 국적선사 최초로 매출 1조원을 돌파했고 1995년 거양해운, 1997년 독일 세나토라인 등을 인수하며 유럽·중국으로 영역을 넓혔다. 1996년에는 국내 최초로 5300TEU(1TEU는6m 길이 컨테이너 1개)급 컨테이너선을 취항했다. 2003년 중국 코스코(COSCO), 일본 K-라인, 대만 양밍, 대만 에버그린과 당시 세계 최대 규모였던 'CKYHE' 해운동맹을 결성, 글로벌 컨테이너선사로 자리매김했다.

2002년 조중훈 창업주가 타계한 뒤 그룹이 계열 분리하면서 한진해운은 3남 조수호 회장이 맡았다. 때마침 글로벌 해운 호황기를 맞아 한진해운은 컨테이너선, 벌크선 등 약 170척의 선박으로 전 세계 70여개 정기 항로를 운영하며 연간 1억톤 이상의 화물을 수송하는 국내 1위, 세계 7위 선사로 발전했다.

한진해운은 조수호 회장이 2006년 타계하면서 흔들리기 시작했다. 부인인 최은영 회장이 경영을 맡았으나, 해운업 불황이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맞아 장기화되면서 경영난이 오기 시작했다.

해운업 위기의 근본 원인은 경기 침체로 인한 물동량 급감과 운임 폭락이다. 여기에 IMF 체제 이후 우리 정부의 '200% 부채비율 룰'도 원인으로 지목된다. 부채비율을 200% 이하로 축소하라는 규정때문에 해운업체들이 갖고 있던 배를 대부분 팔고, 빌려쓰게 되면서 '용선료(배를 빌리는 비용) 장기 계약'이 문제가 됐다. 선사간 운임 출혈 경쟁으로 운임은 낮은데, 용선료와 선박금융이 계속 불어나니 이윤이 날 수 없는 구조가 됐다.

조양호 회장은 2년여전인 2014년 위기의 한진해운을 맡아 한진그룹 자회사로 편입했다. 조 회장은 한진해운 대표이사로 취임하면서 한진해운 정상화를 이룰때까지 무보수로 일하겠다고 선언했다.

한진해운은 2014년 240억원의 영업이익을 기록해 흑자 전환에 성공했다. 2015년엔 369억원의 영업이익을 내면서 회생의 빛도 비쳤다. 하지만 해운 업황이 뒷받침되지 못하면서 부채가 5조6000억원 이상으로 급증했다. 4월 25일 한진해운은 산업은행 등 채권단에 3개월 조건부 자율협약 신청을 하면서 4211억원에 이르는 자체 자구안을 제출했고, 조 회장도 경영권 포기 각서를 썼다.

한진그룹은 2014년 4월 조 회장이 경영권을 인수한 이후 에스오일 지분 매각, 대한항공 유상증자, 부산신항만·평택터미널 매각, 한진해운 상표권 매입 등을 통해 총 2조2429억원(대한항공, ㈜한진, 한진칼 등 그룹 전체)을 지원했다. 이후 채권단이 2017년말까지 한진해운 부족자금 1조2000억~1조3000억원 가운데 한진이 7000억원을 지원하라고 했을 때도, 5600억원 규모 자구안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해운산업 구조조정을 총괄해온 금융위와 KDB산업은행 등 채권단은 한진그룹의 추가 자구안 제출 이후 '1300억원의 간극'을 이유로 신규 자금지원 중단 결정을 내려 법정관리로 내몰았다.

한진해운은 작년 8월 31일 법정관리를 신청했고, 법원은 9월 1일 법정관리를 개시했다. 해운산업 특성상 법정관리는 곧 파산과 동의어였다. 전세계 항만 곳곳에서 한진해운 선박이 채권자에 의해 압류됐고, 얼라이언스(해운동맹) 퇴출 통보가 날라들어 정상 영업이 불가능해졌다. 사상 초유의 물류대란, 정상적으로 물건을 인도받지 못한 화주들의 불만은 대한민국 해운산업 전체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졌다.

해운산업 구조조정을 진두지휘한 임종룡 금융위원장은 지난해 11월 16일 국회 정무위 전체회의에 출석, 한진해운 법정관리행이 '현대상선 봐주기' 및 '최순실 게이트'와 관련있다는 의혹을 부인하면서 "한진해운은 우리가 제시한 구조조정 원칙을 하나도 충족시키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법정관리 전 기준 독일 HSH 노르드 방크, 코메르쯔 뱅크, 프랑스 크레딧 아그리콜 등 해외 금융기관은 해운 선박금융 채권 상환유예에 대해 동의했다. 또 최대 선주사인 시스팬이 산업은행의 동의를 조건으로 용선료 조정에 합의하면서 용선료 협상 역시 타결을 앞두고 있었다. 반면 현대상선은 2M과 정식 해운동맹 체결에 실패하고 향후 3년간 선복량 제한을 받는 '전략적 협력'에 그쳤지만, 지난해 12월 3000억 지원(산은) 및 올해 3월까지 7500억 지원(산은, 수은 등이 만든 한국선박해양) 등 당장 1조원이 넘는 지원을 받게 됐다.

해운업 전문가들은 한진해운 파산으로 한국 해운·물류 산업이 반세기 이상 후퇴하게 됐다고 보고 있다. 한진해운의 뿌리가 대한해운공사(1949년 설립)이고, 이곳에서부터 우리나라 해운·물류인들이 미주·유럽노선을 개척하며 수출 주도형 대한민국 경제의 '동맥'인 해운·물류산업을 키워냈기 때문이다.

한진해운이 17일 파산선고가 됨에 따라 40년만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됐다(사진=MBC뉴스캡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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