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링 정치를 가능하게 하는 주체는 결국 국민 개개인

「장미대선, 사회구조적 힐링의 장이 될 수 있을까?」
「음흉한 감시자들의 고통 정치에서 힐링 정치로」


언제부터인가 ‘치유’의 의미를 가진 단어 영단어 힐링healing이 우리 사회에 깊숙이 뿌리내렸다. 치유가 필요한 이유는 고통 받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고통은 크게 개인적인 고통과 사회적인 고통으로 나눌 수 있다. 개인적인 고통은 주로 욕구가 충족되지 않을 때, 심신에 상처를 입었을 때 찾아오고, 사회적인 고통은 사회구조적인 문제로 인해 찾아온다.

촛불시위 현장 ⓒclubsprint.com

그런데 갈수록 경제적 가치에 종속되고 있는 우리 사회에서는 개인적인 고통보다 사회적인 고통이 더 큰 문제로 부상하고 있다. 오늘은 장미대선의 본격적인 서막이 오른 이즈음, 우리 사회를 지배해 온 고통 정치를 끝낼 수 있을지, 있다면 그 주체는 누구인지를 모색해 본다.


오래된 감시자의 사회

공리주의 철학의 창시자 제레미 벤담은 최소한의 감시로 최대한의 통제 효과를 거둘 수 있는 파놉티콘panopticon이라는 원형 감옥을 설계했다. 그는 원형 감옥 중앙에 어두운 감시 타워를 설치하고, 타워를 중심으로 환하게 밝은 죄수들의 방을 배치했다.

이 감옥에서, 감시자는 죄수들을 볼 수 있지만, 죄수들은 감시자를 볼 수 없다. 따라서 죄수들은 감히 규율을 어길 엄두를 낼 수 없다. 이런 상황이 이어질 때, 죄수들은 감시자가 있건 없건 감시자의 권력을 스스로에게 강제해 자기통제 메커니즘을 발동한다. 다시 말해서, 감시자가 싫어할 만한 행위를 하지 않도록 스스로를 통제하고, 더 나아가 감시자가 좋아할 만한 행위를 해서 감시자를 기쁘게 하는 것이다.

벤담의 파놉티콘panopticon ⓒsites.google.com

우리는 벤담의 원형 감옥과 유사한 일이 과거 우리 사회를 휩쓴 적이 있음을 안다. 멀게는 일제 강점기에 감시자를 기쁘게 하기 위해 노력했던 이들을 들 수 있다. 가깝게는 “막걸리 집에서 친구와 술 마시던 도중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죽도록 맞고 길거리에 내버려졌다”던 이들도 있고, “정치권 실세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전전긍긍했다”던 경제인들도 있다.

심지어 과거에 비해 대단히 많은 정보가 일반에 공개되는 지금도 압제와 자기통제의 추억은 이어지고 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삼성 이재용 부회장과 독대할 때 “jtbc 보도부문 손석희 사장을 제외시키라”고 했다는 중앙일보 홍석현 회장의 증언만 봐도 그렇다.


새로운 감시자의 사회

일제 강점기와 박정희, 전두환 등의 군인 강점기 동안, 우리 사회가 노골적인 비민주적 감시를 받았다면, 1987년 이후 우리 사회는 민주로 포장된 감시 하에 놓여 있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이라는 민주국가의 중앙 어두운 곳에 숨은 채 국민들을 비민주적 시선으로 감시하고 있는 이들은 누구일까? 두말 할 것 없이 이 나라의 경제적 전권을 향유해왔고 앞으로도 향유하기를 원하는 이들이다.

다행히 지난해 가을에 시작된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인해 그중 극히 일부 세력들이 노출되긴 했지만, 이승만 정권 이후 축적되어 온 거대한 감시의 뿌리는 지금도 여전히 강력한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그 뿌리는 정치 부문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마치 일제 강점기에 완장을 두르고 마을 구석구석을 누볐던 친일 부역자들처럼, 경제와 민간 사회 부문 구석구석에 포진해 있으며, 그 구성원에는 국가기관까지도 포함되어 있다.


고통 정치에서 힐링 정치로

2017년 대한민국은 수많은 사회구조적 고통으로 앓고 있다. 국내적으로 보수와 진보로 양분된 국론이 통합될 기미가 없고, 청년들이 가장 원하는 것은 취업이 아니라 정규직이 되어버렸으며, 중산층은 이미 무너져 내린 지 오래다. 살아내기 버거운 이들을 위해 강화되어야 하는 복지 또한 정치적 술수의 도구로 전락했다.

대외적으로는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 문제로 외교적 자충수에 시달리고 있으며, 각종 비관세장벽과 강대국 위주 글로벌 거버넌스의 희생양이 되고 말았다. 이 외에도 우리 국민들은 이루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사회구조적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

고통 받는 사회는 치유가 필요하며, 제대로 된 치유의 출발점은 고통의 원인에 대한 직시이다. 원인 규명이 없는 근시안적 치유는 그야말로 진통제 역할밖에 할 수 없고, 진통제로는 상황이 더 악화될 뿐이기 때문이다.

ⓒ돌직구뉴스 자료실(livemint.com)

5월 9일, 새로운 대통령이 탄생한다. 그가 보수적이건 진보적이건 아니면 중도건, 그의 정치적 성향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가 해묵은 감시로 고통 받아 온 우리 사회를 바로잡을 수 있는 치유자healer여야 하고, 그러려면 이 사회 구석구석에 포진해 있는 음습한 감시의 시선을 걷어낼 수 있을 만큼 고통의 원인을 바로 볼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힐링은 전체의 치유를 의미하지만, 전체가 치유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각 세포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점에서, 사회구조적 힐링에 가장 큰 역할을 해야 할 주체는 다른 누구도 아닌 국민 개개인일 것이다.

개인적으로 선호하는 후보보다는 사회구조적인 고통의 원인을 직시하고 보다 합리적인 대책을 내놓는 후보를 찾기 위해 노력할 때다. 결국 이 사회를 힐링하는 책임은 개개인에게 있기 때문이다. 썩은 감시자들을 일부 걸러낸 지금, 더 많은 ‘음흉한’ 감시자들을 이 사회로부터 배제시키기 위해 이번 대통령 선거가 어느 때보다 중요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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