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모형의 강력한 유산인 재벌체제는 창조적 혁신을 억압하는 결정적 원인

박정희 패러다임의 한 축이 친자본·반노동 정책으로 자본축적을 극대화하면서 정부주도의 계획과 자원배분을 기초로 급속한 산업화를 추진하는 전략이었다면, 또 다른 한 축은 선진기술의 모방, 습득, 응용을 통한 선진기술 따라잡기 전략이었다.

이는 모든 추격형 성장체제의 기본요소이지만, 박정희 모형의 특징은 추격형 성장을 ‘선택과 집중’ 원칙에 의해 추진했다는 점이다. 특정 대기업에게 특정 산업 분야를 책임지도록 하여 효율적이고 빠른 산업화를 달성한다는 전략이다. 이러한 산업정책은 대기업에 대한 특혜성 지원을 바탕을 추진되었고, 이는 재벌이 급성장한 배경이었다.

기술후진국이었던 한국은 ‘후발국의 이익’을 향유하면서 모방에 의한 기술발전을 빠르게 이루었다. 제조공정을 개선하는 노력으로 일부 산업의 생산기술은 상당한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러나 80년대 말 ‘3저호황’기에 이르면서 과잉인구 상황이 종료되고 실질임금이 큰 폭으로 오르기 시작했고, 비교적 손쉬운 모방과 응용만으로는 경쟁력을 유지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창조적 혁신을 중심으로 생산성 증가를 이루는 선도형 혹은 혁신형 성장체제로 전환이 요구되었다.

그러나 과거 추격형 성장체제를 뒷받침하기 위해 구축된 교육과 연구개발(R&D) 시스템, 그리고 ‘선택과 집중’ 전략과 재벌체제는 이러한 전환에 커다란 장애가 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한국은 R&D 투자비중이나 인구 당 연구원 수, 국제특허나 과학논문 수 등 여러 지표에서 세계 최상위 수준에 근접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는 상당 부분 숫자놀음이 빚어낸 ‘빛 좋은 개살구’일 따름이며 실제 혁신의 성과는 부진하기 이를 데 없다. 단 하나의 중요한 원천기술을 만들어내지 못했으며, 노동생산성이 아직도 서구 선진국의 절반에 불과하다.

추격형 성장체제 하에서 우리나라의 교육과 R&D 시스템은 선진국에서 체계화시켜 놓은 기존 지식과 기술을 습득하는데 주력하고 기껏해야 이를 조금 응용하는데 초점을 두었다. 교육에서 토론과 비판적인 사고, 창의적이고 모험적인 발상이 용납되지 않았으며, 기존 지식을 암기하는 주입식 교육과 이를 기초로 정답을 찾는 시험을 통한 서열화 교육에 매달렸다.

이러한 교육은 깊은 이해와 창의성의 발현을 억압하는 결과를 낳았으며, 우리나라의 과학기술 발전을 제약하는 근본원인이 되었다. R&D도 장기적이고 근본적인 연구는 거의 하지 않고, 당장에 수익을 낼 수 있는 선진기술의 적용과 응용 위주로 이루어져왔다.

인구에 회자된 <축적의 시간>이라는 책은 서울공대 교수들이 한국의 산업기술을 진단하고 미래를 위한 제언을 한 내용인데, 선진기술의 도입을 넘어서서 자체적으로 시행착오를 감수하면서 창의적 개념설계를 시도하고 이 과정에서 많은 경험을 축적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시행착오를 용납하지 않는 정답 찾기 교육을 받고, 당장 성과를 낼 수 있는 R&D에만 매달리는 일을 지속하는 한 이러한 전환은 이루기 어렵다.

혁신을 가로막는 박정희 모형의 유산은 이뿐이 아니다. ‘선택과 집중’ 전략은 남의 것을 모방하고 따라잡기 할 때는 유효하지만 새 것을 창조할 때는 부적절하다. 점진적 개선이나 실용적 연구가 아닌 진정으로 창조적인 혁신, 소위 ‘파괴적 혁신’들은 많은 경우 유망한 분야에 집중 투자해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의외의 곳에서 나온다. 창조는 백가쟁명과 백화제방을 요구한다. 대세와 타산에 이끌리지 않고 다양한 실험과 고집스런 천착을 해야 한다.

작년에 ‘알파고’에 놀란 정부가 인공지능 등 몇 가지 분야를 선택하여 집중 투자하겠다고 대응책을 내놓는 것을 보면서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바로 이런 발상 때문에 우리가 4차 산업혁명에 뒤지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정부가 집중 투자를 해도 노벨 과학상 수상자는 나오지 않으며, 단 하나의 파괴적 혁신이나 원천 기술도 나오지 않은 까닭이다.

박정희 모형의 가장 구체적이고 강력한 유산인 재벌체제는 창조적 혁신을 억압하는 결정적 원인이 되고 있다. 재벌이야말로 따라잡기 방식 R&D와 ‘선택과 집중’ 전략의 화신이다. 재벌은 고급 자원을 독점하고, 산업생태계를 지배함으로써 혁신적인 중소·벤처기업의 성장을 가로막는다.

재벌은 우리나라 R&D를 주도하지만 항상 근시안적이고 실용적인 연구에만 집착하고, 절대 장기적이고 근본적인 연구나 모험적인 연구에 투자하지 않는다. 자수성가한 부자가 드물고 상속부자가 부를 대부분 차지함으로써 기업가정신이 쇠퇴하는 문제도 결국 재벌의 경제력 집중과 경영권 세습에서 비롯된 것이다.

 

 KDI국제정책대학원 교수/지식협동조합 좋은나라 이사장 유종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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