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은 또 다른 이름을 갖고 있다. 바로 ‘삼성공화국’. 최근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터지면서 우리 사회 곳곳 치밀하게 스며든 삼성 권력의 무서움에 세간은 혀를 내둘렀다. 장충기 전 미래전략실 사장의 문자에 담긴 정·경·언 유착의 민낯은 사람들을 재차 분노하게 만들었다.

부정 혹은 긍정의 의미를 막론하고 삼성이라는 기업 하나가 한국 사회에 끼치는 영향력은 실로 막대하다. 독보적 재계 1위 삼성그룹 창립사는 한국의 산업화 과정에서 파생된 명암과 궤를 같이 하기 때문이다. 

"기업가 정신이란 금전욕을 뛰어넘는 창조적 본능과 사회적 책임감이 잘 화합돼 우러나오는 것이다"

세상에 회자되는 삼성그룹의 창업주 호암 이병철의 어록이다. 최순실게이트로 곤욕을 치루는 삼성그룹이 진실로 경청하고 명심해야 할 경구다.   

전국적으로 초겨울 비가 예보된 17일. 이날 오전 경기도 용인 호암미술관 선영에서는 이병철 삼성 창업주의 추모식이 치러졌다. 올해 기일은 30주기인 만큼 각별하지만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구속수감과 이건희 회장 입원, 경영진 공판 등 뒤숭숭한 상황에서 조촐하게 진행됐다. 

4차 산업혁명의 물결 등 안팎으로 위기의식이 높은 현재, 삼성은 최근 대대적인 인사 개편으로 변혁을 시도했다. 이날 선대 회장 추도식 참여는 각 계열사 신임 사장단의 첫 공식 일정이기도 했다. 이들은 사업보국(事業報國)과 안주 대신 변화를 선택했던 ‘호암정신’을 기리며 자신들의 경영관을 되돌아보는 모양새다. 

이병철 창업주는 1910년 2월 12일 경남 의령군에서 출생했다. 20살이 되던 해 일본으로 건너가 유학 생활을 시작했지만 당시 혼란했던 국내외 정세로 그는 중도 귀국한다. 이후 한동안 방황의 길을 걷던 그가 선택한 길은 사업가가 되는 것이었다. 

/ 삼성그룹 제공

1938년 이병철 창업주는 자본금 3만원으로 대구에서 삼성그룹의 모체인 삼성상회를 설립하고 본격적인 사업의 길로 뛰어든다. 1948년 해방 이후에는 서울로 진출해 삼성물산을 세우고, 본격적으로 수출입업을 시작한다. ‘국가에 부족한 물자를 찾아 공급한다’는 탁월한 사업 감각이 시대 상황과 맞아 떨어져 승승장구했지만 6·25 전쟁의 발발로 그는 빈손으로 피난 길에 오른다. 

뼈저린 실패를 맛본 그는 전쟁 후 절치부심한다. 사업보국 경영관은 이 시기에 형성되기 시작했다. 국가가 있어야 사업도 있다는 사실은 그의 사업 일생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기회를 엿보던 중 과거 대구에서 만든 양조장의 성업으로 뜻하지 않은 큰 돈을 쥐게 됐고, 부산에서 삼성물산을 다시 열게 된다. 재기의 기회를 얻은 그에게 이제 탄탄대로가 열려 있었다. 

전쟁 특수로 삼성물산이 수입을 올리게 될 때쯤 이병철 창업주는 제조업에 진출하자는 새로운 제안을 한다. 회사의 열렬한 반대를 무릅쓰고 설탕 생산 공장을 추진했고, 1953년 제일제당(현 CJ)이 탄생한다. 제일제당 설립에는 무역으로 번 돈을 제조업에 투자해 국민 생활에 도움이 되겠다는 그의 경영관이 녹아 있었다.

1956년 설립한 제일모직에도 비슷한 의미가 담겨있었다. 먹는 것을 해결했으니 이제 입는 것 차례라는 것이었다. 제일제당과 제일모직의 대성공으로 이병철 창업주는 최고의 기업가로 두각을 드러내게 된다. 

/ 삼성그룹 제공

소비재로 성공 가도를 달리고 있을 때 그는 또 다시 과감한 변화를 시도한다. 1968년 드디어 삼성그룹의 간판인 삼성전자가 등장한다. 시대적 흐름 상 전자산업이야말로 미래 먹거리라는 그의 판단이었다. 

또 다시 주위 반대를 무릅쓰고 밀어붙인 전자 산업에서도 그의 경영관이 잘 묻어난다. 그는 과거 창립사에서 “자본금 1억원 이상 회사라면 대소를 막론하고 사회와 국가를 위해 공헌해야 할 신성한 의무가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언급한 바 있다. 

그는 전자 사업을 시작으로 1974년 삼성중공업을 설립해 중화학 분야에도 발을 들인다. 현실에 안주하는 법을 몰랐던 그가 마지막으로 선택한 신의 한수는 반도체 시장 진출이었다. 

1980년대 미국과 일본 등 선진국들이 중심이 된 반도체 산업에 개도국 기업이 진출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도박이었다. 이번에도 어느 누구하나 찬성하지 않았고, 그는 이번에도 과감한 투자를 강행한다. 그가 내세운 이유는 하나였다. 반도체는 "국가적 사업임과 동시에 미래 산업의 총아"이기 때문에 해내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1984년 삼성은 결국 반도체 시장에 진출한다. 이때 이병철 창업주의 나이는 73세. 1987년 11월 19일 자택에서 폐암으로 세상을 떠나기 3년 전의 일이었다. 혁신과 도전을 멈출 줄 모르는 그의 기업가 정신이 현재 삼성에 던지는 메시지는 의미심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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