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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왕적 리더십은 반복되는가

“새누리당은 당·청간 수평적 긴장관계를 주도해 박근혜 정부의 성공을 견인해야 한다.” 놀라지 마시라. 유승민 원내대표의 사퇴를 압박하는 친박계 좌장 서청원 최고위원이 지난해 7월 전당대회 당시 한 발언이다. 박근혜 대통령의 국회법 거부권 행사로 정국이 요동치고 있지만 공천권을 핵심으로 한 야당의 혁신위원회는 3주째 가동 중이다. 얼마 전 공천실무를 담당하는 사무총장에 범주류 측 인물로 분류되는 최재성 의원을 밀어붙인 문재인 대표가 공천혁신의 가이드라인으로 SNS에 공개한 내용을 보면, 여야가 뒤바뀐 느낌마저 든다. 그는 “대표의 기득권 내려놓기”를 말하면서도 전략공천과 밀실 공천심사위원회의 존치를 언급하였고, 비례대표의 상향식 공천을 못 박지도 않았다. 이에 반해 지난 4월 9일 의원총회에서 당론으로 확정된 새누리당의 완전국민경선제(오픈프라이머리)는 전략공천을 몽땅 없애고 당협위원장의 기득권 차단을 위해 6개월 전 사퇴 규정까지 마련하는 등 제도만으로는 완전무결한 공천혁신안이다. 물론 이 제안을 주도한 사람은 다름 아닌 최근 두 번의 총선에서 연속 공천탈락의 쓴 맛을 본 김무성 당대표이다. 특히 그는 18대 총선 당시 친박계라고 분류되어 계파 공천에 된통 당한 인물이기도 하다.

2001년 김대중 대통령이 새천년민주당 총재직을 물러나면서 현직 대통령의 공직후보자 추천권은 제도적으로는 사라졌다. 2004년 17대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은 과반의석인 152석을 차지했다. 이 중 108석을 초선으로 채웠는데 무려 57.4%인 62명이 30~40대였다. 공천장은 정동영 당의장 명의로 발부됐지만, 공무원의 중립의무 위반 등 혐의로 총선 직전 16대 국회가 탄핵을 의결한 노무현 대통령으로 인해 금배지를 거머쥔 이른바 ‘탄돌이’들이 대거 여의도 입성에 성공한 것이다. 18대 총선은 ‘보이지 않는 손’인 이명박 대통령이 사실상 직접 공천에 관여했다. 그는 530만표 차이로 대승을 거둔 대선 3개월여 만에 치르는 총선에, 대통령 취임 초기라는 유리한 환경을 십분 활용하여 친이계 직계인 이방호 의원을 공천실무를 관장하는 사무총장에 앉혀 국회 지배와 여당 지배를 동시에 달성하고자 했다. 최근 문재인 야당 대표가 최재성 카드를 강행한 것을 연상케 하는 대목이다. 그러나 그 유명한 “국민도 속고 나도 속았다”는 친박계 공천학살이 속속 진행됨에 따라 ‘친박연대’라고 하는 유례가 없는 정당이 생겨나고 25석에 달하는 사상 최대의 무소속 당선자도 배출했다. 대선 압승의 여세와 뉴타운 광풍 속에서 전문가들은 한나라당의 3분의 2 가까운 승리까지도 점쳤지만 뚜껑을 열어보니 과반수에서 3석 초과에 불과했다. 게다가 여당 텃밭인 경남 사천에서 3선에 도전하던 이방호 사무총장이 민주노동당 강기갑 의원에게 일격을 당한 것은 바로 친박계의 반란 때문이었다.

제왕적 대통령제를 향수하는 유신공주. 3권 분립이 균형을 이루어야 하는 대통령제 국가에서 대통령의 권한이 상대적으로 막강해 박근혜 대통령을 마치 제왕에 비유함을 이르는 말이다. 극단적인 경우에는 대통령 독재로 나아갈 위험까지 있다. 정치개혁의 대명사였던 노무현 대통령도 결코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국회의 탄핵 의결 직후, 여의도 정치에 거리를 둔다며 취임 1년 남짓 만에 당-청, 당-국회 간 소통 역할을 담당하는 정무수석실을 아예 폐지해버렸다. 여당과 상의 없이 가장 색깔이 맞지 않는 한나라당에 대연정을 제안함으로써 지지자들의 본격적인 이탈을 불러온 것도 다름 아닌 노 대통령이다. 그러나 87년 체제로 탄생한 우리나라의 5년 단임제 대통령은 결코 임기 내내 제왕의 지위를 누리고 있지 못하는 것 또한 현실이다. 지난 다섯 명 대통령의 역사를 돌이켜 보면, 집권 초 1~2년 우호적 여론이라도 등에 업거나 여당의 지원사격을 받아 추진하는 국정이 힘을 받을 때만이 그나마 제왕다운 대통령으로 행세할 수 있었다. 그래서 임기 반환점을 지나는 대통령이 맞게 되는 자연스러운 레임덕 현상을 방지하기 위해 역대 대통령들은 당청관계에서는 공천권과 인사권(각료 임명권 등)을, 대 국회 관계에서는 예산집행권과 민원 해결능력 등을 매개로 끝없는 긴장 또는 협력관계를 유지해오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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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도에는 통용되는 공식이 있다. “아무리 계파 청산을 외쳐도 계파는 쉽사리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이 그것이다. 공천 때 도움 준 계파 보스나 중진 정치인들이 있는 한 그에게 등을 돌리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공식적으로는 공천권이 없는 대통령이 갖은 수단을 동원해 어떤 식으로든 공천에 개입하려는 이유는 자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긴 안목으로 퇴임 후 안전판까지 마련하고자 한 대통령들은 늘 실패했고 그렇지 않은 대통령들은 비교적 성공했다. 첫 민선 대통령인 노태우 대통령은 3당 합당을 통해 여소야대를 일거에 해소하며 국회 지배에 성공했다. 그러나 그는 그가 밀어서 당선된 후임 대통령인 김영삼에 의해 군사반란과 거액 수뢰 혐의로 구속되고 만다. 이회창 후보의 DJ 비자금 수사를 거부한 김영삼 대통령은 후계자인 자당의 이인제 후보를 탈당시켰고, 결과적으로 정치적 라이벌이었던 김대중을 당선시키는데 기여했다. 그는 IMF 환란위기를 불러온 대통령이었지만 정치보복은 받지 않았다. 김대중 대통령 역시 총재직을 물러나며 정당 사상 최초로 국민경선제를 만들어준 계기가 됐다. 국민경선제는 노풍을 발화시켰고 민주당의 재집권을 이어갔다. 대선 공정관리를 명분으로 역대 최단 기간인 퇴임 1년 전에 탈당을 결행한 이는 노무현 대통령이다. 그러나 그는 대통령직을 떠나자마자 정치보복을 당해야 했고 끝내 비운의 운명을 맞았다.

미국에서 시작된 대통령제는 입법부인 의회의 권능이 상대적으로 막강하다. 여당의원의 당론투표는 상상할 수도 없고 대통령의 역점 사업이라고 해도 지역구민의 의사에 반하면 기꺼이 부표를 던지는 일이 흔히 발생한다. 그래서 백악관 식사 자리에는 오바마가 공화당은 물론 민주당의 초선의원까지 초대하여 일일이 법안과 정책현안에 대하여 이해를 구하는 장면들이 심심찮게 소개된다. 미 합중국 대통령의 권위는 이처럼 위력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3억 인구를 대표하는 의원들과 늘 소통하려는 적극적인 자세가 기본 바탕이다. 미국을 정녕 혈맹이라고 생각한다면 바로 이런 좋은 정치관행부터 본받아야 하지 않을까? 국회법 거부권 파동을 바라보며 소망해본다.

 

최 광 웅

 참여정부 청와대 인사제도비서관
민주당 조직사무부총장
현 데이터정치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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