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호무역주의 기조에 따른 미국 정부와 기업의 '협업 플레이'

도널드 트럼프 정부의 보호무역주의 기조에 따라 한국 기업이 전 방위적인 통상 압박을 받고 있다. 미 정부는 태양광전지와 철강제품, 세탁기에 이어 최대 수출 품목 반도체까지 마수를 뻗고 있는 것이다. 경쟁 관계에 있는 미국 기업이 소송 제기로 불씨를 당기면 미국 국제무역위원회(ITC)가 뒤따르는 공식이 이번에도 적용됐다. 최근 경쟁에서 뒤쳐진 현지 기업이 미 정부를 등에 업고 한국 업체의 발목을 잡는 행태가 빈번해지고 있다. 

4일 반도체 업계에 따르면 ITC는 지난달 28일 SK하이닉스에 대해 컴퓨터 주회로판 메모리 슬롯에 설치된 D램 집적회로를 포함한 회로판 등 메모리 모듈과 관련된 부품에 대한 조사에 착수했다. 이번 조사는 지난 10월 미국 반도체업체 넷리스트가 SK하이닉스의 메모리 모듈 제품이 자사 특허를 침해했다며 소송을 제기한데 따른 것이다. 

이번 조사 대상에는 SK하이닉스 경기 이천 본사와 SK하이닉스 미주법인, 메모리솔루션 등이 포함됐다. ITC는 조사 기구를 설치해 45일 이내에 판정 기일을 결정할 계획이다. 

앞서 넷리스트는 지난해 8월에도 서버용 메모리제품을 대상으로 조사를 요청했지만 ITC는 지난달 특허를 침해하지 않았다는 예비 결정을 내렸고, 내년 3월 최종 결정을 앞두고 있다. SK하이닉스에 대한 현지 업체의 소송은 이번이 두 번째인 셈이다. 

이번 제소는 미 관세법 337조에 따른 것이다. 해당 법은 미국 내 상품 판매, 수입 관련 불공정 무역에 대한 무역구제제도로, 미 기업이나 개인의 지적재산권을 침해한 외국 제품에 대해 수입 금지를 명령하는 조항이다. 

ITC는 SK하이닉스뿐만 아니라 삼성전자에도 현미경을 들이대고 있다. 지난달 5일 ITC는 삼성전자를 대상으로 반도체 특허 침해 여부에 대한 조사에 착수했다. 삼성전자의 ‘웨이퍼 레벨 패키징(WLP)’ 기술이 적용된 반도체 기기 및 부품, 해당 반도체가 들어간 제품에 대해 들여다보겠다는 입장을 밝힌 바 있다. 

이는 미 반도체 패키징 시스템 업체인 테세라 테크놀로지가 제기한 것으로, 삼성이 자사의 WLP 특허를 침해했다며 ITC를 비롯해 연방지방법원 등에 조치해줄 것을 요청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말을 아끼며 일단 조사 과정을 지켜본다는 입장이다. 

국내 업계는 최근 미국 기업들이 ‘자국 우선주의’ 기조를 내세운 정부를 등에 업고 한국 기업들을 견제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반도체를 포함해 현지 업체가 문제를 제기하고 나선 품목은 대부분 한국 기업이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무역협회에 따르면 올해 반도체 수출은 전년대비 55.1% 증가한 965억 달러로 추정된다. 

미국 정부와 기업의 이같은 ‘제재 협업 플레이’는 트럼프 대통령의 돌출 발언과 비슷한 효과를 낸다. 업체 입장에서는 현지 정부가 조사에 착수했다는 소식만으로도 압박감을 느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트럼프 정부는 특정 업체를 압박함으로써 해당 기업이 소속된 상대 국가에도 시그널을 보내는 것으로 풀이된다. 

반도체 다음 타겟은 어느 분야가 될지 산업계는 바짝 긴장하는 분위기다. 지난달 ITC는 삼성전자와 LG전자의 세탁기에 대해 긴급수입제한조치(세이프가드) 발동 권고안을 마련했다. 이에 앞서 한국산 태양광모듈에 대해서도 관세를 부과해야 한다는 권고안을 확정한 상태다. 

국내 산업계 한 관계자는 "최근 미국의 한국산 제품 수입 제한 조치와 관련해 이제는 특정 업종만을 겨냥하는 것이 아닌 품목 구별 없이 경쟁 우위에 있다면 일단 두드려보는 것 같다"면서 "현 미국 행정부의 보호무역 기조가 향후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지 산업계 전체가 주시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무역협회 관계자는 “트럼프 행정부 출범 이후 지속되고 있는 미국발 수입규제가 한층 강화될 가능성에 대비해야 한다”면서 “반덤핑·상계관세 관련, 기업의 청원 없이 미국 상무부가 자체적으로 조사를 개시하거나 조사과정에서 상당한 재량권을 행사하는 형태로 수입규제가 강화될 가능성에도 유의해야 할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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