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산업계가 미국 정부의 '자국 우선주의'와 '보호무역주의' 강화 움직임에 심각한 우려를 보이고 있다. 당장은 세탁기와 태양광이지만 철강, 반도체 등 다른 업종으로 번질 가능성이 대두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이 22일(현지시간) 삼성ㆍLG 등 외국산 세탁기와 태양광 패널에 대한 세이프가드(긴급수입제한조치) 발동을 결정한 가운데 23일 서울의 한 대형마트에서 소비자가 세탁기를 살펴보고 있다.
미국이 22일(현지시간) 삼성ㆍLG 등 외국산 세탁기와 태양광 패널에 대한 세이프가드(긴급수입제한조치) 발동을 결정한 가운데 23일 서울의 한 대형마트에서 소비자가 세탁기를 살펴보고 있다.

이번 사안은 미국 정부가 자국 기업인 월풀에 유리한 판정을 내린 것인데, 세탁기의 경우 현지 경제와 일자리를 위해 삼성과 LG가 미국 현지에 공장을 짓고 있는 상황인데도 세이프가드가 발동된 것이다.

미국이 글로벌 최대 프리미엄 시장이란 점에서 기업 입장에서는 울며 겨자 먹기로 버틸 수밖에 없으며, 트럼프 대통령의 이번 결정으로 다른 업종도 비슷한 상황에 처할 것으로 전망된다.

트럼프 대통령, 수입세탁기·태양광 제품에 세이프가드 발동
노골화된 미국 보호무역주의…세계 곳곳서도 우려 제기

로버트 라이트하이저 미 무역대표부(USTR) 대표는 23일 홈페이지를 통해 발표한 성명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수입 세탁기와 태양광에 대해 세이프가드를 발동하는 결정을 승인했다"고 발표했다.

세이프가드는 특정 품목 수입 급증으로 자국내 제조업체가 피해를 입는 상황을 막기 위한 것이다. 덤핑 등 불법 행위를 하지 않아도 자국내 업체가 심각한 피해를 보면 관세인상이나 수입량 제한 등을 통해 수입을 제한할 수 있는 무역장벽 조치 중 하나다.
 
이번 세이프가드 발동은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지난 2002년 한국산 등 수입 철강에 3~30% 관세를 부과한 지 16년 만이다. 

세이프가드 수위는 국제무역위원회(ITC)가 지난 11월 내놓은 권고안과 비슷한 수준이지만 미국과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한 한국에서 생산된 세탁기도 포함됐다. 

USTR이 이날 발표한 자료에서는 FTA 체결국에서의 생산품이 제재 대상에서 제외되는지 여부를 언급하지 않았다. 이에 FTA 체결국이라도 이번 제제 대상에 포함되는 것으로 봐야 한다.

미국 정부는 수입산 가정용 세탁기에 대해서는 저율관세할당(TRQ) 기준을 120만대로 설정하고, 첫 해에는 120만대 이하 물량에 대해선 20%, 이를 초과하는 물량에는 50%의 관세를 부과한다.

한국 기업을 비롯해 미국으로 세탁기를 수출하는 모든 국가에 적용이 되는데 수출 물량의 대다수는 삼성과 LG가 차지하고 있다. 이에 120만대까지는 선착순으로 관세 폭탄을 피할 수 있게 된다.

이와 함께 중국, 한국 등에서 수입한 태양광 셀과 모듈에 대해서는 2.5기가와트를 기준으로 1년 차에는 30%, 2년 차엔 25%, 3년차에 20%, 4년차에 15% 관세가 부과된다고 발표됐다.    

태양광 업계에서는 지금까지 한·미 FTA로 관세 없이 수출하던 제품에 관세가 붙으면 가격 경쟁력 저하로 최악의 경우 미국 수출량이 10~30% 감소할 수 있다는 전망을 하고 있다. 

반도체 제조 기업을 상대로 한 미국 기업들의 문제 제기도 만만치 않다. 주로 미국 국제무역위원회를 상대로 특허 침해 조사를 요청하거나 직접 소송을 제기하는 방식으로 이뤄지는 반도체 관련 분쟁 또한 미국 측의 보호무역 기조와 무관하지 않다는 게 업계 측 분석이다.

비트마이크로(BiTMICRO)는 지난달 미국 국제무역위원회(USITC)에 삼성전자·SK하이닉스·델·레노버 등이 제조한 SSD와 적층전자부품 등 반도체 유관 제품이 관세법 337조를 위반했다는 취지로 조사를 요청했다.

김현종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본부장이 23일 서울 종로구 한국무역보험공사 본사에서 열린 美 세탁기-태양광 세이프가드 관련 민관 대책회의에서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김현종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본부장이 23일 서울 종로구 한국무역보험공사 본사에서 열린 美 세탁기-태양광 세이프가드 관련 민관 대책회의에서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관세법 337조는 미국 내 상품 판매, 수입 관련 불공정 무역에 대한 무역구제제도 관련 조항이다. 조사 결과 문제가 있다고 판단되면 미국 기업 및 개인의 지적재산권을 침해한 제품의 수입, 판매 금지 조치가 취해질 수 있다.

웹익스체인지(WebXchange) 등은 삼성전자·애플·페이스북 등과 관련한 IoT 장치와 구성요소, 웹 애플리케이션 등이 특허를 침해했다고 주장, USITC는 최근 이에 대한 조사에 나서기로 했다.

테세라 모기업인 엑스페리도 삼성전자가 라이센스가 만료된 이후에도 무단으로 특허 기술을 이용했다면서 반도체 제품과 갤럭시S8·갤노트8 스마트폰 등에 의해 자사 특허가 침해당했다는 주장을 했다. 

미국 반도체업체 넷리스트도 ITC에 SK하이닉스의 메모리 모듈 제품이 자사 특허를 침해했다며 조사를 요청했다. 하지만 USITC의 행정법 판사는 SK하이닉스가 넷리스트 측 특허를 침해하지 않았다는 취지의 예비결정을 내렸던 바 있다.

자동차와 철강업계도 상황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우리나라 자동차와 철강업계를 대표적인 무역 불균형 사례로 지목하면서 한·미 FTA 재협상, 반덤핑·상계관세 부과 등을 밀어붙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와 FTA 개정 협상 중인 미국은 현재 자국으로 수입되는 자동차 부품에 대한 관세율을 올리는 한편 우리나라 업체가 미국 자동차 부품사가 생산한 제품 사용 확대를 요구 중이다. 

미국에 수출을 하고 있는 국내 완성차의 50% 이상이 미국 밖에서 생산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국산 자동차에 대한 수입 관세율이 상향 조정될 경우 국내 완성차 업계는 직접적인 타격을 입을 공산이 크다. 
   
아울러 우리나라에서 미국에 수출하는 철강 제품은 한미 FTA와는 상관없이 WTO 협정국간 체결돼 있는 무관세 원칙을 적용하고 있는 중이지만 미국은 무역확장법 232조를 적용해 우리나라에서 수입하는 철강 제품에 대해 고율의 관세를 부과한다는 계획이다. 

미국 정부는 지난해 우리나라에서 생산된 철강 제품에 대해 반덤핑 관세를 잇따라 부과한 바 있다. 한국산 유정용강관에 최대 46%, 포스코 냉연·열연 강판에 대해서는 60%대의 반덤핑·상계관세를 부과했다. 

미국이 규제를 하고 있거나 규제를 실시하기 위해 조사를 진행하고 있는 31개 품목(세이프가드 2개 포함) 중 18개가 철강 제품일 정도로 강도높은 압박이 이뤄지고 있다. 

이같은 압박에 대해 세계무역기구(WTO)가 최근 한국산 철강 제품에 대한 미국의 반덤핑 관세는 협정 위반이라는 판결을 최종 확정했지만 트럼프 정부가 한국산 철강에 대한 규제를 중단하지 않을 것이라는 예상이 다수다. 

재계 관계자는 "단순히 현지에 공장을 짓기에는 막대한 자금과 시간이 들기 때문에 향후 견제를 받는 기업 입장에서는 고민이 커질 것"이라며 "경영 환경이 급변하는 가운데 악화일로로 치닫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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