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 공공성을 넘어 시민 이익 보호를 위한 방송으로

시장경제 사회를 살아가는 오늘의 인간이 갖추어야 할 중요한 능력을 꼽으라면 무엇보다 돈을 잘 관리하는 능력을 빼놓을 수 없다. 최근 우리나라는 이것이 부실한 사람들이 늘고 있다. 가계부채 증가 속도가 가파르게 증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지난 1분기 가계부채 총액은 무려 1099조3000억 원으로 집계됐고, 가계부채 증가율은 7.3%로 가계소득 증가율(2.6%)의 약 3배에 달한다. 돈을 버는 속도보다 빚이 쌓이는 속도가 더 빠른 셈이다. 실제 일반인이 체감하는 부채의 수준도 매우 심각한 상태임을 감안하면 그 어느 때보다 ‘돈의 능력’이 필요한 시점이다.

그리스 채무불이행(디폴트)의 불확정성이나 메르스로 인한 경기 침체를 회복하기 위한 국가의 경제적 해법이 절실하지만 개인채무자 구제도 외면할 수 없다. 이런 해법 찾기에서 보이는 정치권의 무능이야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국가의 아젠다 규정 능력이 있는 미디어마저 무능한 모습이어서 상당히 참담하다. 요즘 대한민국 미디어의 관심은 온통 먹는 능력 키우기에 몰려있는 것 같다. SBS ‘쿡킹 코리아’에서부터 MBC ‘찾아라 맛있는 TV’, KBS ‘한국인의 밥상’, JTBC ‘냉장고를 부탁해’, tvN ‘수요미식회’, ‘삼시세끼’ 등 수십개에 달하고 ‘슈퍼맨이 돌아왔다’, ‘아빠 어디가’에서는 앞다퉈 출연자들의 먹는 장면을 집중적으로 내보낸다. 먹는 것을 소재로 한 ‘식샤를 합시다’ 같은 드라마도 있다. 이른바 먹방, 쿡방 등 먹는 능력은 키우는데, 현실의 경제적 관리의 능력을 키우는 콘텐츠가 없다.

 

일반시민의 개인재산 공개, 성생활 공개보다 금기시

돈과 관련된 테마는 대부분 TV매거진의 한 코너에 편성된 소비자 상담 유형의 프로그램들이다. 물론 여기에는 그럴만한 사정이 있다. 먹는 행위가 장려되는 것과 달리, 개인수입과 지출에 대한 솔직한 대화는 예컨대 성생활에 대한 것보다 더 금기시되기 때문이다. 오늘날 개인들은 서로 잘 아는 사람들 사이에도 재산에 대해서 선뜻 묻지도 않고, 제대로 답하지도 않는다. 은행잔고를 들여다보는 일에 공포심을 갖거나, 세무서 직인이 찍힌 우편물에 지레 겁을 먹고 며칠이 지나서야 겨우 개봉하는 사람들도 있다. 더구나 각종 세금 정산시기인 연말이 다가오면 난감한 표정들이다. 세금정산 작업은 정말 마라톤에 비유될 정도이다. 사정이 이러니 돈 관리 능력을 키워주는 본격 리얼리티 프로그램 하나 쯤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독일에는 있다. 리얼리티 TV 프로그램 ‘빚더미에서 벗어납시다’(Raus aus den Schulden)가 그것인데, 케이블전문채널이 아닌 대형민영방송 RTL에서 벌써 9년째 방영하고 있다.

 

‘빚더미에서 벗어납시다’, 높은 인기

‘빚더미에서 벗어납시다’는 20%가 넘는 높은 시청률을 보이는, 방송사로서도 참 착한 프로그램이다.

이 프로그램은 독일인들에게도 금기시되는 재산공개의 영역을 과감하게 건드린다. 채무불능 상태의 가족을 찾아가 해결책을 찾아주는 이 프로그램의 성공 요인은 무엇보다 빚에 허덕이는 시민들이 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채무해결사로 등장하는 페터 츠베가트(Peter Zwegat)는 높은 시청률의 해결사이기도 하다. ‘빚더미에서 벗어납시다’에는 자신의 채무내역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시민들이 등장한다. 츠베가트는 가정방문과 상담 뒤 거래은행과 회계사를 직접 면담하여 가계 현황을 파악하고 함께 해결책을 모색한다. 이 해결사의 결론은 언제나 한결같다. 각종 청구서와 독촉장, 은행잔고에 지레 겁먹지 말고 의연하게 대처하라는 말씀이다.

사실 이런 단순한 컨설팅에는 시청자의 관심을 자극할만한 획기적인 내용이 없다. 오히려 오랫동안 베를린에서 자산컨설턴트로 근무하고 사회교육을 부전공한 올해 58세 츠베가트의 건실한 이력과 진지한 모습이야말로 높은 시청률의 요인이다. 주름진 얼굴과 오랜 흡연 경력이 있는 듯한 다소 낮은 목소리, 팔장을 낀 채 상대방의 고민을 듣고 나누려는 모습은 평생 무언가에 성실히 몰두해 온 사람의 풍모를 느끼게 한다.

시민들은, 오늘날 점증하는 세계경제 위기에도 불구하고 투자정보를 남발하고 있는 TV 경제프로그램보다는 츠베가트의 따뜻한 권위와 충고에 더 큰 위안을 느끼고 있는 것 같다. 금융자유화가 세계경제 기생성의 주범이라는 경제학계의 지적이 구체적인 현실로 확인되면서 그동안 연예인을 방불케 하는 입담을 과시하던 증권담당기자들은 자신감을 완전 상실한 표정이다.

 

돈 관리 능력 키워주는 방송, 시민 이익을 위한 방송의 공공성

물론 츠베가트의 이런 채무해결 방식에는 한계가 있다. 그의 단순한 처방전의 내용은 결국 “스스로 빚을 갚아야 한다”는 냉정한 현실로 귀결된다. 돈을 벌기 위해-빚을 갚기 위해-다시 차가운 현실에 던져지는 것이다. 마르크스의 이론에 따르면 화폐는 사회적 관계의-인간관계의-산물이다. 그렇다면 돈을 다루는 법은 곧 인간을 다루는 법일지 모른다. 무엇보다 미디어가 이런 문제를 다루어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먹는 능력도 좋지만, ‘빚더미에서 벗어납시다’처럼 돈의 능력을 키워주는 방송이 없어 아쉽다. 국민 1인당 5천만원 부채를 안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주의의 속박된 삶이 아니라 자본주의를 경영하는 시민 사회의 능력 향상을 위해서 방송의 공적 역할에 대한 제고가 필요한 시점이다. 

 

서명준(동국대 강사, 미디어로드 연구실장, 베를린자유대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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