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보는 시각은 참 많다.  세상을 알고 나를 아는 길에 정답은 없다.

"단지 알고 싶었을 뿐" 준비 중인 신간은 누구나 한 번쯤은 가져봤음 직한 단순한 질문에서 출발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어떤 곳인가?”
 
사람에 따라 여러 가지 대답이 나올 것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좋은 세상이고, 어떤 사람에게는 그럭저럭 살 만한 곳, 또 어떤 사람의 눈에는 부조리로 가득 찬 약육강식의 정글일 수 있다. 증오와 살육이 일상이 된 분쟁 지역으로 가면 지옥이 따로 없다는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 “당신들은 안 그럴 거라고 장담하지 마. 서는 데가 바뀌면 풍경도 달라지는 거야.” 만화 『송곳』의 등장인물인 구고신의 말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하나의 세상을 제각각 다르게 본다. 그러므로 대부분의 세계관은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 주관은 ‘나’라는 우물에서 내다본 바깥 풍경이다. 따라서 이미 형성된 철학적 태도, 정파적 입장, 지역적 특수성, 경험이 주입한 선입견, 개인적 혹은 집단적 확증편향 따위로부터 자유롭기 어렵다. 보고 싶은 대로 보고, 믿고 싶은 대로 믿는 것이 확증편향이다. 주관의 편향성을 보정하는 방법은 끝없이 ‘앎’을 확장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새로운 앎이 낡은 앎을 하나씩 수정하며 바꿔 나갈 때 우리는 세상을 더 멀리, 더 깊은 곳까지, 더 선명하게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정녕 궁금했다. 이 세상은 대체 어떤 곳인가? 내가 사는 세상은 어떤 구조로 짜여 있고 어떤 힘에 의해 움직이는가? 왜 이런 세상이 만들어졌는가? 나는 이 기묘한 세계의 과거와 현재를 이해하고 싶었고, 앞으로 세상이 어떻게 달라질 것인지 혹은 어떻게 달라져야 하는지 알고 싶었다. 이 책은 그 질문의 답을 찾아가는 여행기(travelogue)이다.
 
1997년의 외환위기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는 내게 큰 충격을 주었다. 그 충격은 삶의 물질적 측면과 정신적 측면 모두에 직접적으로 작용하였다. 생활은 곤궁해졌고, 모르는 게 너무 많다는 자각은 나를 몹시 불편하게 만들었다. 1997년에 아버지는 내가 가족을 부양하지 못할까 봐 걱정했다. 2008년 겨울, 오랜만에 고향을 찾은 나는 아버지로부터 ‘모기지’가 뭐냐는 질문을 받았다. 금융상품이라곤 보통예금 통장밖에 가져본 적이 없는 85세의 노인에게, 미국에서 벌어진 사상초유의 사태에 대하여 설명하기란 쉽지 않았다. 아마 지금이라면 알아듣게 얘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는 거동이 불편해진 이후로 세상에 대한 흥미를 잃었고, 2017년 94세를 일기로 영면하였다.

 나는 시골에서 농사를 짓고 있다. 농부가 되기 전에는 대안학교 교사였고, 사회 교과를 전담하였다. 말이 전담이지, 사회 교과 외에도 한문, 논리, 철학, 바둑, 생활기술, 농사 등 잡다한 과목을 두루 맡았다. 매년 기숙사 사감과 학년담임도 겸하였다. 사회탐구 영역만 해도 중고등 과정을 혼자서 맡다 보니 법과 정치, 경제, 윤리와 사상, 한국사, 세계사, 사회문화 등 이른바 인문학의 범주에 들어가는 거의 모든 분야를 섭렵하였다. 바람직하진 않지만 시야를 넓히는 데 도움이 되었다.
 
내가 생각하는 사회 교과는 '나와 세상의 관계'를 이해하는 과목이다. 그러니까 사회 시간은 '세상물정'을 알아가는 시간이라 할 수 있다. 세상 돌아가는 사정을 알려면 세상보는 눈이 트여야 한다. 통찰력까진 아니더라도, 눈에 보이는 혹은 보이지 않는 사회현상의 본질과 모멘텀을 읽을 줄 알아야 한다. 그래서 몇몇 아이들과 함께 경제 공부를 시작했다. 세상사의 많은 부분이 물적 토대 혹은 경제적 기초 위에서 결정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검인정 교과서로 공부했다. 그러나 교과서만으로는 세상의 참모습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음을 깨달았다. 1997년 외환위기 때 왜 시민들이 금 모으기 운동을 벌였는지 물으면 뭐라고 대답하지? 동일노동의 임금격차를 어떻게 설명할까? 양적완화와 마이너스 금리라는 개념은? 내가 정말로 알고 싶은 것, 내 마음속에 깊이 박혀있는 근본적 질문에 대하여 교과서는 제대로 답하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교과서 밖의 현실, 사실 뒤의 진실, 우리를 둘러싼 세상의 리얼리티를 탐구하기 시작했다.
 
내가 교과서를 버린 것은 아니다. 교과서에 있는 내용을 달달 외워서 전달하는 수업 방식은, 간밤에 충분히 잔 아이들을 더 자게 만든다. 왜 많은 아이들이 교과서만 펼치면 엎드려 잘까? 물론 재미가 없기 때문이다. 교사인 내가 봐도 재미없는데 아이들을 나무랄 수는 없는 일이다. 시험 범위 이상도 이하도 아닌 종이 뭉치를 누가 좋아하겠는가? 아마 교과서를 만화로 만들어도 따분하기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렇다면 생각을 바꿔보자. 교과서에 아이들의 이야기를 담으면 어떨까? 그들이 살고 있는 세상이 책의 내용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안다면 좀 달라지지 않을까?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전쟁이 왜 나쁜가? 전쟁은 노인들이 기획하고 젊은이들이 피를 흘리는 게임이다. 왜 전쟁을 기획하는가? 전쟁을 벌임으로써 얻는 정치적·경제적 이익이 있기 때문이다. 그 이익은 대부분 노인들이 가져간다. 국가의 지도자들은 젊은이들을 전쟁터로 내몰기 위해 애국심을 부르짖는다. 그들의 가족 중에는 본인을 포함하여 병역면제자가 많다. 전쟁비용을 조달하기 위해 국가가 낸 빚은 전쟁에서 살아남은 젊은이들이 일을 해서 세금으로 갚는다.
 
이런 수업을 들으며 사내아이들은 장차 군대 갈 생각에 머리가 복잡해지고, 여자아이들은 병역의무가 남자들만의 문제가 아님을 깨닫게 된다. 국채의 개념도 자연스럽게 머리에 들어온다. 그들이 어른이 되었을 때 쓸 돈을 지금의 어른들이 당겨쓰는 일에 아이들은 찬성할까? 정부가 10년 또는 20년 만기의 국고채를 발행하면서 청년과 청소년들의 의견을 물어본 적이 있는가?
 
이 책에 새로운 이론이나 주장은 없다. 기존의 학설과 쟁점들을 한 번씩 의심하며 되짚어보았을 뿐이다. 놀라운 사실을 깨달았을 때조차도 알고 보면 상식의 재확인인 경우가 많다. 사회과학이든 자연과학이든, 모든 공부는 ‘마침내 상식에 도달하는 과정’이다.
 
나는 주식을 사거나 팔아본 적이 없다. 펀드에 가입하지 않았고 선물과 옵션 시장을 기웃거리지 않았다. 한때 서울에 있는 아파트를 소유한 적은 있으나 짧은 기간이었다. ‘재테크’는 나의 관심사가 아니었고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경제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순전히 ‘알고 싶은 욕구’를 누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외우려고 뇌를 혹사하는 것은 나쁜 공부 방법이다. 호기심을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먼저 하늘에서 숲을 내려다보고, 전체의 대강을 살핀 연후에 숲으로 들어가 이 나무와 저 나무를 분별한다. 디테일에 붙들릴 필요는 없다. 이 책의 목적은 세세한 투자기법을 익히는 것이 아니라, 경제라는 창을 통해 세계를 이해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코스모스』의 저자 칼 세이건(Carl E. Sagan, 1934-1996)은 불가지론자였다. 불가지론(agnosticism)이란, 신은 인간의 인식능력 밖에 있는 초경험적 존재이므로 긍정도 부정도 할 수 없다는 철학적 입장이다. 유물론자는 “신은 없다.”라고 말하고, 불가지론자는 “알 수 없다.”라고 말한다. 1994년 세이건은 백혈병의 일종인 골수형성이상 증후군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혈액에서 백혈구, 적혈구, 혈소판이 감소하는 난치병이다. 죽음이 임박하자 그의 가족, 친지, 목사가 잇달아 찾아와 신을 믿으라고 설득하였다. 그들에게 세이건은 말했다. “나는 단지 알고 싶을 뿐입니다.” 나 역시 그렇다. 나는 단지 내가 속한 복잡계(complex systems)를 이해하고 싶을 뿐이다.
 
나와 함께 지식의 바다를 항해할 독자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조언이 있다. 노벨상 수상자가 쓴 책이든 고전의 반열에 오른 책이든 내용을 기계적으로 수용하지 말라는 것이다. 저자의 권위에 주눅들 필요도 없다. 내가 납득하지 못하는 한, 아무리 위대한 사람의 주장일지라도 내 삶에는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 능동적으로 이해하고 공감할 때 비로소 저자와 독자 사이에 생산적인 관계가 형성된다. 비판적 독서가 필요한 이유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스트레이트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