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나는 길을 잃었지만 위대한 페미니즘 고전을 읽으면서 발견과 재발견의 길을 열었다.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샬럿 퍼킨스 길먼 같은 1세대 페미니스트들의 진가를 재발견하거나, 우상이었던 보부아르와 충돌하거나, 케이티 로이프 같은 포스트페미니스트와 화해하게 되리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단단히 막혀 있던 문화적 경계를 홀로 뚫고, 신념을 가로막는 장애물을 극복한 이 여성들은 내게 깊은 감명과 기쁨을 주었다. 물론 때로 분노와 혼란에 빠지거나 지루함을 느낀 적도 있었다."

페미니즘(feminism)의 사전적 정의는 '여성 억압의 원인과 상태를 기술하고 여성 해방을 궁극적 목표로 삼는 운동 또는 그 이론'이다. 하지만 오늘날의 수많은 여성들은 페미니즘의 의미와 역할에 대해 의구심을 품고 있다.

지난 수세기 동안 페미니즘은 여성들의 인권을 신장하고 사회 진출을 도모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해 왔다. 그럼에도 대다수의 여성들은 페미니즘의 존재 이유에 대해 자문하고, 의심하고 있다. 왜일까.

이유는 간단하다. 아직까지도 ‘여성 해방’이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양성평등이 자리를 잡아 가고 있다지만 현실적으로 가정과 직장, 일상생활 전반에서 더 큰 부담을 짊어지는 쪽은 언제나 여성이다.

가령 직장 생활을 하는 여성으로서 셰릴 샌드버그(페이스북 최고운영책임자)처럼 막대한 연봉을 받는 사람은 극히 일부에 불과하며, 대부분의 여성들은 유리 천장(glass ceiling)을 경험한다. 결혼 생활과 육아에 있어서도 배우자와 동등한 지위를 누리는 여성은 찾아보기 힘들다. 따라서 여성들은 페미니즘에 맞서 이렇게 울부짖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빨래하는 페미니즘>의 저자 스테퍼니 스탈의 상황도 다른 여성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미국의 명문 여대를 졸업하고,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언론학 석사를 받은 스탈은 그야말로 ‘잘나가는 여성’이었다. 유력 언론사의 기자로서, 그리고 유명 작가로서 남부러울 것 없는 사회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스탈은 예상치 못한 임신과 출산을 겪으면서, 그동안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곤경에 빠지게 된다. 지금껏 그녀는 페미니즘이 가르쳐 준 대로, 혹은 페미니즘에 개의치 않고 살아왔다. 즉, ‘여성’으로서 별다른 불편이나 제약 없이 생활해 온 것이다.

현실은 냉혹했다. 스탈은 점차 자신이 꿈꾸던 삶으로부터 멀어졌고, 여성이라는 존재의 지위를 새삼 자각하기에 이른다. “어째서 여성만이 육아와 가사에 더 얽매여야 하는가? 왜 여성이라는 사실 자체에 부담을 느껴야 하는가?” 이처럼 스테퍼니 스탈은 지구상의 모든 여성들이 공감할 수 있고, 진실로 궁금해하는 물음에서부터 이 책을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스탈은 여성들의 삶을 보다 나은 방향으로 바꾸기 위해, 그녀는 ‘페미니즘 고전’을 펼쳐 읽기로 결심한다. 과거 수천 년의 역사에서 여성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고, 그들의 삶을 개선시켜 준 것은 오직 ‘페미니즘’뿐이었다. 이제 또다시 페미니즘이라는 새로운 가능성의 중심을 파고들 때다. 

「빨래하는 페미니즘」 스테퍼니 스탈 지음·고빛샘 옮김(민음사·2014)
「빨래하는 페미니즘」 스테퍼니 스탈 지음·고빛샘 옮김(민음사·2014)

지루할 정도로 단조로운 날들이 이어졌다. 내 인생은 해도 해도 끝나지 않는 반복적 가사 노동에 저당 잡혀 버렸다. 언제부터인가 그 너머의 미래를 그릴 수 없게 된 것이다. 나라는 인간의 윤곽이 하루하루 눈에 띄게 사라지는 듯했다. 직업적으로는 탄탄대로가 보장되던 기자직을 버린 탓에 더는 마땅히 설 자리가 없었다.

스탈은 페미니즘 고전을 ‘다시 읽기’ 위해 직접 모교로 달려갔고, 그렇게 한 해를 꼬박 투자해 수확한 결실을 이 책에 담아냈다. 책은 육아와 사회생활을 병행하는 보통 여성의 치열한 수기인 동시에, 페미니즘의 지형을 이해하는 데 있어 매우 유용한 강의록이기도 하다. 실제로 저자는 별도의 부록을 마련해 ‘추천 도서 목록’과 ‘토론 주제’까지 제공한다. 

책은 신화와 종교에 나타난 여성 이미지를 추적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 초기 페미니즘(메리 울스턴크래프트, 존 스튜어트 밀 등)을 다시 읽고, 버지니아 울프와 시몬 드 보부아르, 베티 프리단 등 걸출한 페미니스트들의 사상을 하나하나 검토한다.

아울러 케이트 밀렛, 슐라미스 파이어스톤, 에리카 종 등 급진적인 페미니스트의 이론과 작품을 세부적으로 확인하고, 지그문트 프로이트와 라캉의 영향을 받은 프랑스 페미니즘도 이해하기 쉬운 언어로 해설해 준다.

마지막으로 캐럴 길리건과 케이티 로이프 등 비교적 동시대에 속한 페미니스트들의 주장을 훑고, 다학제적인 데다 난해한 내용으로 이루어진 주디스 버틀러와 가야트리 스피박의 이론도 명료하게 요약해 들려준다.

이처럼 스탈은 철학과 문학, 정치학과 사회학 등 모든 학문 영역을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역사상 가장 중요한 ‘페미니즘 고전’을 꼼꼼하게 챙긴다. 여기에 생생한 경험(한 아버지의 딸, 한 아이의 어머니, 한 남성의 아내, 그리고 커리어우먼으로서의 경험)은 페미니즘을 이해하는 데 있어, 매우 강력한 설득력과 공감대를 불러일으킨다. 

스탈은 책을 완성해 가면서 자신의 꿈과 현실, 아버지와 남편, 그리고 딸과 화해하는 과정이었다고 한다. 이 과정은 단지 스탈의 삶만을 변화시킨 것이 아니었다. 

페미니즘은 비단 여성만을 위한 학문이 아니다. 오히려 다른 어떤 학문보다 더 높은 수준의 윤리 의식과 공감 능력, 깊은 사유를 요구한다는 점에서 페미니즘은 인류의 행복을 위해 꼭 필요한 지식이다. 

애초에 페미니즘은 타자에 대한 이해, 소수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법, 상식에 내재한 억압을 들추어내는 일 등 이러한 변화를 촉구하는 움직임에서부터 생겨났다.

때문에 ‘페미니즘 고전 독서’는 성별과 국적, 세대를 초월해 모두에게 꼭 필요한 경험이며 우리들의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한 것이라고 스탈은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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