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6 그날 이후, 몇 개월 동안 저는 단 한 줄의 글도 쓸 수 없었습니다. 어쩌다 펼친 노트의 누런 여백 위에다 무슨 말을 끄적여야 할지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모든 단어의 의미가 하얗게 증발해 버렸습니다.

그날 이후로 짧은 글을 읽는 일조차 점점 힘들어졌고, 나중에는 보는 것 자체가 고통이 되었습니다. 심지어는 친구인 조병준 시인이 남긴 안부 글에도 답글을 쓸 수 없었습니다.

텃밭에는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고, 아끼는 만년필은 잉크가 말라붙은 채 여름 내내 필통에 꽂혀 있었습니다. 세상의 반을 잃어버린 어머니들이, 아버지들이, 그 파릇한 아이들을 가슴에 묻던 그때, 차마 가슴에도 묻지 못하고 몸부림치던 그때, 저는 절뚝이며 지리산 둘레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무정한 봄을 보내고 일상으로 돌아왔지만, 돌아온 그곳은 더 이상 예전의 그곳이 아니었습니다. 하늘은 예전의 그 하늘이 아니었고, 교실은 예전의 그 교실이 아니었습니다. 논어는 예전의 그 논어가 아니었고, 싯다르타 예전의 그 싯다르타가 아니었습니다.

먹먹한 가슴 안에 가물거리던 삶의 욕망도 툭 꺼졌습니다. 아니, 죽었다고 하는 게 더 적절한 표현인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마이동풍은 당시 죽었습니다. 죽었습니다. 내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앞날에 희망은 있는 것인지, 그래도 세상은 살 만한 곳인지, 도대체 왜 그 많은 아이들이 채 피지도 못하고 그렇게 참혹하게 죽어야 했는지 도무지 알 길이 없는데,초롱초롱한 눈빛, 생글거리는 아이들에게 '너희는 이렇게 살아라, 저렇게 살아라' 말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나에게 달려오는 천진난만한 아이들을 예전처럼 활짝 웃으며 안아줄 수가 없었습니다.

나는 분노해야 되는가? 숨 쉬고, 술 마시고, 분노하는 것 말고는 달리 할 수 있는 일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 분노는 핵폭탄을 두 개쯤 터뜨려도 풀리지 않을 분노여서 당시 아이들을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이 독한 응어리를 가슴에 품고 살아도 되는지, 혹은 살아갈 수나 있을는지, 그날 이후 잘 몰랐습니다.

그 캄캄한 배 안에서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요? 여자 친구를 위해 노래를 만든 다운이, 패션 디자이너를 꿈꾸었던 예슬이, 살았더라면 세계적인 영화음악 감독이 되었을지도 모를 시연이, 스물다섯 가지 버킷 리스트를 남긴 수현이, 구명조끼를 친구에게 벗어주고 다른 친구를 구하러 들어갔다가 다시 돌아오지 못한 차웅이, 마지막 순간까지 아이들을 구하다 죽어간 비정규직 승무원 박지영 씨, 그리고 아빠의 가슴에 살아남아 끝끝내 진실의 끈을 부여잡으려는 우리 유민이. 어둠이 내리면 혼자 옥상에 올라 아이들의 이름을 나직이 불러보곤 합니다.

유민아,
예슬아,
다운아,
시연아,
수현아,

자꾸 부르다보니 꼭 제 딸이나 아들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이 아이들에게 해줄 말은 없습니다.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요? 유민이, 예슬이, 다운이, 시연이, 수현이, 차웅이가 보지 못한 2014년 여름을 염치없이 살아남아 절망과 무기력의 늪에서 허우적거린 이 촌부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요? 

미안하다? 잊지 않으마? 어찌 잊을 수 있겠습니까? 세상이 다 잊는다 해도 저는 못 잊을 것 같습니다. 잊지 못합니다. 진상은 반드시 밝혀집니다. 진실이 드러나기를 두려워하는 세력이 철옹성 같아 보이지만, 이미 알 사람은 다 알고 있습니다.

2014년 길고 우울한 여름을 보내면서 저는 잠시 세상을 버릴 생각도 했었습니다. 하지만 어떤 위로도 닿지 않을 우리 아이들의 이름을 되뇌면서 생각을 고쳐먹었습니다. 살자, 싸우자, 글을 쓰자, 숨이 붙어있는 한 이 아이들을 기억하자. 삶은 다만 기억될 뿐이지만, 나는 좋은 아빠였다, 괜찮은 교사였다는 기억으로 남기 위해 반성하고 또 노력하겠습니다.

기억되지 않은들 또 어떻습니까? 이름 없는 들풀처럼 살다 간다 하여도, 천 갈래의 바람이 된 아이들의 손짓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는 들풀이면 더 바랄 게 없겠습니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스트레이트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