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생들이 배우는 영어 교재에 나올 만큼 기본적인 단어지만 'good'이라는 단어는 생각보다 복잡한 의미를 띤다. 그저 ‘좋다’는 의미만이 아니라 그 안에 ‘착하다’ ‘선하다’ 정도에 해당하는 가치 판단이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니체가 “신은 죽었다”고 선언한 이래로 근대와 현대에서 절대주의는 쇠퇴하고 상대주의가 득세하게 됐다. 그러면서 ‘착한 것’의 의미도 점점 모호해지고 말았다. 현대인들은 절대적인 기준과 신의 기준에서 선하고 착한 것을 따질 겨를이 없다. 

그저 나한테 이로운 것이면 그게 착하고 선한 게 돼버렸다. 연예인들의 멋진 몸매를 보고 ‘착한 몸매’라 표현하는 것에는 생각보다 다층적인 의미가 새겨져 있는 것이다.

이제 사람들은 상대주의의 뒤에 숨어서 자신의 취향과 신념을 절대화시킨다. 페미니즘(feminism)을 추종하는 일부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다. 이들은 자기 취향에 맞는 걸 ‘옳다’고 생각한다. 반대로 말하면 자기 취향에 벗어난 것은 ‘틀렸다’고 단죄한다. 문제는 그런 이들이 생각보다 많이 모여 조직화 되면서 결코 무시할 수 없는 하나의 ‘세력’이 돼 가고 있다는 점이다.

tvN '나의 아저씨' 스틸컷
tvN '나의 아저씨' 스틸컷

‘단점이 있는 것’과 ‘틀린’ 것의 차이

지난 3월 21일부터 tvN에서 방영 중인 드라마 ‘나의 아저씨’를 완벽한 작품이라 말하기는 힘들지 모른다. 이 드라마는 첫 회부터 상당히 자극적인 장면들로 시청자들에게 시각적인 충격을 줬다. 예를 들어 극중 한 남자 인물은 여자 주인공(이지은)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끼고 있으면서도 그녀를 무자비하게 폭행한다. 

문제는 폭행을 당한 뒤 이지은이 그 남자에게 던진 “너 나 좋아하지?”라는 말이다. 이 대사는 ‘폭력을 애정의 한 종류로 미화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나의 아저씨’ 공식 홈페이지 인물 소개란을 보면 이 남자에 대해 ‘지안(이지은)을 더 괴롭힌다. 지안이 자신을 보게 만드는 방법은 그것밖에 없으니까’라고 적혀 있다. 이 부분 역시 남자의 폭력을 사랑으로 미화하는 것 아니냐는 비판을 받았다.

제작진 측은 ‘폭력을 미화하거나 해당 남자 캐릭터를 긍정적으로 묘사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항변하고 있다. 그러나 일련의 설정과 폭력적인 장면이 시청자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실제로 그 장면에서는 제작진이 일부러 불편함을 유발하려는 의도마저 느껴진다. 그런 의미에서 비판 받을 여지가 충분한, 결코 완벽한 드라마는 아닐지 모른다.

문제는 이 ‘완벽하지 않음’을 곧바로 ‘틀림’으로 인식하는 일부 시청자들의 태도다. 이들은 드라마 ‘나의 아저씨’를 비판하는 수준에서 그치지 않고 (단점에도 불구하고) 이 드라마를 재미있게 보고 있는 시청자들을 싸잡아 비난하고 있다. 그것도 집단적으로. 개그맨 겸 작가인 유병재의 경우를 보자.

기득권에 대한 통렬한 비판과 독특한 발상, 자유로운 표현으로 인기를 얻고 있는 떠오르는 신예 유병재는 자신의 팬 카페에 ‘나의 아저씨’ 감상평을 올렸다. “이 작품 작가님 감독님 배우님들은 하늘에서 드라마 만들라고 내려 주신 분들인가 봐요. (…) 이런 대본을 이런 대사를 쓸 수만 있다면 정말 너무너무 좋겠네요. 수요일 목요일이 기다려져요.”

그는 이 드라마의 폭력적인 장면이 특별히 마음에 든다고 말하지 않았고 데이트 폭력 장면에 대해서도 긍정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 그저 전반적인 드라마가 취향에 맞아 재미있게 보고 있다는 ‘팬심’을 드러냈을 뿐이다. 그런데 이 발언이 문제가 됐다.

유병재가 쓴 글의 댓글에는 “폭력 그대로 나오고 정당화하고 그런 드라마 아니에요?” “남녀주인공 나이 차이가 너무 많이 나서 싫어요” 같은 내용의 댓글이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다. (그들 중 드라마를 보고 나서 비판하는 사람은 거의 없어 보였다.)

이에 유병재는 “강한 폭력이 나오긴 하는데 정당화는 아니다” “그 정도 표현하저 못하게 막아버리면 창작자들은 얼마나 좁고 외로울까” “꼴보기 싫은 사회 현상의 언급과 제시만으로 거부당하는 작품이 있다면 우리는 만날 같은 이야기만 보고 들어야 할지도 모른다”와 같은 댓글을 달며 대화를 이어가려 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열두 시간 남짓 지난 시점에서 결국 ‘사과문’을 올리고 말았기 때문이다.

사과문에서 그는 “저에겐 단순한 문화취향이었던 것이 어떤 분들께는 당장 눈앞의 현실 속 두려움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동안 의식하지 못했을 뿐 저도 젠더권력을 가진 기득권은 아니었는지, 그래서 조금 더 편한 시각으로만 세상을 볼 수 있었던 건 아니었는지 되돌아보게 되었다”고 말했다. 사실상 이 사과문은 일군의 페미니스트들을 향하고 있는 것이다.

‘사과’라 쓰고 ‘패배선언’이라 읽는다

유병재가 얼마나 진심을 담아 저 사과문을 작성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저 순간의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쓴 것인지, 정말로 뼈저린 반성을 담아 쓴 것인지는 본인만이 알 것이다. 문제는 이 두 가지 경우 모두가 우리 앞에 놓인 암담한 현실을 방증하고 있다는 점이다.

단순히 순간의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저 반성문을 쓴 것이라면 스스로도 한 사람의 창작자인 유병재는 본인의 자존심을 너무 쉽게 꺾어버린 것이다. 자유한국당이며 전두환 전 대통령 등을 비난할 때는 밑도 끝도 없는 욕설까지 서슴지 않던 그가 페미니스트들의 조직력에는 12시간도 되지 않아 백기를 들다니, 뭔가 온도차가 너무 심한 느낌이라 앞으로 그의 개그에 속 시원히 못 웃을 것 같은 기분이다.

그가 정말 뼈저린 반성을 담아 저 반성문을 썼다면, 이건 이제 사회적 문제가 된다. 사과문 하나로 끝낼 일이 아니라 ‘나의 아저씨’ 자체를 방영금지 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저 누군가 ‘저 작품을 좋아한다’고 말한 것만으로도 사과를 해야 하는데 그런 반(反)사회적인 작품을 1주일에 2회씩 합법적으로 방송한다는 게 말이 안 되는 일 아닌가 말이다.

만인에게 평등하게 표현의 자유가 있다고 헌법과 교과서는 가르치지만, 실제 상황은 조금 다르다. 어떤 취향은 죄가 된다. 아동 성애물도 아니고 로리타물도 아닌 ‘나의 아저씨’는, 이렇듯 희한한 낙인이 찍혀 버린 채로 16부작 중 딱 절반의 방송을 마쳤다. 5% 내외의, 결코 낮지 않은 시청률을 기록 중인 이 작품을 당신이 보고 있다면 부디 방영이 끝날 때까지 그 사실을 주변에 들키지 않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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