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배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 

세자와 어리의 일이 대궐 밖까지 들불처럼 번지자 세자의 빈객들은 난감했다. 스승의 도리를 다하지 못했다고 질책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빈객 변계량·이맹균·탁신이 편전에 들어 아뢰었다.

“저하를 이리 되게 한 것은 신 등이 능히 교도하지 못하여 그렇게 된 것입니다.

이전에 구종수를 치죄할 때에 저하께서 신 등과 더불어, ‘내 이제부터는 반드시 이런 일들은 하지 않겠다. 만약 개심하지 아니하고 다시 전철을 밟는다면, 성상께서 비록 부자의 지극한 은혜라 하여 즉시 죄를 가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하늘이 어찌 알지 못하겠는가?’하고 말했으므로, 신 등이 이 말을 듣고 스스로 경계하는 말이라 기록하여 서연청의 벽에 붙여 두었사옵니다.

어찌 오늘날의 일이 또 이에 이를 줄 알았겠습니까? 그러므로 신 등은 황송해 하는 것이니, 신 등이 진실로 원함은 이런 무리들을 대의로 처단함으로써 뒷사람을 경계하게 하시옵소서.” 

그들은 스스로 죄를 청한 듯 하면서도 구종수 등에게 그 죄를 돌린 것이다. 태종도 빈객들까지 질책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거야말로 누워서 침 뱉는 격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일은 경 등의 죄가 아니다. 내가 아비이면서도 능히 집안에서 덕과 의로 가르치지 못했는데, 하물며 경 등이 말해서 무엇 하겠는가? 그러나 그 실상을 말하면 경 등의 과실도 아니요, 또한 내 과실도 아니다.

옛날에 은나라 이윤은 신하이나 태갑을 별궁에 거처하게 하여 인(仁)을 행하고 의(義)를 실천하게 했으니, 태갑은 능히 고친 자라 하겠지만 세자는 고치지 못한 자라 하겠다.”  

태종의 말에 감복한 변계량이 부복하여 아뢰었다.

“신 등은 성상께 보답할 길이 없사옵니다. 단지 원함은 세자께서 사리를 분별하시어 마음을 평정하게 하여 전하에게 지극히 효도하실 줄만 알았지, 어찌 이 같이 할 줄 알았겠습니까?

실로 신 등이 능히 교도하지 못하여 그런 것이니, 신 등의 죄는 형언할 수 없사옵니다.”

태종은 변계량에게 일어나라 명했다.
“예전에 내가 전라도 임실로 사냥 갈 때 경은 세자가 혼정신성(昏定晨省)을 오래 궐하게 될 것을 염려하면서 눈물까지 흘렸으니, 그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내가 경의 말을 듣고 선조들이 세자를 잘 도와서 좋은 데로 인도하는 도리가 있다고 했더니, 세자가 하늘에 맹세하기를 ‘행실을 고친다.’ 하고서 어찌하여 겨우 2순(旬, 이십일)도 넘지 못하여 다시 전철을 밟는단 말인가?”

그러자 변계량 등이 울면서 아뢰었다.

“전하! 세자께서는 타고난 자질이 보통 사람보다 뛰어나니 고치기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만약 구종수 같은 무리를 제거한다면 하루아침에 개과천선할 것입니다.”
태종은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태조께서 성신문무(聖神文武)하신 것은 경 등이 아는 바이나, 지금 세자는 한 가지도 없으니 어떻게 조선 만세의 치욕을 씻을 것인가? 내가 태조의 일을 말함은 이유가 있어서이다.” 

변계량은 전하의 비위를 맞추려는 듯 아뢰었다.

“신 등은 이미 상교를 알고 있사옵니다. 태조께서 재덕을 완전하게 갖추셨던 것을 조선의 신하로서 누가 알지 못하겠습니까?

어리석은 백성에 이르기까지도 모두 알고 있사옵니다.” 

그러자 옆에 서 있던 우부승지 목진공이 아뢰었다.

“악공 이법화가 말하기를 ‘전년 정월에 세자께서 밤을 타서 구종수의 집에 이르러 저를 부르기에 제가 이오방과 함께 갔었는데, 뒤이어 춤을 추는 기생 초궁장이 와서 노래하니, 저더러는 거문고를 타게 하고 이오방에게는 피리를 불게 하여, 밤을 새다가 새벽에 이르러서야 초궁장을 끼고 궁궐로 들어갔습니다.’고 했습니다.

예전부터 세자가 음률을 좋아하니 악공 이오방과 이법화 등이 날마다 음란한 일로 유인하였고, 구종수도 서로 한 통속이 되어 세자와 함께 몰래 강변에서 놀기도 하고, 혹은 밤에 구종수의 집에 가서 유숙했는데 초궁장이 다 따라 다닌 것입니다.”

목진공은 세자에게는 잘못이 없고 그 옆에서 부추긴 자들이 죄인이라고 말한 것이다. 

초궁장은 정종이 가까이 한 기생인데 어리의 사건이 있기 전에 세자가 이를 알지 못하고 사통하자, 태종이 내쫓은 여인이다. 그 말을 듣자 태종은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듯 손짓하며 ‘물러들 가라’ 했다.

태종은 도승지를 불러 세자를 의정부 찬성 김한로의 집으로 물러가게 하고, 공상(供上, 물건을 공급함)을 정지하라고 명했다. 김한로는 세자의 장인이다.

며칠 후 빈객 변계량과 탁신이 다시 입궐하여 청했다.

“오늘 신 등이 세자의 저택에 나아가 세자께서 법도를 무너뜨리고 욕심을 마음껏 부려 성상의 염려를 충동시켰다고 극진히 아뢰었습니다.

세자께서는 말할 때마다 땅에 엎드려 흐느껴 울면서 허물을 뉘우쳐, ‘내 이 뒤로는 다시 이 같은 일은 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시기에, 신이 ‘저하께서는 지난번에도 구종수의 유혹에 빠져 감히 부도(不道)한 짓을 행하여 성상께서 염려하게 하였습니다. 그때 저하께서 허물을 뉘우쳐 스스로 맹세하여, 「성상께서는 아버지이니 끝내 생각하여 주심이 있을 것이지만, 하늘이야 어찌 나를 생각해 줄 것이냐.」라고 말씀하시기에, 그대로 틀림없이 주상께 고하였습니다. 그런데 한 달도 못되어 또 이러한 소란이 있으시니, 세자께서 비록 「내 다시는 이런 일을 하지 않겠다.」고 말씀하더라도, 저희들이 어떻게 믿겠습니까?’라고 고하니, 세자께서 ‘삼가 다시는 이같이 않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태종은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경 등이 세자의 스승으로서 세자를 보았다니 옳다. 그러나 세자가 일찍이 하늘을 가리키며 말하고서도 지금 그 맹세를 실천하지 못했으니, 내 어찌 믿고 곧이듣겠는가? 또 진심으로 허물을 고친 자취를 남에게 보여 주기란 가장 어려운 것인데, 그 자취를 장차 무엇으로써 나에게 보일 것인가? 경은 돌아가 다시 묻고 오도록 하라.” 

태종은 세자의 말을 믿지 못하지만 미련을 버릴 수가 없었다. 몇 번이고 근신할 기회를 주어서라도, 세자의 마음을 돌리고 싶었다. 아비의 마음이다. 

모두가 나가자 태종은 다시 변계량을 은밀히 불러 말했다.

“경 등이 세자의 실수를 극진히 알리어 세자로 하여금 뉘우쳐 깨닫게 하고, 세자가 다시는 전일의 행동을 밟지 않도록 종묘에 고하게 하라.”  

태종은 정말 세자가 신명(神明, 하늘과 땅의 신령)을 경외하여, 행실을 고치고 생각을 바꾸기를 간절히 바랐다. 세자에게서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찾고 싶었다. 

변계량이 세자에게 바삐 가서 왕지(王旨)를 고하니 세자가 흐느끼며 말했다.

“나의 마음은 지극하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를 알지 못하겠으니, 원컨대 빈객들이 밝게 나를 지도하여 주면 내 오직 지도하는 대로 따르겠소.” 

“세자께서 마음의 말씀에 따르는 데 있는 것이지 저희들이 지도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얼마 전에 종묘에 고하기를, ‘내가 만약 전의 행실을 고치지 않는다면 제대로 죽음을 얻지 못할 것이다.’고 하였는데, 이번에도 이 말로써 고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그것은 말씀이 자세하지 못할 뿐 아니라 실지로 정성과 공경으로 허물을 고친다는 진실함도 없는 것이니, 어찌 그 말로써 고함이 옳겠습니까?”  

세자는 한참 생각하다가 똑같은 말을 되풀이 했다.
“마음은 지극하지만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원컨대 빈객들이 나에게 밝게 가르쳐 준다면, 내가 그 말을 모두 따르겠소.”

변계량은 난처한 듯 답했다. 

“저하! 만약 하늘에 고하고, 문소전(文昭殿)에 고하고, 사직에 고하고, 종묘에 고한다면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늘과 사직은 멀고 조종의 뚜렷한 영령에게는 더욱 망령되게 고함이 불가합니다. 이미 고한 뒤에 조종의 영령을 속일 수 있겠습니까?

전하께서도 ‘세자가 이미 종묘의 영령에게 고했다.’고 하시었은즉, 앞으로 다시는 전일과 같은 부도덕한 일을 행하지 않을 것으로 신 등도 모두 믿고 듣겠습니다. 그러므로 저희들은 종묘에 고함이 절실하다고 여깁니다.” 

세자는 한참 망설이다가 변계량에게 말했다.

“내 무슨 낯으로 종묘와 조종의 영령을 뵙겠는가? 하지만 내 장차 고하려 하니 종묘에 고할 서문을 빈객들이 내 말을 듣고 지으시오. 종묘에 고하고 나서 또 전하께 상서하고자 하니 아울러 이 글들도 지으시오.”  

변계량은 그 길로 입궐하여 세자의 말을 그대로 전하께 아뢰었다.

태종은 억지스런 웃음을 띠며 말했다. 

“옳다. 만약 진심으로 허물을 고쳐 종묘에 고한다면 내 어찌 믿지 않겠는가? 이미 종묘에 고하고서 또 전일과 같다면 그것은 실로 조종의 영령을 속이는 것이니 내 어찌 믿지 않겠는가?”

하지만 태종은 안도하는 마음보다는 걱정이 앞섰다. 제발 이번 만큼은 세자의 마음이 바뀌길 간절히 바랐다.

닷새 후 세자가 종묘에 고했다. 

봄기운이 완연한 쾌창한 날씨다.

“세자 이제가 생각하건대 군부(君父)의 마음을 우러러 몸 받지 못하고 빈사의 가르침을 마음에 새기지 못하여, 의인을 내치고 소인 잡배들과 친하였습니다. 사욕 때문에 법도를 무너뜨리고 방종 때문에 예의를 무너뜨려, 여러 번이나 어버이에게 순종하지 아니하여 그 마음을 크게 상하게 하였고, 위로는 조종의 덕을 더럽혔으니 신의 죄가 큽니다. 신이 비록 우매하다 하더라도 양심의 발로는 그만둘래야 그만두지 못함이 있습니다. 더구나 일찍이 글을 읽어 의리를 대략이나마 아니, 감히 마음을 씻고 행실을 고쳐 그 끝을 도모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에 마음을 깨끗이 하고 스스로 새사람이 될 조목을 갖추어 조종의 영전에 다짐하는 바입니다.” 

그리고 태종에게도 상서를 올려 다짐했다.

“세자 신 이제는 사리에 어둡고 고집이 세어 남과 같지 못함에도 부왕 전하께서 신을 적장(嫡長, 정실에서 난 맏아들)이라 하여, 그 우매함을 잊고 책봉하여 세자로 삼은 지 지금 14년이 되었습니다.

대체로 경서에 통하고 사리에 통달하여 세자의 직분을 다하고, 종묘와 사직의 중함을 이어받게 하고자 하심이었으나, 신(臣) 제는 단지 전하께서 자애하심만을 믿고, 전하께서 종묘와 사직의 대계를 위함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완악한 자들과 친하여 오직 사욕만 좇고 법도를 무너뜨렸으며, 예의를 무너뜨리는 행실을 전부터 너무나 자주 했습니다. 지난해 가을에는 전하께서 애써 견책을 하시므로, 신은 그 때에 겨우 스스로 잘못을 뉘우치고 깨달아 하늘을 두고 말하면서 허물을 되풀이 하지 않기로 맹세했습니다. 하나 아직도 어린아이의 습성이 있는 까닭에 소인(小人)의 유혹에 빠지고 또 다시 혼미함에 빠져, 드디어 하늘을 속이고 어버이를 속이고 임금을 속이기까지 하였는데도 반성하지 못했습니다. 신의 죄를 생각하면 절대로 용납할 수 없습니다.” 

물론 이 모든 글들은 변계량이 쓴 것이다. 구구절절 가슴에 와 닿는 말이다.

세자는 그저 허물을 뉘우쳐 변하겠다는 마음만 가지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세자의 얼굴에서 그러한 심오한 다짐은 느낄 수가 없었다. 그래도 태종은 기뿐 마음으로 즉시 세자에게 대궐로 돌아올 것을 명했다. 

그러자 의정부와 공신, 육조 및 대간들이 일제히 하례를 하였다.

“전하! 세자께서 허물을 뉘우쳤으니, 더없이 기쁘게 하례 드리옵니다.” 

태종도 크게 웃으며 말했다.

“과인이 세자를 보지 않으려고 했으나 이제 허물을 뉘우치니 나도 기쁘다.”

나라의 커다란 근심이 일순간에 사라진 듯했다. 그러나 의금부에서는 세자의 회심과는 달리, 구종수와 어리의 사건에 연루된 자들에게 가혹한 추국이 진행되었다. 

형조와 대간이 고했다.

“지난번에 구종수와 이오방 등이 궁궐을 넘어 들어갔으니 죄가 극형에 처해야 합당한데, 전하께서 특히 너그럽고 어짊으로써 단지 장형으로 처리하여 귀양 보냄에 그치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구종수와 이오방의 부도덕한 죄상이 또 드러나서 관계됨이 매우 중하니, 죽어도 오히려 남을 죄가 있사옵니다. 구종수의 형제 구종지와구종유 등은 이미 내통하였고, 권보와 이법화의 부도덕한 죄도 구종수나 이오방과 다름없으니 모두 극형에 처해야 마땅할 자이옵니다. 이숙번은 자신이 불충한 죄를 범하고도 특별히 성은을 입어 생명을 보전하고 고향에 안치되었습니다. 때문에 그는 조심하고 근신함에 겨를이 없어야 옳을 것인데 사사로이 구종수와 내통했습니다. 또 구종수의 간청을 들어 악한 마음을 품고 사실을 숨겨 조정에 계문하지 않았사옵니다. 그가 지난번의 마음을 고치지 아니함이 분명하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형조에 명하여, 관련된 죄인 모두를 법에 두어 국법으로 엄히 처벌하시옵소서.” 

지금 귀양가 있는 이숙번이 구종수의 일에 연루된 것이다.

이숙번이 누구인가? 

1차 왕자의 난 때 지안산군사(知安山郡事)로 있으면서 사병을 출동시켜, 태종을 도와 세자 이방석과 정도전·남은·심효생 등을 제거하는 데 큰 공을 세워 정사공신 2등에 책록된 자이다. 또한 2차 왕자의 난 때도 박포가 이방간(태종의 넷째 형)을 충동해 거병하자 군사를 동원해 이들을 제거하여 좌명공신 1등에 책록된 자이다. 공신 중의 공신이다.

그는 원래 성품이 좋지 못해 자신의 공과 태종의 총애를 믿고, 전하 앞에서도 거만 방자해 불충하였고 동료들에게도 무례하게 굴었었다. 그로 인해 여러 차례 대간의 탄핵을 받았지만 태종은 그 때마다 그를 감쌌다.

하지만 지난해 6월 박은이 우의정에 제수되자, 이숙번이 ‘박은은 일찍이 내 밑에 있었다.’고 불평하며, 병을 핑계하여 여러 달 동안 조정에 나오지 아니했다. 인사에 불만을 품은 것이다. 

이에 형조와 대간뿐만 아니라 삼공신(三功臣)까지도 그를 탄핵했다. 결국 며칠 동안 계속되는 탄핵에 어쩔 수 없어, 태종은 이숙번의 공신녹권과 고신을 거두고 가속과 함께 황해도 연백의 농장에 거주하게 했다. 귀양을 보낸 것이다.

그런 그가 이번엔 구종수와 연루된 것이다. 

구종수가 귀양가 있는 이숙번에게 사람을 보내어 활과 이리 꼬리 그리고 양마(良馬)를 청하였는데, 이리 꼬리는 세자에게 바치려 한 것이었다.

이때 이숙번은 구종수가 세자에게 불충한 짓을 한 것을 알면서도 전하께 고하지 않았다. 태종은 어쩔 수 없이 이숙번을 경상도 함양에 다시 유배시켰다. 

다음날 의금부도사 윤수가 구종수 등의 죄를 판결한 계본을 올렸다.

“권보는 ‘이법화와 함께 곽선의 첩 어리를 세자에게 바친 것은 세자로 하여금 성상께 아뢰게 하여 저의 몰수된 전답을 도로 받고자 함이고, 또 뒷날에 은혜 입기를 바라서 하였습니다.’라고 자복하고, 이오방은 ‘어리를 세자에게 바친 것은 전일에 세자께서 저에게 옷과 갓·표피·당비파를 내려주셨기 때문이며, 또 뒷날에 은혜 입기를 바라서 하였습니다.’라고 자복하였습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