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23일 세상을 떠났다. 향년 92세. '영원한 2인자', '킹 메이커', '처세의 달인'으로 통하는 그의 정치 역정은 우리 현대사 그 자체였다. 영욕과 애증이 교차하는 고인은 5·16 쿠데타로 정치계 전면에 등장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 주도의 군사혁명에 주도적으로 가담한 그는 김대중(DJ)·김영삼(YS) 전 대통령과 함께 '3김'으로서 우리 현대사를 함께 써왔다.

김 전 총리는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 창설자로서 박정희과 전두환 독재정권에서 2인자로서 정치 위세를 펼치면서도 부침을 거듭했다. 1987년 6월 민주항쟁 이후 '3김'으로 정치계에 재입문한 그는 양김을 대통령으로 만드는 '킹 메이커'로 역할했으나 정작 본인은 대권과 거리가 먼 '2인자'였다.

김 전 총리는 1963년 1월 중앙정보부장 시절 한일 국교수립을 위해 일본을 방문한 뒤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을 방문, 환담을 나눴다 (대한뉴스 제공)
김 전 총리는 1963년 1월 중앙정보부장 시절 한일 국교수립을 위해 일본을 방문한 뒤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을 방문, 환담을 나눴다 (대한뉴스 제공)

보수의 중심이면서도 보수와 진보의 '합종연횡'으로 우리 현대사의 변화를 주도해온 김 전 총리는 오는 27일 한 줌의 재로 고향으로 돌아간다

▲ 35세, 5·16 쿠데타로 정치 입문 '군부독재 2인자'

1926년 충남 부여군에서 7남 중 다섯째로 태어난 김 전 총리는 공주 중·고등학교와 서울대 사범대,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했다. 2인자로서의 정치 역정은 1961년 처삼촌인 박정희 전 대통령이 주도한 5.16 쿠데타에 가담하면서부터다. 같은해 창설된 중앙정보부 부장에 취임한 그는 1963년 공화당 창당을 주도하는 데 앞서 한일 국교정상화 회담을 막후에서 이끌었다.

창당과정에 증권파동 등 4대 의혹사건과 굴욕외교의 단초가 된 '김종필-오히라 메모'파동으로 1963년과 1964년 두차례 걸쳐 망명길에 올랐다. 이 와중에 6대(1963년)와 7대(1967년)에 의원을 지낸 그는 2차례 공화당 의장을 오르내리다가 1968년 농민복지회 사건으로 당의장을 포함한 모든 공직에서 물러났다. 1969년 박정희의 3선 개헌 시에는 처음의 반대입장을 철회, 1971년부터 75년까지 4년 6개월 간 최장수 국무총리를 지냈다. 장기 독재정권 동안 2인자의 영욕과 부침은 이후에도 이어졌다.

1989년 1월 25일 '3김' 회담. 김영삼 통일민주당 총재와 김대중 평화민주당 총재, 김종필 신민주공화당 총재(왼쪽부터) (사진=대한뉴스)
1989년 1월 25일 '3김' 회담. 김영삼 통일민주당 총재와 김대중 평화민주당 총재, 김종필 신민주공화당 총재(왼쪽부터) (사진=대한뉴스)

▲ 민주항쟁 이후 '킹메이커'로 부활

박정희 전 대통령이 1979년 10·26 사태로 김재규에 의해 피살되고, 전두환 신군부가 급부상하면서 고인은 유신독재의 부정 축재자로 낙인찍혀 재산이 압류되고 정치활동 금지를 당했다. 1984년 3차 외유에 떠난 그는 1986년 귀국해 13대 총선을 앞두고 신민주공화당을 창당했다. 1987년 13대 총선에서는 충청권을 기반으로 35석을 차지하면서 정치에 복귀했다. 여소야대와 4당 체제에서 ‘캐스팅 보트’를 행사하며 정치적 위상을 확보하는 그는 1987년에는 13대 대선(노태우 당선)에 3김과 함께 출마했고, 낙선 후 1990년 김영삼 대통령과 함께 3당 합당에 참여해 민자당의 한축이 된 데 이어 1992년 대선에서 김영삼 후보를 지원해 문민정부 초기 2인자 자리에 올랐다.

김영삼 대통령과 밀월은 오래가지 못했다. 고인은 곧 민자당을 탈당해 자유민주연합을 창당, 1995년 첫 지방선거에서 충청권과 강원도에서도 시도지사를 배출하면서 중부권의 맹주로 떠올랐다. 1996년 제15대 총선에서도 자민련은 50석을 확보, 제3당으로서 정치 위세를 갖췄다.
 

92세 일기로 타계한 김종필 전 총리의 주요 삶 (출처 : 뉴시스)
92세 일기로 타계한 김종필 전 총리의 주요 삶 (출처 : 뉴시스)

고인은 1997년 제15대 대선을 앞두고 정치실험을 감행했다. 정치색을 달리한 김대중 국민회의 총재와 연대, 이른바 '디제이피(DJP) 연합’을 깜짝 발표했다. 고인은 김대중 대통령 시절인 '국민의 정부'에 초대 국무총리를 맡게되나 내각제 개헌 약속이 이행되지 않는데다 대북 '햇볕정책'에 대한 이견 심화로 2001년 9월 임동원 통일부장관 해임건의안을 자민련이 찬성, 가결한 것을 계기로 DJ정권과 결별했다.

▲보수 견지 속 '보수-진보 합종연횡' 

고인은 2002년 노무현 대통령의 당선 이후 노 대통령에 대한 국회의 탁핵안에 찬성, 그 역풍으로 제17대 총선에서 참패하고 10선 도전에도 실패했다. 당시 그는 "노병은 죽지는 않지만 조용히 사라지는 것"이라며 정계은퇴를 선언했다.

DJP연합으로 2번째 총리자리에 오른 김종필 전 총리가 1998년 4월 한일 축구전이 열린 잠실운동장에서 차범근 감독을 격려했다. 김 전 총리 옆에 정몽준 축구협회장이 보인다. (사진=대한뉴스) 촬영일 1998년 04월 01일
DJP연합으로 2번째 총리자리에 오른 김종필 전 총리가 1998년 4월 한일 축구전이 열린 잠실운동장에서 차범근 감독을 격려했다. 김 전 총리 옆에 정몽준 축구협회장이 보인다. (사진=대한뉴스) 촬영일 1998년 04월 01일

김 전 총리는 2007년 17대 대선 때 이명박 후보 지지 선언에 이어 18대와 19대에 박근혜와 홍준표 등 여권 후보 지지 등으로 간접적으로 정치에 관여했다.

고인은 지난 2013년 국회 헌정기념관에서 그의 아호를 딴 '운정회'에서 "5·16쿠테타가 혁명이다"면서 "국립묘지는 가지 않고 (고향에 가족묘에) '평생의 반려자(박영옥)와 이곳에 함께 눕노라'는 비석만 새겨놓았다"고 말했다.

쿠데타 정당화를 위해 맹자의 '무항산 무항심(無恒産 無恒心)'을 인용했다. 그는 "민주주의와 자유도 그것을 지탱할 수 있는 경제력이 없으면 있을 수 없다"면서 "민주주의를 먼저 깔아야 한다는 말은 옳으나 배고픈데 무슨 민주주의가 있고 자유가 있느냐"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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