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이란 모두가 읽고 싶어 하지만 아무도 안 읽는 이야기이다(A classic is something that everybody wants to have read and nobody to read ).” 미시시피 강 유역을 배경으로 개구쟁이 소년 톰 소여와 허클베리 핀의 모험을 그린 작가로 유명한 미국 소설가 마크 트웨인(1835~1910)이 고전에 대해 평한 말입니다. 스트레이트뉴스의 ‘클래식 리뷰’를 통해 고전은 어렵다거나 형편없다는 편견에서 벗어나, 고전에 친숙해지고 마음껏 비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막스 베버(Max Weber, 1864~1920)
막스 베버(Max Weber, 1864~1920)

청교도 윤리, 근대 자본주의 정신을 탄생시키다

경제사학자 고트하인(1863~1923)이 “자본주의 종묘장”이라고 지칭하는 것은 16세기와 17세기에 청교도들( 칼뱅주의 )이 활동하던 영국과 네덜란드, 식민지 미국을 말한다.

이 청교도들은 “나는 구원받은 자인가”라는 그들의 일생일대 문제와 관련된 여러 가지 이유들로 인해서 조직적인 노동과 이윤 추구를 자신들의 삶의 중심에 두었고, 그 밖의 다른 모든 것들은 그들에게 별 의미가 없는 것들이었다.

역사사회학자로서 베버의 관심사는 1. 사람들이 자신들의 삶을 조직적 노동과 물질적인 성공을 중심으로 체계적으로 조직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만든 종교적 원천을 발견해 내는 것이었고 2. 사람들이 이렇게 체계적으로 자신들의 삶을 조직한 것이 “자본주의 정신”의 출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을 증명해 내는 것이었다.

개신교에 관한 베버의 논문인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1904~1905>은 그의 관심사를 농축해서 보여준다. 그는 근대적인 자유의 기원을 계몽주의가 아니라 영국과 미국의 청교도 전통에서 찾았다. 양심과 종교의 자유를 확보하고자 하는 그들의 투쟁은 다른 모든 인권을 확보하는 모퉁이돌이 되었다는 것이다.

베버는 루터교가 처음에는 급진적 운동으로 시작되었다는 것은 인정했지만, 결국 루터교는 가톨릭과 마찬가지로 기존 권력을 인정하고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역할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주장한다. 

그 결과 영국과 미국은 급진적인 개인주의와 자유주의의 산실이 된 반면에, 독일은 비스마르크의 “카이사르적인” 유산과 루터교의 구태의연한 윤리로 말미암아 구시대에 묶여서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베버는 이 논문에서 “근대적 노동 윤리”와 “물질적 성공에 대한 지향성”의 중요한 원천이었던 것은 시장의 관심과 사업에 대한 기민한 감각과 기술혁신이 아니라, 종교 영역으로부터 생겨난 “자본주의 정신”이라는 에토스(ethos, 기풍)였다고 주장한다.

막스 베버(1864~1920)는 독일 에어푸르트에서 태어난 직후에 가족이 베를린으로 이사했다. 역사, 철학, 문학, 언어와 같은 고전 과목을 철저히 익힌 후에 하이델베르크, 베를린, 괴팅겐 대학에서 법률과 경제사를 전공하고 30세(1894년)에 프라이부르크 대학 정교수로 임명되었다. 2년 후 하이델베르크 대학 경제학 교수로 자리를 옮겼다. 베버는 뮌헨에서 생을 마쳤다.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은 잡지 <사회과학 및 사회정책 논총>에 1904년 연재했던 제1부와 논문자료를 수집하기 위해 1905년 미국 여행에서 돌아온 뒤 완성된 제2부의 논문이 책으로 출판된 것은 1920년이었다. 그의 논문은 근대 자본주의를 이해하기 위한 필수 저작으로 꼽히며, 사회과학 분야에서 가장 대담한 시도 중의 하나로 평가된다. 베버의 논증을 둘러싼 논쟁은 발표 당시부터 격렬하게 전개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논쟁의 강도는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거의 약해지지 않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17~19세기 베버와 청교도들의 고민은?

베버가 속해 있던 세대는 과거와 현재라는 “두 세계” 중간에 끼여 있었다. 봉건영주들과 소작인들로 이루어진 독일의 농촌사회는 수세기 동안 변함없이 이어져 왔다. 그러나 19세기 후반 유럽 도시들에서 진행된 급속한 산업화의 영향으로, 도시화, 관료화, 세속화, 자본주의의 팽창이 광범위하게 일어나는 엄청난 변화를 체감하게 된 베버와 그의 동료들은 과거와 현재의 연속성은 영원히 사라진 것 같은 당혹감을 느꼈다.

2000년 넘게 서양 역사를 관통하는 전통과 가치들을 와해시키는 거대한 변화의 물결을 자신들의 눈으로 목격한 베버와 동시대인들은 근본적인 질문을 제기했다. 시장의 법칙을 앞세우는 “근대 자본주의” 아래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새로운 시대에서 우리를 이끌어줄 지도 이념은 무엇인가? 어떤 동력들이 세계의 산업화를 거칠게 밀어붙이고 있는가? 

“우리를 집어 삼킬 정신적인 혼돈을 극복하기 위한 도구를 어디에서 발견해야 하는가?”라는 철학자 빌헬름 딜타이의 호소에서 베버와 동시대인들의 절박한 정신적 위기감을 현대인들도 느낄 수 있다.

베버는 동시대인들의 위기감을 공유했으나, 게오르그 짐멜과 프리드리히 니체가 주도했던 “문화적 염세주의”와 이미 과거가 되어 버린 세계의 단순함을 동경한 낭만주의 운동에 동참하는 것을 거부한 반면에, 그는 개개인에게 주어진 근대 세계의 자유와 권리를 환영했다.

베버는 정당 정치를 옹호했고, 정치인들의 책임윤리를 강조했으며, 시민의 자유를 헌법으로 보장할 것을 요구했고, 참정권의 확대와 강력한 의회 정치를 주문했으며, 관료주의가 거대화되어 민주주의가 약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다양한 이익집단들의 활동을 보장하는 사회적 기제를 정립하기 위해 애썼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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