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투'(#MeToo·나도 피해자다) 열풍에 페미니즘이 전국민적 이슈로 떠올랐다. 페미니즘을 둘러싼 논쟁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중심으로 확산되고 있지만, 페미니즘의 정확한 의미를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듯 싶다. 사전을 찾아보면 페미니즘은 '여성의 특질을 갖추고 있는 것'이라는 뜻을 지닌 라틴어 '페미나(femina)'에서 파생한 말이다. 성 차별적이고 남성 중심적인 시각 때문에 여성이 억압받는 현실에 저항하는 여성해방 이데올로기를 의미한다. 알들 모를듯 세계적인 이슈로 부상한 페미니즘은 과연 무엇일까. 스트레이트뉴스는 페미니즘 이해를 돕는 책을 연이어 추천한다.

“우리가 저녁을 먹을 수 있는 것은 푸줏간 주인, 양조장 주인, 혹은 빵집 주인의 자비심 덕분이 아니라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려는 그들의 욕구 때문이다.” 오늘날 주류 경제학의 시작점이 된, 정치경제학의 아버지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에 등장하는 유명한 구절이다.

당시 애덤 스미스는 빵집 주인이 빵을 굽고, 양조장 주인이 술을 빚는 것은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이윤을 취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했다. 모두가 자기 이익을 위해 행동하면 보이지 않는 손이라도 있는 것처럼 세상이 유지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때 누락된 가장 중요한 것이 있다. 바로 여성이다. 애덤 스미스가 <국부론>에서 개인의 이익 추구 본능에 대해 언급했을 때, 이기심이 아니라 사랑으로 그를 돌봐준 어머니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의 보살핌이 없었다면 이 명저가 탄생할 수 있었을까. 이 책에 등장하는 푸줏간 주인, 양조장 주인, 빵집 주인이 이기심을 발휘해 돈을 벌 수 있던 것도 그의 아이를 키우고 식사를 준비하고 텃밭에서 채소를 키운 그들의 아내 혹은 누이 덕분이었다. 

애덤 스미스가 구상한 세상은 단 하나의 경제에 기초하고 있었다. 남성만이, 그리고 그가 하는 일만이 의미를 갖는 경제. 애덤 스미스가 어머니를 망각하면서 그에게서 시작된 사상의 갈래가 불완전한 모습을 띠게 되었고, 경제학이 점점 중요해짐에 따라 이 근본적인 실수는 너무도 널리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애덤 스미스의 경제 사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인간의 모델로 구상한 호모 에코노미쿠스(Homo economicus), 즉 경제적 인간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경제적 인간은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며, 늘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고 계산적이고 두려움이 없다.

그는 이성, 독립성, 이기심 등 우리가 전통적으로 남성성과 동일시하는 문화적 특성을 모두 지녔다. 따라서 호모 에코노미쿠스는 인간이라고는 하지만 사실 ‘남성’에 한정된 모델이 되었다. 반대로 이와 상반되는 특성인 감정, 의존성, 자기희생, 연대감 등은 여성의 특성으로 모두 몰아넣었고, 여성은 누군가를 위해 희생해야 하는 비경제적인 존재로 규정됐다. 

오랫동안 여성의 노동은 비가시적이고 늘 존재하는 인프라로 간주돼 왔다. 짐바브웨의 로펠트에 사는 한 젊은 여성이 있다. 그녀는 새벽 4시에 일어나 11킬로미터를 걸어서 양동이 하나에 물을 채운다. 집에 돌아오면 땔감을 모으고, 점심을 차리고, 설거지를 한 다음 채소를 수확하러 나간다.

그리고 다시 물을 길으러 길을 나선다. 돌아와 저녁을 짓고 동생들을 재우면 밤 9시가 된다. 그러나 경제학 모델에 따르면, 그녀의 고된 노동은 경제 수치에 전혀 반영되지 않는다. 즉, 그녀는 하루 종일 노동하지만 비생산적이고 비경제적인 존재로 취급된다.

캐나다 국가 통계청의 조사 결과, 무보수 노동이 국가 GDP의 30.6?41.4%를 차지하는 것으로 측정됐다. 30.6%라는 수치는 무보수 노동을 보수 노동으로 대체하면 어느 정도의 비용이 들 것인지를 기준으로 계산한 것이고, 41.4%는 가사노동자가 집안일 대신 다른 노동을 했을 때 얼마나 벌 수 있을지를 기준으로 계산한 것이다. 어떤 기준으로 보든 엄청난 수치다. 

그러나 굳이 수치로 환산해 보지 않아도, 이러한 활동이 경제 성장에 필수적이라는 것은 쉽게 알 수 있다. 한 사회에서 적절한 양육 및 돌봄 체계 없이 양적 성장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행복하고 건강한 아이들은 사회의 긍정적 성장의 기반이다. 그리고 이 자원들은 상당 부분 무보수 가사노동의 결과로 양성된다. 그러나 이러한 노동의 유용성과 가치에 대해 주류 경제학자들은 이상할 정도로 신경 쓰지 않았다. 

많은 여성이 보수를 받는 고용시장에 진출하게 된 현재도 상황은 비슷하다. 누군가는 여성의 사회 진출 비율을 들어 사회가 평등해졌다고, 여성도 경제적 여유를 누릴 수 있게 되지 않았느냐고 주장할지 모른다. 하지만 이들이 경제활동 때문에 포기한 가사노동을 위해 고용되는 것은 또 다른 여성들이다. 

세계적으로 많은 여성들이 이주 노동으로 자신과 가족의 생계를 해결한다. 많은 나라에서 여성 이민자들이 고국에 보내는 돈은 해외 원조와 외국인 투자를 합친 것보다 국가 경제에 더 큰 기여를 한다. 필리핀은 이 송금액이 GDP의 10%를 차지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원래 청소를 해야 했을 사람(서구 가정의 여성)의 시급보다 가사 도우미의 시급이 현저히 낮지 않으면 가사 도우미를 쓰는 것이 경제적으로 의미가 없기 때문에, 여성 사이의 불평등이 지속되게 된다. 

또한 가사 도우미를 비롯해 돌봄 산업에 종사하는 여성들의 비율이 높다는 사실은 남녀 간의 경제적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기제로 작용한다. 돌봄 산업의 임금이 낮아서 주로 여성들이 그 분야에 종사하는 것일까, 주로 여성들이 일하기 때문에 그 분야의 임금이 낮은 것일까. 확실한 것은 남녀 간 경제적 불평등의 가장 큰 이유가 여성이 남성보다 돌봄 산업에 더 많이 종사하기 때문이고, 이는 애덤 스미스 이후 사회에서 벌어지는 행위의 목적을 돈 또는 사랑, 이렇게 이분법적으로 갈라놓았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돌보는 일은 사랑에서 나오기 때문에 경제적 보상이 중요치 않은 행위이고, 물질적 가치를 만들어 내는 것은 자기 이익 추구 욕구에 의한 경제적 행위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모든 행위의 목적을 이렇게 이분법적으로 나눌 수 있을까.

「잠깐 애덤 스미스씨, 저녁은 누가 차려줬어요?」 카트리네 마르살 지음·김희정 옮김(부키·2017)
「잠깐 애덤 스미스씨, 저녁은 누가 차려줬어요?」 카트리네 마르살 지음·김희정 옮김(부키·2017)

크림전쟁(1853~1856) 당시 맹활약한 백의의 천사 나이팅게일의 이미지는 돈에 관심이 없는, 조용하고 수줍은 천사 같은 모습이다. 그러나 실제로 나이팅게일은 경제학에 큰 관심을 가지고 사회를 날카롭게 비판하는 싸움꾼에 더 가까웠다.

나이팅게일은 간호사들이 정당한 보수를 받게 하려 평생을 싸웠다. 그녀는 선한 일을 수행한다는 사실이 간호사들의 적은 보수를 정당화할 수는 없으며, 이들의 노동에 더 많은 보수가 주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녀는 선행을 하는 것과 경제적으로 잘살기를 원하는 것 사이에 아무런 모순이 없다는 말을 반복했다. 이 땅에서 선한 일을 수행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도 돈은 꼭 필요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 행동을 할 때 돈이나 선의 중 한 가지 요인만이 동기가 된다는 생각에 얽매여 있다. 게다가 이 개념은 전통적으로 성별에 관해 우리가 가진 이미지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남성은 자기 이익 추구라는 본능에 의해 나아가고 여성은 전체적인 그림을 조화롭게 만드는 역할을 하도록 되어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 두 가지 본능이 성별에 관계없이 한 사람 안에 공존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인상을 받는다. 

사람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인정받기를 원하고, 돈은 그에 대한 보상 중 하나다. 무엇보다도 사람들은 돈을 필요로 한다. 여성들도 말이다. 그러나 선한 일의 목적이 물질적 보상이라고 했을 때 이를 탐욕적인 것으로 간주한다면, 돌봄 업종에 대부분 종사하는 여성에 대한 경제적 차별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21세기 들어 여성의 사회 진출이 활발해지고 여성 해방이 화두에 오르며, 이 ‘이름 없는 문제’는 자취를 감추고 여성들에게 끝없는 기회가 주어진 것 같았다. 동등한 권리와 자유가 있으니 시장에서 마음껏 경쟁하라! 그러나 오늘날의 사회 구조 자체는 여전히 남성 중심이고, 여성은 이곳에서 힘들게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야 한다. 

직장에서는 “집에서 살림이나 해”라는 말을 듣지 않기 위해, 그리고 자신이 충분히 경제적인 존재임을 보여주기 위해 남성들보다 훨씬 더 노력해야 한다. 그리고 아직도 일과 가정의 균형을 잡는 것은 여성의 역할로 간주된다. 직장에서 남자들과 경쟁하고 적당한 배우자와 결혼해 아이를 낳아 키우고, 시부모를 섬기고, 집안을 깨끗이 정돈하고, 운동을 열심히 해 ‘자기 관리’도 철저히 하는 슈퍼우먼이 되라는 조언을 듣는다. 

이로 인해 여성은 여전히 남성에 비해 스트레스를 더 심하게 받고 시간 부족을 호소한다. 계층과 상관없고, 결혼을 했는지의 여부도 상관없으며, 돈을 얼마나 많이 버는지, 어느 나라에 사는지, 자녀의 유무도 상관없다. 여성들이 이런 느낌을 받을 때 주로 비난받는 것은 페미니즘이다. 여성이 경제활동을 하며 고통받는다는 사실은 여성이 애초에 비경제적인 존재임을 증명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이에 대해 미국의 여성운동가 글로리아 스타이넘(Gloria Steinem)은 페미니즘이란 ‘완전히 새로운 종류의 파이를 만드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단순히 남성 중심 구조에 여성을 추가해 섞는다 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구조에서 예전에 소녀들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어주던 “너는 모든 것이 될 수 있어”는 “너는 모든 것이 되어야 해”로 바뀌었고, 이러한 강박은 여성들을 더 불행하게 만들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애덤 스미스가 자기 이익 추구 욕구로 돌아가는 사회를 생각하는 동안 자신을 돌봐준 어머니를 까맣게 잊었고, 그가 사회를 보는 관점은 오늘날까지 이어져 여성들이 겪는 성불평등과 경제적 불안정의 시초가 됐다. 현재 주류 경제학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페미니즘은 필수적이며, 이는 성불평등부터 인구 증가, 복지 체계에 대한 문제부터 노령화 사회에 닥칠 인력 부족에까지 도움을 줄 수 있다.

이제 페미니즘은 ‘여성의 권리 확보’ 이상의 훨씬 큰 문제에 관한 것이다. 그동안 많은 진보를 거듭하기는 했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 이 변화에 맞추어 새로운 세상에 걸맞도록 사회, 경제, 정치에 근본적이고 구조적인 변화를 가져오는 작업에 착수해야 하고, 이는 애덤 스미스의 어머니를 경제학에 포함시키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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