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초기 오직 백성을 위해 평생을 가시고기 같은 삶을 살고 간 방촌 황희. 황희는 세종대왕과 함께 무려 18년간 영의정으로 재임하며 오직 백성들의 아픔과 더 나은 삶을 위해 일하며 세종과 함께 백성을 위한 정치에 날실과 씨실이 되어 지치(至治)의 시대를 이룩한 인물이다. 스트레이트뉴스는 세종과 함께 청렴함과 바른 정치로 백성을 위한 새로운 지치의 시대를 이룩한 황희의 삶을 지금 이 시대에 투영해 보고자 오기수 김포대학교 교수(경영관광학부)가 집필한 역사소설 「백성의 臣(신) 황희」를 13회에 걸쳐 연재한다.

영의정

황희가 태석균의 사건으로 좌의정에서 파면 된지 열 달이 지났다.
황희는 자숙하고 근신하며 모처럼 한가한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애닮은 사람은 세종이었다. 
백성을 위해 계획하고 할 일이 많은 세종은 황희 같은 인물을 구할 수도 없어 완전히 내칠 수 없었다. 사위 서달과 얼마 전에 일어난 태석균의 일을 빼고는 국정 운영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사람이었다. 어쩔 수 없이 세종은 좌의정 자리를 그대로 비워두고, 중요한 정사는 은밀히 사람을 보내어 황희에게 물어 시행했다. 세종은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드디어 신해년(세종 13) 9월 초사흘에 세종은 재위 중 가장 파격적인 인사를 단행했다. 
황희를 영의정에, 맹사성을 좌의정에, 권진을 우의정에 제수한 것이다. 좌의정에서 파직된 황희를 영의정으로, 같은 죄로 우의정에서 파직된 맹사성을 좌의정으로 임명한 것이다. 세종은 지난 4년간 황희를 영의정에 세우기 위한 일념뿐이었다. 그래서 영의정 이직을 좌의정으로 제수하면서도 영의정 자리를 비워둔 것이다. 
오늘을 기다린 것이다.

그동안 황희는 완전히 조정을 장악했고, 국사를 농락하며 온갖 비리를 저지른 일충파 세력들은 거의 사라졌다. 드디어 황희가 조정 최고의 수상이 되었다. 그야말로 일인지하(一人之下) 만인지상(萬人之上)의 자리에 오른 것이다. 물론 황희는 지난 4년간 좌의정으로 있었지만 영의정이나 마찬가지였다. 황희가 좌의정이 될 때부터 비워둔 영의정 자리에 황희가 오르면서 모처럼 의정부는 완벽한 삼정승 체제를 갖추었다.
황희 나이 69세로 조정에 복귀하여 전하를 보필한 지 꼭 10년 만이다. 황희는 27세의 늦은 나이에 과거에 급제하여, 고려 말 성균관의 학록(정9품)으로 관직을 시작했다. 그 후 42년 만에 영의정이 되었다. 

그는 개국 후 태조 때 두문동에서 나와 세자우정자를 시작으로 태종 때에는 육조 판서를 두루 거치며 승승장구하다가, 양녕대군의 폐위 반대로 심온처럼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속에서 4년간 귀양살이를 했다. 하지만 임인년(세종 4년) 10월에 기사회생으로 복직되어 의정부 참찬에 기용된 후 빠르게 승진하여, 우의정과 좌의정을 거쳐 10년 만에 영의정이라는 영광의 자리에 오른 것이다. 온화하고 베푸는 성품과 백성을 먼저 생각하는 마음, 공명정대한 정사가 그를 있게 한 것이다.

함께 좌의정에 제수된 맹사성은 황희보다 3살이 많으며, 우의정 권진은 무려 6살이 많았다. 그 당시 관료들의 평균 수명을 고려하면 황희를 비롯한 삼정승의 인사는 천명(天命)을 거스린 것이었다. 보통 벼슬길에 들어선 자는 시보에서 시작하여 사고 없이 4, 50년의 임기를 기다려야 비로소 3, 4품의 직급에 오르게 된다. 그러나 벼슬하는 동안에 사고 없이 50여 년을 넘기는 자는 매우 드물었다. 나이 40세이면 노쇠하기 시작하니, 50여 년을 관직에 있으면 거의 70이 넘어 쇠하거나 병들지 않고 직무를 감당할 자는 거의 없었다.
황희가 영의정에 제수되자 올 초에 좌사간(정6품)이 된 신출내기 김중곤은 곧바로 탄핵 상소를 올렸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 격이다.

“염치는 신하로서 마땅히 힘쓸 바이며 탐오는 국법으로서 마땅히 징계할 바이옵니다. 비록 벼슬이 낮은 자로서 이를 범했을지라도 종신토록 흠이 되어 조정에 다시 들어설 수 없거늘 하물며 수상이며 대신이오리까? 영의정 황희는 일찍이 좌의정으로 있으면서 대체를 돌아보지 아니했고, 친한 사람에게 사사로운 정을 두어 태석균이 죄를 받을 때에 사헌부에 청탁하여 고신을 내어주기를 부탁했으니, 대신으로서 나라에 몸 바치는 뜻이 한 치도 없사옵니다.
전하께서 특별히 관대한 성은을 베풀어 파직만을 허락하시었으니 이는 황희의 큰 다행이옵니다. 아직 한 해도 지나지 않았는데 갑자기 백관의 윗머리에 두고 또 세자의 사부를 겸하게 하시었습니다. 황희는 거만스레 받고 뻔뻔스럽게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 정치를 의논하고 하늘의 뜻을 받들어 조정을 통솔하는 직책과 세자를 가르치는 임무에는 진실로 적당하지 못하옵니다.
엎드려 바라오니 전하께서는 그 벼슬을 파면하라 명하시어, 신민의 바라는 바에 맞게 하시옵소서.” 

세종은 김중곤을 질책하듯 말했다. 
“나는 너의 말에 숨김이 없음을 아름답게 여긴다.
그러나 네가 말하는 황희의 일은 의리로 끊을 수는 없다. 그리고 국가를 다스리는 대신을 어찌 작은 과실로 가볍게 끊을 것이야!
황희가 세자의 스승이 된 것은 예전부터 그리했는데 어찌 오늘에 이르러서 불가하다고 하느냐.”  

그리고 세종은 곧 도승지 안숭선을 불러 유시했다. 
“황희가 태석균의 고신에 서경하기를 청했으니 이는 진실로 의롭지 못하다. 지금 김중곤이 청하는 것이 옳다. 그러나 이미 의정부 대신이며 태종께서 신임하던 신하인데 어찌 이런 일로 영영 끊으리오.
임인년(세종 4) 황희를 소환하시던 날에 태종께서 내게 이르시기를, ‘양녕이 세자로 있을 적에 구종수의 무리들이 의탁하고 아부하여 불의한 일을 많이 행하게 하고, 양녕으로 하여금 길을 그릇 들게 했다.’ 하시고, 황희에게 의논하며 ‘어떻게 처리할까?’ 하고 물었더니, 황희가 아뢰기를 ‘세자가 연소하여서 사냥할 때 매와 개를 가지고 노는 정도에 불과합니다.’ 하므로, 그를 시기하는 사람들이 말하기를 ‘황희는 중립하여 일이 되어 가는 꼴을 보고만 있다.’고 하여 외방으로 내쳤는데, ‘이제 생각하면 황희는 실로 죄가 없다.’고 하셨다.
그 때 태종께서 말씀하시며 눈물을 흘리셨으니, 황희의 재주를 사랑하시고 아끼시기를 지극히 하셨다. 내가 어찌 신출내기 간관의 말에 따라 갑자기 끊을 수 있으랴! 경은 이런 뜻을 김중곤 등에게 상세히 말하라.” 

황희에 대한 대간들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임금이 직접 나서 설득한 것이다. 황희의 마음에 부담을 덜어주는 일이다.
안숭선은 흔쾌히 아뢰었다.
“태석균의 일은 진실로 황희의 과실이옵니다.
그러나 정사를 의논하는데 있어 깊이 살피고 멀리 생각하는 데는 황희와 같은 이가 없사옵니다.” 

도승지의 맞장구에 흥이 난 세종이 말했다. 
“경의 말이 옳다. 지금의 대신 중 황희와 같은 이가 없다.
전에 지나간 대신들로 말하자면, 하륜을 비롯한 박은과 이원 등은 모두 재물을 탐했다는 원성을 샀다. 하륜은 자기 욕심만 채우기에 급급한 신하였고, 박은은 그저 임금의 뜻을 맞추려는 신하였으며, 이원은 자신의 이익만을 탐하고 의(義)를 모르는 신하였다.
유정현 역시 출세와 재물을 쌓는 데는 그들보다 더 심한 신하였다.”

숭선이 또 응대하며 아뢰었다.
“참으로 하교와 같사옵니다.
당시 사대부들이 ‘하륜은 본래부터 아는 사람의 이름을 써서 주머니 속에 간직했다가 정방(政房)에 들어가서 뽑아 쓰되 빈자리가 혹 적으면 도로 집어넣었다가 뒷날에 또 이와 같이 했으며, 치사된 후에는 쪽지를 보내어 태종께 올리면 태종께서는 마음에 들지 않으시나 그래도 마지못해 좇으셨다.’고 하였습니다.”

세종이 ‘허허’ 웃으며 말했다.
“경의 말대로 그리했다.
태종께서 황희를 도승지로 삼고자 하여 하륜에게 의논하니, 하륜이 ‘황희는 간사한 소인이오니 신용할 수 없습니다.’고 비난했으나, 태종께서는 듣지 아니하시고 기어코 제수하셨다. 그 때부터 하륜과 황희는 서로 사이가 나빠서 매양 서로의 단점만을 말했다. 조말생은 하륜의 편인데, 하륜이 집정하자 조말생에게 집의를 제수하려 하니, 황희가 대사헌으로 있으면서 말생의 고신에 서경하지 아니했다.
하륜이 두 번이나 황희의 집에 가서 청했으나 황희가 끝내 듣지 아니했다. 그 후 하륜은 늘 ‘태종께서 황희를 도승지로 삼기를 의논하시기에 내가 헐어 말했더니, 황희가 이 말을 듣고 내 말을 이처럼 듣지 않는다.’고 불평했다. 그로인해 황희에게 있지 않는 과실이 사책(史冊)에 실려 있는 것을 내가 이미 보았다.
하륜은 참으로 속 좁은 위인이었다.”

세종은 황희의 모두 것을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이 말들은 황희가 권세를 탐하는 저들과 다르기 때문에 영의정에 제수했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그저 황희의 작은 허물들을 들쳐 내고 싶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황희는 그대로 있을 수 없었다. 

대간들의 탄핵을 받은 황희는 영의정에 제수된 지 7일 만에 사직 상소를 올렸다.
“신은 성품이 용렬하고 어두워서 재질이 쓰기에 적합하지 못하니 행실에 족히 취할 것이 없사옵니다.
다행히 성군을 만나 재상의 직임을 받았사오나 진실로 조금도 도움됨이 없고, 항상 나라 일을 그르치지나 않을까 하는 근심으로 날마다 조심하고 또 조심하였사옵니다. 천만다행으로 은택을 내리시어 어리석고 둔한 신을 널리 용서하시어 흠과 허물을 맑게 씻어 주시고, 재주 없다 아니하시고 국정을 조리하는 영의정에 뽑으시고, 세자를 인도하는 사부의 중임에 그대로 두셨사옵니다.
신은 본디 이를 바라는 마음이 없었고 남들도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줄을 기약했겠사옵니까? 명을 듣잡고 황송하여 몸 둘 바를 알지 못하겠나이다. 그윽이 생각하옵건대 신은 이미 물의를 일으켜 합당하지 못한데 벼슬이 신하로서 최고에 달하였사옵니다.
은총이 지나치면 재앙이 생기는 법이옵니다. 본디 중한 직임을 사직하여 신의 분수에 편안하고자 했사오나, 하늘같으신 어지심과 천둥소리 같으신 위엄으로 인하여, 기쁘고 두려움이 마음속에 얽히어 나아가고 물러날 때를 잃었습니다. 결단하여 처리하기에 과단치 못하여 지금까지 주저하고 있었사옵니다.
신의 재주와 행실이 국가에 도움이 없고 여러 사람의 안목에 거슬릴 뿐이옵니다. 이제는 노쇠하여 귀가 먹고 잊음이 많아서 듣고 살피기가 어려우며, 늙어 병이 자주 침노하니 행보가 심히 어렵사옵니다. 엎드려 바라오니 전하께서는 신의 쇠하고 늙음을 불쌍히 여기시고, 신의 지극한 정을 살피시어 한산한 곳으로 물리쳐, 신으로 하여금 길이 성상의 은택에 젖어 쇠약한 몸을 수양하게 하시옵소서.” 

세종은 주먹을 불끈지며 명했다.
“경은 이 나라의 동량이오.
속히 나와 직임을 다하시오.”

그러자 좌사간 김중곤은 다시 상소를 올렸다. 
“대신의 도리는 그 몸을 바르게 해야 만물이 따라 바르게 될 것인데, 어찌 자기의 이익을 위하여 마음을 쓰겠습니까? 황희는 특별한 성은을 입어 지위가 수상에 있으니 마땅히 그 마음을 다하여 성은의 만분의 일이라도 보답하기를 도모하여, 백관들로 하여금 한결같이 바르지 아니함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그런데도 이를 돌아보지 아니하고 사사로이 친한 사람에게 후하게 하여 태석균을 건지고자 했으니, 몸을 바르게 하지 못했으며 위를 속이고 사(私)를 행함이 드러났사옵니다. 비록 재주와 지혜의 능함이 있을지라도 어찌 조정의 표준이 되며, 세자의 스승이 되기에 마땅하오리까? 더구나 파직한 지 오래지 않아서 갑자기 백료의 수장으로 삼으시나이까? 이것이 신 등이 감히 말하고 능히 침묵을 지키지 못하는 까닭입니다.
원하오니 황희를 파면하시어 사대부의 풍습을 가다듬게 하시옵소서.” 

화가 난 세종은 더 이상 논하지 말라 하면서 상소를 탁자에 던졌다. 그러나 다음날 좌정언 채윤이 또다시 황희를 탄핵했다. 
“전일에 황희의 일을 두 번이나 청했는데, ‘의(義)를 끊을 신하가 아니므로 버리기가 실로 어렵다.’고 하교하셨습니다. 하오나 황희의 죄는 바로 의(義)를 끊은 사람에 해당하옵니다. 급히 파면하시기를 바라옵니다.” 

세종은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더는 듣지 않겠다. 그만 물러가라!”
세종은 이런 일들이 있을까봐 지난번 도승지에게 대간들을 설득하라 명한 것이다.
다음날 황희도 편전에 엎드려 사직을 청했다. 
“신은 재질이 쓰기에 적당하지 못하고 행실에 취할 만한 것이 없으며, 늙고 병들어 중한 직무를 감당하기 어렵사옵니다. 신의 벼슬을 파면하여 남은 생을 보전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세종은 웃으면서 말했다.
“영상!
과인이 경을 영상 자리에 두기 위해 얼마나 애썼는지 아시오? 더 이상 대간들의 탄핵은 개의치 마시오. 속히 직무에 임하시오.”

대간들의 상소를 물리칠 때와는 사뭇 다른 표정이다. 황희 역시 대간들의 상소로 인해 전하의 심기가 불편해지실까 염려하여 사직을 청한 것이다. 
황희는 더 이상 어명을 거역할 수 없었다. 
황희를 중심으로 한 조정은 완벽한 조화를 이루었다. 함께 한 좌의정 맹사성은 온유한 성품에 청렴하니, 황희와는 더없이 잘 어울리는 사람이다. 우의정 권진은 황희보다 6살이 많지만, 그 역시 원만하고 청렴하여 함께 뜻을 같이 할 수 있는 사람이다. 
세종은 의정부의 삼정승을 모두 청렴한 인물로 제수했다. 부정부패 없는 조정을 여망한 것이다. 그러니 의정부와 육조의 관계도 일찍이 볼 수 없는 협치의 시대가 이루어졌다. 중외의 정치 역시 그 어느 때보다 백성을 위해 소통하고 안정되었다.
지치(至治, 매우 잘 다스려진 정치)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임자년(세종 14) 3월 초이틀이다.
세종은 영의정 황희를 불러 말했다.
“함경도 경원성의 옮겨 쌓는 문제를 조정에서 논의한 지 이미 오래되었건만, 아직도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소.
어느 신료는 ‘정한 영토는 조종에게서 받은 것이니 비록 한 자 한 치라도 줄일 수 없습니다. 마땅히 굳게 지키고 옮기지 말아야 합니다.’고 말하고, 또 다른 신료는 ‘도읍을 옮기고 읍을 옮기는 것도 마땅히 백성들의 사정에 순응해야 합니다. 지금 경원의 땅은 본래 메말라서 경작하여 농사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아 온 고을 백성들이 한 면(面)만 경작하고, 나머지 삼 면은 적이 두려워 개간하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생계가 날로 어려워져서 백성들의 소망은 다 옛 경원과 용성 땅에 있습니다. 백성들의 가난하고 고통스러움이 이러하니 옮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고 말하고 있소. 
생각하건대 이 두 가지 논의는 모두 사리에 맞고 틀린 말이 아니니 결단을 내리기가 어렵소. 내 생각으로는 경원성을 용성으로 옮겨서 큰 진(陣)을 만들고, 유능한 장수로 하여금 굳게 지키게 하여 백성들을 나누어 살게 하면서 농사를 짓게 하고 싶소. 또 지금의 경원성 터에는 석성을 쌓아서 장수로 하여금 군사 2, 3백 명을 거느리고 성을 지켜서 적을 방어하게 하며, 적(여진족)이 출몰하는 길에는 봉수대를 쌓아서 좀도둑을 망보게 하고 싶소. 
그러면 이 두 논의에 대하여 거의 양쪽을 다 만족할 수 있다고 생각하오. 하지만 내가 눈으로 직접 볼 수 없으니 멀리서 헤아리기가 어렵소. 경이 직접 가 살펴보고 가부를 정한 뒤에 결단을 내리고자 하오. 함경도 도체찰사를 맡아 다녀오는 것이 어떻겠소?”

지난 병오년(세종 8)부터 논의하고 있는 경원의 축성 문제가 대신들의 나누어진 의견으로 매듭지어지지 않으니, 믿을 수 있는 황희를 보내고자 한 것이다. 
세종은 나이 70인 황희를 먼 북방의 함경도까지 다녀오게 하고 싶지 않았다. 지난날 하륜도 일흔의 나이에 함경도를 순찰하다가 불귀의 객이 되었다. 하지만 믿을 수 있는 사람이 황희뿐이니, 중요한 북방정책의 결단을 위해서 어려운 부탁을 한 것이다.

오기수 김포대 교수
오기수 김포대 교수

황희는 망설임 없이 가겠다고 아뢰었다. 
“전하! 신이 다녀오겠사옵니다.
하오나 신은 성품이 본래 얕고 노쇠와 병이 겹쳐서 일을 처리하는 데 어둡사옵니다. 더구나 국가의 억만년의 무궁한 계책을 신의 노쇠한 몸으로 홀로 결정하기가 어려울까 하옵니다. 청컨대 호조 판서 안순과 더불어 같이 가서 자세히 조사하여 정하게 하시옵소서.”  

세종은 그리하라 했다.
닷새 후 영의정 황희와 호조 판서 안순이 길을 떠나니, 임금이 직접 배웅하며 활과 화살을 하사하며 말했다. 
“영상!
먼 길 몸 조심히 다녀오세요. 호판은 영상을 잘 모시고 돌아와야 하오.”
세종은 어버이를 멀리 보내는 심정으로 황희를 배웅했다. 그러니 황희도 노구를 이끌고 주저 없이 그 먼 길을 나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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