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득주도성장의 핵심 목표는 경제적 불평등 해소
속도 조절 실패로 발생한 최저임금 과부하 현상
혁신성장과 공정경제 합한 포용적 성장으로 이행해야
새로운 경제패러다임에는 새로운 사회적 협약 있어야

“경제학자들은 빠른 경제성장 및 고소득을 달성하려면 경제발전 과정에 불평등을 감수해야 한다고 믿어왔다.”

아메리카대학 로버트 블레커 교수의 말이다. 지난달 29일 한국개발연구원(KDI)과 경제인문사회연구소가 <문재인 정부의 소득주도성장 정책 평가와 과제>라는 주제로 개최한 국제컨퍼런스에서다.

관(官) 주도 경제개발에 매진한 박정희 시대(자료:국가기록원)
관(官) 주도 경제개발에 매진한 박정희 시대(자료:국가기록원)

로버트 블레커 교수의 발언은 박정희 정권의 개발독재시대를 떠올리게 한다. 국가는 대기업을 경제성장의 발판으로 삼았고, 우리네 아버지, 할아버지들은 불평등이 뭔지도 모른 채 피땀 흘려가며 산업현장을 누볐다. 그래도 그때는 괜찮았다. 불평등보다는 일한 만큼 더 벌어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사실이 부각됐기 때문이다.

소득주도성장의 핵심은 불평등 개선

이제 시대가 변했다. 저개발국가의 산업구조가 2차, 3차 산업으로 옮겨가면 1차 산업이 위축되듯, 경제발전이라는 피라미드를 오를수록 각종 불평등에 대한 경제주체들의 불만은 고조된다. 신자유주의 경제시스템 하에서는 어떤 국가도 이런 불만을 피해갈 수 없다. 1960년대 이후 관(官)이 주도한 정책 덕에 경제적으로 기울어진 운동장이 돼버린 우리나라는 특히 더하다.

서구 선진국들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양한 정책적 실험을 펼쳐오고 있다. 스웨덴, 핀란드, 덴마크 등 스칸디나비아 제국들과 서유럽 제국들은 일찌감치 사회주의에 기초한 복지정책들을 도입했고, 스위스와 남미 일부 국가는 ‘기본소득’이라는 보다 전향적인 정책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해 기울이는 노력들 중, 신자유주의 경제시스템 하에서 시도되는 정책들이 있다. 소득주도성장, 혁신성장, 공정경제, 포용적 성장 등이 그런 것들이다. 그중 불평등이라는 의제와 가장 직접적으로 맞닿아 있는 정책이 바로 소득주도성장이다.

분수효과에 의한 소득주도성장 ⓒ스트레이트뉴스/그래픽:김현숙
분수효과에 의한 소득주도성장 ⓒ스트레이트뉴스/그래픽:김현숙

소득주도성장(Income-led Growth)이란, 저소득층의 가계소득을 인위적으로 높임으로써 분배의 불평등을 해소하는 동시에 성장을 구가하겠다는 정책이다. 기업 위주인 ‘이익주도성장’과 반대되는 개념이지만,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미국, 영국, 일본, 중국 등 적지 않은 국가들이 이미 도입한 바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문재인 정부 출범과 동시에 도입됐다. 그러나 정책 집행 1년이 지난 지금, 몇 가지 문제가 불거지면서 정책적인 속도 조절 및 방향 선회에 대한 요구가 높아지고 있다.

文정부의 소득주도성장, 무엇이 문제인가?

1년 전, 정부는 ‘국정운영 5개년 계획’을 발표하면서 경제정책 패러다임의 변화를 내세웠다. 혁신성장, 공정경제와 함께 소득주도성장이 핵심 정책 과제로 제시됐다.

소득주도성장의 세부 과제로는 ▲가계의 실질가처분소득 증대 유도(최저임금 인상, 주거비와 의료비 등 핵심 생계비 경감), ▲사회안전망 확충(기초생활보장제도 부양의무자 기준 완화, 근로장려세제 확대, 실업급여 확대, 기초연금 및 아동수당 인상) 등이 포함됐다. 모두 정책적 개입이 요구되는 과제들이다.

“소득주도성장의 정책 개입은 1차 분배(소득)와 2차 분배(가처분소득)가 동시에 이루어져야 한다. 1차 분배의 경우, 기업-노동(임금) 간 분배뿐 아니라 기업-기업(대기업, 중소기업, 자영업) 간 분배와 노동-노동(정규직, 비정규직) 간 분배도 중요하다. 2차 분배의 경우, 사회보장이 핵심이다.”

국제노동기구(ILO)가 각종 보고서에서 소득주도성장의 정책적 개입 필요성에 대해 명시한 문구다. 소득주도성장 정책이 성공하려면 정부가 정한 세부 과제는 물론이고, 1차 분배와 2차 분배가 함께 굴러가야 한다는 뜻이다.

국무회의를 주재 중인 문재인 대통령(자료:청와대)
수보회의를 주재 중인 문재인 대통령(자료:청와대)

그러나 지난 1년 동안 1차 분배(소득)는 기업-노동 간 분배, 즉 최저임금 16.4% 인상에만 국한됐을 뿐, 대기업, 중소기업, 자영업 간 분배는 고려되지 않았다. 다른 과제들 역시 지지부진한 이행 속도를 보였다. 그중 근로장려세제, 실업급여, 기초연금 등 가장 시급한 정책 세 가지만 살펴보자.

① 근로장려세제(EITC) 확대

근로장려세제(EITC)는 근로빈곤층에 세금 환급 형태로 소득을 지원하는 제도다. 최저임금이 인상된 데 따른 부담을 일정 부분 흡수할 수 있는 정책이다. 당장 EITC 지출 규모를 4,300억 원 이상 늘릴 경우, 연평균 95,000명의 추가 고용 효과를 거둘 수 있다(한국경제연구원).

현행 연평균 지급액은 가구당 73만 원으로 영국(1,131만 원)이나 미국(298만 원)에 훨씬 못 미친다. 저소득층의 소득 수준을 끌어올려 새로운 수요를 창출하려면 EITC 지원금과 대상을 대폭 늘려야 하지만, 확대 방안은 내년도 예산안과 세제개편안에나 반영될 전망이다.

② 실업급여 확대

실업급여는 근로 빈곤층이 실업자가 된 후 적극적인 구직활동에 나설 경우 현금을 지원하는 실업부조제도다. 정부는 2020년부터 실업급여를 확대하겠다고 했지만, 아직도 구체적인 이행방안은 제시되지 않은 상태다.

③ 기초연금 인상

기초연금 인상 역시 소득주도성장 정책에 반드시 필요한 보완정책이지만, 올 9월에나 실시될 계획이다.

정부가 내세운 세부 과제 중 최저임금 인상을 제외한 대부분의 세부 과제와 2차 분배가 지지부진한 상황이다. 이럴 경우 최저임금이 의도한 효과는커녕, 최저임금 과부하(over-burdening) 현상이 나타날 수 있다. 실제로 소상공인연합회를 비롯, 자영업자들을 중심으로 이미 과부하 현상이 현실화하고 있다.

만약 정부가 2019년도 최저임금 인상 이전에 ‘카드수수료 할인’이나 ‘프랜차이즈 비용 경감’이라는 기업-기업(대기업-자영업) 간 1차 분배에 성공했더라면 자영업자들에 의한 최저임금 과부하 현상은 어느 정도 줄일 수 있었을 것이다.

2019년 최저임금에 반대하는 소상공인연합회 회원들(자료:뉴시스)
2019년 최저임금에 반대하는 소상공인연합회 회원들(자료:뉴시스)

소득주도성장이라는 아이디어의 고향은 어디일까? 시장개입주의자인 존 메이너드 케인즈(John Maynard Keynes)의 “임금을 인하하면 유효 수요가 줄어들어서 고용이 감소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결국 소득주도성장이 노리는 것은 불평등을 줄이고 소득을 안정화시켜 총수요를 유지 또는 성장시키는 것이다.

文정부 1기 경제팀이 놓친 지점이 바로 여기다. 총수요를 유지, 성장시키기 위해 소득주도성장으로 경제 패러다임을 바꿨음에도, 2차 분배인 사회보장은커녕 1차 분배 중에서도 기업-노동 간 분배인 최저임금에만 몰두해 다른 보완정책들과의 속도 조절에 실패한 것 말이다.

영세 자영업자 비중이 높고 사회안전망과 복지가 미흡한 한국 특유의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 추진된 소득주도성장, 1년이 지난 지금 “최저임금 인상을 통해 소득 분배율의 추세적 하락은 저지했다”는 평가에 머물러 있다. 총수요를 유지, 확대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포용적 성장으로의 이행

“신임 윤종원 경제수석은 소득주도성장과 혁신성장, 공정경제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포용적 성장과 같은 개념이라는 소신을 가진 분이다.”

임종석 대통령 비서실장이 지난달 26일 교체된 경제수석에 대해 덧붙인 설명이다.

이튿날, 중견기업간담회에 참석한 홍영표 민주당 원내대표도 “소득주도성장은 유럽과 미국 등지에서도 일자리가 늘지 않고 빈부격차가 심해지면서 도입한 경제정책 중 하나다. 그동안의 문제의식을 토대로 포용적 성장으로 가야 한다”고 했다.

김동연 경제부총리 역시 한 국제컨퍼런스에서 “포용적 성장은 소득주도성장과 혁신성장을 합한 말의 또 다른 표현”이라며 거들고 나섰다. 모두 포용적 성장에 대한 얘기들이다.

포용적 성장이란, 분배 불평등과 같은 시장경제의 부작용에 정부가 개입해 임금 인상뿐 아니라 소득 재분배, 사회안전망 확충, 복지 확대 등의 정책으로 불평등을 완화하고 균등한 경제활동 참여 기회를 갖게 하면, 그것이 경제성장으로 이어진다는 이론이다.

ⓒ스트레이트뉴스/디자인:김현숙
ⓒ스트레이트뉴스/디자인:김현숙

세계은행(World Bank)이 2009년 처음 제시했고, 국제통화기금(IMF)과 세계경제포럼(WEF)이 2011년, 2015년, 2017년에 주요 의제로 채택했으며, 2016년 미국의 백악관 대통령 보고서에서도 다뤄진 바 있다.

임종석 비서실장이 말한 것처럼, 포용적 성장은 지금까지 살펴본 여타 보완정책들을 포괄하고 文정부 경제정책의 세 가지 축인 소득주도성장, 혁신성장, 공정경제를 아우른다. 그런 면에서 노동과 일자리 부문에 치중하는 소득주도성장과는 결이 다르다. 소득주도성장 정책이 몇 가지 문제를 노출한 후에 정부의 경제정책을 한마디로 압축하는 용어가 등장한 것이다.

새로운 사회적 협약으로 가는 길

그렇다면 소득주도성장에서 포용적 성장으로 바꾸지 않을 이유가 없다. 이는 최저임금 인상으로 대변되는 소득주도성장의 첫 단추는 꿰었으니, 이제는 여타 보완정책 추진에 박차를 가하고, 혁신성장과 공정경제 로드맵도 서둘러 설계해 서로 맞물려 돌아갈 수 있도록 집행해야 한다는 의미다.

그러나 말처럼 쉽지 않다. 주거비와 의료비 등 핵심 생계비를 경감하는 정책에 사회적 저항이 없을 수 없다. 기초연금과 아동수당을 인상하는 정책도 마찬가지다. 최저임금은 겨우 인상 기조를 유지했지만, 기업-기업 간 분배, 즉 대기업, 중소기업, 자영업 간의 분배율 조정은 험난한 가시밭길이다. 노동-노동 간 분배, 즉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 분배는 또 어떻게 접근할 텐가?

시선을 사회보장 확대와 혁신성장, 공정경제로 옮기면 더 난감하다. 보편복지와 선별복지의 한판 대결이 재연될 수 있다. 규제개혁을 두고 노사 간, 보혁 간 대립이 첨예화할 수도 있고, 공정한 경제를 위한 재벌 대기업 적폐청산이 자칫 투자 위축에 따른 고용 감소로 이어질 수도 있다. 포용적 성장의 앞길은 가히 첩첩산중이다.

ⓒ스트레이트뉴스/그래픽:김현숙
ⓒ스트레이트뉴스/그래픽:김현숙

하지만 우리 경제는 이미 경제발전의 피라미드 상층부에 위치해 있다. 아래로 후퇴할 수는 없다. 모호했던 소득주도성장-혁신성장 간 관계 및 소득주도성장-공정경제 간 관계는 포용적 성장 아래에서 치밀하고 단단하게 재정립돼야 한다. 소득주도성장의 발목을 잡아끌었던 소극적 재정정책도 큰 그림에 따른 대국민 설득과 함께 확장적 재정정책으로 바꿔내야 한다.

‘이익주도성장’에서 ‘소득주도성장’으로 눈을 돌린 이상, 다시 말해서 성장 위주의 경제정책에서 분배 위주의 경제정책으로 이행해 온 이상,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다양한 경제주체들 간의 이해를 조정해 타협을 이뤄내야 한다. 한국경제를 시대를 관통하는 ‘새로운 사회적 협약(new social contract)’ 위에 올려놓아야 한다.

대통령과 여당의 지지율이 고공행진을 거듭 중인 지금이 적기다. 이 시기를 놓치면 새로운 경제정책의 운명 앞에 총선이 버티고 설 것이다. 소득주도성장과 혁신성장, 공정경제의 결합을 치밀하고 단단하게 설계해 집행할 시간이 채 1년도 남지 않았다. 시간은 여전히 경제적 불평등의 주역인 ‘이익주도성장’ 편에 서 있다.
김태현bizlink@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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