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초기 오직 백성을 위해 평생을 가시고기 같은 삶을 살고 간 방촌 황희. 황희는 세종대왕과 함께 무려 18년간 영의정으로 재임하며 오직 백성들의 아픔과 더 나은 삶을 위해 일하며 세종과 함께 백성을 위한 정치에 날실과 씨실이 되어 지치(至治)의 시대를 이룩한 인물이다. 스트레이트뉴스는 세종과 함께 청렴함과 바른 정치로 백성을 위한 새로운 지치의 시대를 이룩한 황희의 삶을 지금 이 시대에 투영해 보고자 오기수 김포대학교 교수(경영관광학부)가 집필한 역사소설 「백성의 臣(신) 황희」를 13회에 걸쳐 연재한다.

반구정

세종은 을축년(세종 27) 정월 스무나흘에 승진 인사를 발표했다. 
신개를 좌의정에, 하연을 우의정에, 황보인을 좌찬성 겸 판이조사에, 권제를 우찬성에, 이숙치를 좌참찬에 그리고 정인지를 우참찬에 제수했다.
이들 중 좌의정 신개는 황희와 맞서 공법을 입법하는데 수훈을 세우고 전분5등법을 제안했으며, 하연은 군현별 연분9등법을 창안한 장본인이다. 그리고 정인지는 공법의 모든 실무를 처음부터 끝까지 도운 전하의 수족이었다. 나머지 대신들도 공법을 만드는데 기여한 자들이다.
세종은 그들을 승차시켜 노고를 치하한 것이다. 공법에 대한 전하의 마음을 알 수 있다.
초여름이다.
계해년(세종 25) 말에 ?훈민정음?을 창제하고 지난해 말에 공법을 완성하고 나니, 세종은 그야말로 몸의 진기가 다 빠져 기력이 쇠해졌다.
그 얼마나 힘든 일이었던가!
백약이 무효다.
허탈한 느낌마저 들었다.
세종은 영의정 황희·우의정 하연·예조 판서 김종서·좌참찬 이숙치·우참찬 정인지 등을 불러 말했다.
“몇 년 전 내가 세자에게 선위하고 한가롭게 있으면서 병을 수양하고자 하였더니 경들이 울면서 청하니 억지로 그대로 따랐다. 하지만 되풀이 생각해도 자질구레한 여러 일들을 모두 내가 친히 처결하면 반드시 다른 병이 도질 것만 같아 심히 염려된다. 지금도 세자에게 섭행하게 하여 작은 일들은 처리하고 있다.
이제부터는 군사의 중한 일 외의 일체 서무는 세자로 하여금 대신 다스리게 하고자 한다.”
세종은 옛날 부왕 태종처럼 병권만 가지고 세자에게 모든 국사를 맡기겠다고 말했다. 
황희는 즉시 반대했다.
“전하, 아니 되옵니다.
이는 비록 내선(內禪)은 아니오나 정사가 두 곳에서 나오면 후세에 어떻게 여기오리까?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세종은 정말 쉬고 싶었다. 다시 유시했다. 
“경 등은 나의 병을 잘 알지 못하고 이처럼 굳이 청하나 근래에 눈이 어둡고 기운이 몹시 쇠하다. 만약 약한 몸을 억지로 일으켜서 친히 서무를 재결하면 반드시 오래 살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한가롭게 몸을 수양하고 한두 해 동안이라도 목숨을 연장하여 세상에 살아 있다면 어찌 다행하지 않겠느냐!
대체로 새로 세우는 법령과 사람을 쓰고 군사를 조정하는 등의 큰일은 내가 직접 다스리겠으나 그 나머지의 서무는 세자로 하여금 대신 다스리게 하고자 한다.
이것은 내 몸을 보호하기 위해 급히 서두른 것이다. 경 등은 어찌하여 내 병을 헤아리지 아니하고 억지로 말하는가!” 
황희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늙은 자신보다 더 기력이 쇠하신 전하께서 수양하여 한두 해를 더 사시겠다고 하시니 눈물이 날 지경이다. 
‘오죽하면 전하께서 저리 애원하시겠는가!’
황희는 애써 눈물을 삼키며 아뢰었다. 
“전하!
우선 상지(上旨)에 의하여 시행하옵소서.”
상지(上旨)는 특별한 형식을 갖추지 않고 구두로 내린 명령이다. 법적 효력을 갖는 문서에 의한 명령인 교지(敎旨)와는 차이가 있다. 황희는 병환이 완쾌될 때까지 임시적으로 세자에게 정사를 맡기라 청한 것이다.
어찌 전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겠는가? 
왕좌만 보전케 하는 일만이 충신의 도리는 아닐 것이다. 황희는 자신이 전하를 잘 보좌하지 못하여 병환이 깊어진 것이라고 자책하고 있다.
동병상련(同病相憐)이었을까!
세종은 그런 황희를 또한 가엽게 여겼다. 
무더위로 기력이 쇠한 황희를 보고 의정부에 전교했다. 
“영의정 황희는 나이 80이 넘었는데 의정부의 일로 번거로워 정신을 편히 하여 수양할 겨를이 없을까 염려된다.
금후로는 전지(傳旨)로써 의논하게 한 업무와 의정부의 합좌일(合坐日) 외의 일상으로 행하는 서무는 번거롭게 맡기지 말도록 하라.” 
세종은 기미년(세종 21)부터는 황희의 거동이 불편하다 하여 매달 대조회 이외의 상참에는 참석하지 말도록 했다. 이제부터는 아주 중요한 국사 이외는 황희의 집에 사람을 보내어 의견을 듣도록 했다.

해가 바뀌어 병인년(세종 28) 3월 스물사흘이다.
왕비 소헌왕후가 수양대군 집에서 춘추 52세로 훙서하였다. 
황희를 비롯한 문무백관들이 소복차림으로 빈전(殯殿)에 들어 곡하고 임금을 위로했다. 
세종은 하염없이 눈물을 닦았다.
소헌왕후는 열세 살인 무자년(태종 8)에 가례를 올리고 경숙옹주에 봉해졌다. 슬하에 8남 2녀를 두었으며 무술년(태종 18) 4월에 전하(충녕)께서 왕세자에 오르자 경빈에 진봉되었다. 세종이 즉위한 후 공비(恭妃)로 승봉되었다가 임자년(세종 14)에 왕비로 개봉되었다.
소헌왕후의 부친은 심온이다. 심온은 세종이 즉위하자마자 유정현 등 일충파의 모략에 의해 역적으로 몰려 자진(自盡)했다. 그 때 모친을 비롯한 형제들은 모두 천인이 되었다. 친정은 그야말로 쑥대밭이 되어버렸다. 그나마 황희가 영의정이 되어서야 친정의 모친과 형제들이 면천되었다.
그리 28년간의 모진 세월을 보냈다. 
소헌왕후가 승하하고 나흘 후에 세종은 도승지를 불러 황희에게 고기를 먹도록 명했다. 그 순간에도 늙은 황희를 생각한 것이다. 
황희는 어전에 들어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아뢰었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하오나 전하께서 상기(服期)가 끝나지 않았는데 늙은 신하들에게 고기를 먹으라 명하시지만, 신 등이 어찌 차마 먹겠습니까? 청하옵건데 성상의 상기가 다하기를 기다리게 하시옵소서.” 
하지만 세종은 물기어린 애잔한 목소리로 다시 고기 먹기를 명했다. 
“영상!
《예기》에 ‘70세에는 상복(喪服)이 몸에 있다.’는 글이 있고, 또 ‘50세 된 사람은 고기가 아니면 배부르지 않다.’고 하였소. 어찌 나의 상기가 다할 날을 기다리겠는가?
공은 더 말하지 마시오.”
지엄한 어명이다. 
할 수 없이 황희는 눈물을 흘리며 고기를 먹었다. 세종은 황희를 어버이 같이 생각한 것이다.
소헌왕후가 승하하고 석 달이 지나니 한 여름이 되었다. 전하께서는 왕비가 승하하신 후 자리보전이 잦으셨다. 하지만 나라의 큰일들은 손수 챙기셨다.
집현전 직제학 이계전이 상소를 올렸다. 
“신 등은 생각하옵건대, 국초부터 시행한 답험법이 어질지 못한 관리들의 사사로움에 따라 경하고 중하게 할 수 있어 오랜 동안 큰 폐단이 되어 왔으므로 공법을 세우셨사옵니다.
신 등은 처음에 이 공법을 보고 아름다운 법이라 생각했사옵니다. 하지만 시험한 지 수년 동안 백성들의 원망과 탄식이 날로 깊어지니, 아마도 백성을 편하게 하는 좋은 법은 아니라고 여기옵니다. 공법을 폐하시고 조정의 법에 따르시옵소서. 좁은 소견을 가지고 성상의 귀를 번거롭게 하오나 엎드려 바라옵건대 채택하시옵소서.”
새 공법이 제정된 지 2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반대하는 자들이 있었다. 
세종은 이계전 등을 불러 친히 유시했다. 
“근래 몸에 병이 나 오래 동안 접견하지 못했으니, 나의 깊은 마음을 자세히 알지 못할 것이다. 지금 상소하여 공법의 폐단을 논한 것도 나의 입법한 본의를 알지 못하는 것이다. 내가 즉위한 이래로 입법한 것이 많은데 밝지 못한 소치로 그 법들이 종말에 반드시 폐단이 있는 것을 잘 살피지 못했다. 입법할 때에 만일 그 종말을 미리 헤아려서 처리했다면 잘못되지 않았을 것이다.
답험법은 우리나라에서 시작한 것이 아니라 실은 고려에서 행한 법인데 우리 태조께서 계승하여 행했다. 처음 답험법을 행하던 때는 백성들이 대단히 편하게 여기었고, 나도 어렸을 때에는 역시 좋은 제도라 여겼는데 오래되매 그 폐해가 점점 심해졌다.
이에 말하는 자가 많아 공법의 의논이 비로소 일어난 것이다. 그러나 내가 곧 시행하지는 않았는데 그 뒤에 신개가 건의하여 공법을 행하고자 했다.
공법은 결단코 시행해야 할 법이다.”
세종은 공법의 입법 목적을 다시 한 번 효유했다. 공법에 대한 확신이다.
이계전은 정미년(세종 9)의 과거에 급제한 후 지금까지 20년 이상을 집현전에서 잔뼈가 굳은 신료이다. 그런데도 그는 아직도 공법에 대해 전하의 뜻을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정인지에게 말했다. 
“경이 중시(重試)를 보던 해에 문제를 내어 책문에 답하였고 또 경이 충청 관찰사로 있을 때에 글을 올려 청했으므로, 내가 드디어 뜻을 결단하여 공법을 행한 것이다.
지금은 거의 10년이 되었는데 그 효과를 아직도 보지 못하고 이해에 대한 말이 분분하다. 나의 본의는 많이 거두자는 것이 아니었다. 오직 답험법이 사사로움에 따라 조세가 경하고 중하게 되어 말류의 폐단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일어난 것을 염려했기 때문에 공법을 행하고자 한 것이다.
내가 만일 곧 잊어버려서 덮어두고 시행하지 않으면 나의 병든 몸에도 좋겠다. 다만 예전 사람이 ‘몸이 수고로움을 당하여[身當其勞(신당기노)], 편안한 것을 뒷사람에게 물려준다[以逸遺後(이일유후)].’고 했으니, 이것이 내가 공법을 만든 까닭이다.”
어느 임금이 이리 백성을 위한단 말인가!
‘身當其勞(신당기노) 以逸遺後(이일유후)…….’
그런데도 이계전이 다시 아뢰었다. 
“백성들의 근심과 탄식이 이루 말할 수 없사옵니다.
공법은 결코 행할 수 없을 것이옵니다.”
세종은 물리치며 말했다. 
“내가 어찌 많이 거두기 위하여 공법을 행하는 것인가!
아직 전분6등과 연분9등의 새 공법은 하삼도의 한 도에 두 군현씩 시험하고 있을 뿐이다. 너희 같은 집현전의 선비도 내 뜻을 알지 못하니 하물며 세상 사람들이겠는가! 공법을 입법한 본의를 좀 더 알고 더 이상 거론하지 말라.”
그러자 도승지 황주성이 거들며 아뢰었다. 
“집현전에서 말한 것은 참으로 옳으나 이미 시행했으니 행하는 것이 가합니다.” 
황주성은 아비 황희와는 달리 공법에 대해 호의적이다. 주성은 올 4월에 도승지(정3품)에 제수되었다. 
세종은 아직도 공법에 대한 의지가 사그라들지 않은 것이다. 공법 이야기만 나오면 의기가 충천할 정도이다. 화수분처럼 없던 힘도 생겼다.
겨울이 되자 도성에는 8도의 굶주린 유민들이 모여 들었다. 지난 계해년(세종 25)부터 올봄까지 3년간 전국적으로 가뭄이 계속되니 떠도는 백성들이 길거리에 넘쳐났다. 
여기저기 곡식이 귀해졌다. 
지난해에 면포 1필로 쌀 3말 7되를 살 수 있었는데 지금은 3말밖에 살 수 없다. 가뭄이 심하기 전에는 면포 1필로 쌀 4말 3되를 샀었다. 
황희 집 앞에도 걸인들이 문전성시였다. ‘황희 정승 집에 가면 굶주린 사람들에게 구휼미를 준다.’는 소문이 날 정도였다.
황희는 집안에 있는 모든 곡식을 내어 구제에 힘썼다. 그러니 과전에서 조금 거두고 녹봉으로 받은 곡식은 이미 동이 났다. 봄에 받은 녹봉은 이미 떨어지고 여름에 받을 녹봉은 아직 받지도 못했다. 가뭄이 심하니 나라에서 관리들의 녹봉을 제때에 주지 못한 것이다.
이제 황희도 끼니를 걱정하게 되었다. 이리 산 것이 이미 한 두 해가 아니다. 그러니 황희도 흉년이 들면 가난한 백성들과 같이 끼니를 걱정해야 했다.

그리, 그리, 모진 세월을 흘러 무진년(세종 30) 3월 말이 되었다.
영의정 황희의 아내 정경부인 청주 양씨가 죽었다. 첫째 부인 최씨가 시집온 지 8년(우왕 12) 만에 젊은 나이로 죽자 황희는 2년 후에 양씨 부인을 다시 맞아들였다. 부인은 고려의 승상 양기(楊起)의 손녀이며 공조 전서(典書, 정3품) 양진의 딸이었다. 60여년을 함께 살면서 한 번도 황희의 뜻을 거스른 적 없는 부인이었다. 부인도 황희만큼 모진 세월을 보냈다.
세종은 부의로 관곽과 쌀과 콩 30석, 종이 90권, 석회 50석을 내려 주었다. 
부인이 죽자 황희는 한동안 기력을 찾지 못했다. 오랜 세월 동안 부부의 정이 깊은 것이다. 
한 여름이다. 
여느 때보다 경복궁 내원의 매미 소리가 요란스럽고 시끄럽게 울어대었다.
세종은 도승지 이사철을 불러 명했다.
“예전에는 문소전(文昭殿, 태조와 신의왕후 위패를 모신 사당)이 창덕궁 안쪽 담 밖에 있었고, 문소전 담 동쪽에 한 간의 불당이 있어 일곱 승려가 지켰다.

오기수 김포대 교수
오기수 김포대 교수

그런데 내가 계축년(세종 15)에 옮겨 봉안할 때에 파괴하고 지금까지 회복하지 못했다. 나라에서 일찍이 불씨를 끊어 버리지 않았다면 이 불당을 가장 먼저 돌보아야 했을 것인데, 폐하여 걷어치우고 돌아보지 않으니 마음이 편하지 않다. 어진 효자의 마음으로 헤아려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이제 문소전 서북쪽 빈 땅에 한 간의 불당을 짓고 다시 일곱 승려로 지키게 하려 한다. 그 건물은 본채가 한 간이고 동서의 낭사는 각각 세 간이며 부엌도 세 간으로 할 뿐이다.
근일에 이 뜻으로 두 의정에게 말했더니 모두 불가하다고 했으며 궁궐 안에 있는 것은 더욱 불가하다고 했다. 그러나 불당 옛터가 창덕궁 안쪽 담 밖에 있었고 문소전 역시 내성 밖에 있었으니 불가한 것은 보지 못하겠다.
흥천사 등의 절이 혹 비가 새거나 기울어져 위태하게 되면 국가에서 반드시 장인(匠人)을 시켜서 고치게 하는 것은 조종이 세운 것이기 때문이다. 의리상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설령 퇴락한 것을 가만히 보고만 있고 중수하지 않는 것이 옳다고 하더라도, 나는 차마 그렇게 못하겠다. 지금 이 불당이 다른 절에 비하면 그 뜻이 더욱 애절한데 철폐한 지 여러 해가 되었으니, 마음에 부끄럽기가 이보다 더 심할 수가 없다. 수리하지 않는 것도 부끄러운데 하물며 철폐하겠는가?” 
문소전은 태조와 신의왕후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고, 그 불당은 태종이 태조를 위하여 창건한 절이었다. 그런데 세종은 계축년에 문소전을 원묘(原廟)로 옮기면서 그곳에 있던 불당을 철거하도록 했으며, 불상과 잡물들은 모두 흥천사로 옮기게 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세종은 불당을 궁내에 다시 지으라 명한 것이다. 부왕 태종이 세운 절을 자신이 헐었으니 다시 복원하여 죽기 전에 조종(祖宗)에 대한 도리를 다하고 싶었다. 
다음날이 되자 조정은 이 일로 온통 들끓었다. 의정부와 육조 및 사헌부와 사간원, 그리고 집현전까지 일제히 불당의 설치를 반대하고 나섰다. 특히 갑진년(세종 6) 불교 개혁에 앞장선 좌의정 하연은 더 강하게 반대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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