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노컬쳐에 길들여진 베네수엘라 국민들
경제파탄의 원인을 하나로 묶기는 어려워
전혀 다른 한국과 베네수엘라의 산업구조
소득주도성장과 포퓰리즘 동일시는 정치공세

가채 매장량이 사우디아라비아보다 많은 5,000억 배럴(미 국립지질조사국)에 이르고, 단위면적 당 원유 매장량은 세계 1위를 자랑하는 나라, 땅 밑에 넘쳐나는 원유 때문에 수시로 유증기를 빼주지 않으면 마을 한가운데서 느닷없는 폭발이 일어나는 나라, 한때 오일 머니로 중남미를 호령했던 자원부국 베네수엘라가 망하고 있다.

이를 두고 보수 진영 일각에서는 인기영합주의 경제정책(포퓰리즘)의 결과라며 문재인 정부의 경제정책, 특히 소득주도성장과 연결시키면서 우려의 시선을 보낸다. 스트레이트뉴스는 베네수엘라 경제파탄의 원인이 포퓰리즘이라는 주장의 진위를 가리기 위해 베네수엘라 경제가 걸어온 발자취를 추적해본다.<편집자주>

<목차>
① 외환거래 중단... 차베스 실책이 파탄 불렀다
② 잇단 실정에 지옥문 열린 국가경제
③ 소득주도성장으로 망한다는 거짓말

교재와 분필이 없어 학교는 텅 비었고, 산소통 없는 구급차에서 환자가 속수무책으로 사망하는 나라, 비둘기와 길고양이, 유기견도 모자라 썩은 육류를 사먹고 야채를 찾기 위해 쓰레기장을 뒤지는 나라, 두루마리 휴지를 사려면 휴지보다 더 많은 돈다발을 지고가야 하는 나라, 국민 240만여 명이 국경을 넘었고 지금도 ‘엑소더스’가 계속되는 나라, 중남미 석유부국 베네수엘라 얘기다.

사람을 피해 도망가는 굶주린 개(자료:CNN)
사람을 피해 도망가는 굶주린 개(자료:CNN)

이를 두고 보수 진영에서는 베네수엘라 경제가 무상복지 등 포퓰리즘 때문에 망했다며 문재인 정부의 소득주도성장과 연계시킨다. ‘베네수엘라의 좌파 진보적 사고 = 소득보전 등 분배정책 = 한국의 소득주도성장 = 포퓰리즘 = 한국경제 파탄’이라는 식이다. 이 논리를 위해 보수 진영이 최일선에 배치한 무기는 ‘최저임금’이다.

맞는 말일까, 정치공세일까? 부분적으로는 맞지만, 등식 전체가 옳다고 보기는 어렵다. 경제파탄의 직간접적인 원인들을 세분하지 않고 그저 ‘포퓰리즘’ 한 단어로 뭉뚱그렸기 때문이다.

포퓰리즘 아닌 모노컬쳐(monoculture)에 길들여진 국민들

베네수엘라 경제파탄을 포퓰리즘 및 한국의 소득주도성장과 연결시키는 사람들은 ‘포퓰리즘에 길들여진 국민들’이라는 말을 서슴지 않는다.

“포퓰리즘 정책으로는 안 된다. 석유 부국이다 보니 막 퍼주는 정책을 시행했고, 그래서 국민정신 자체가 포퓰리즘에 길들여졌다. 문재인 정부는 헛발질 정책만 하고 있다.”

“베네수엘라 경제위기는 좌파 진보적 사고를 가진 정치인들이 분배에만 초점을 맞추다가 발생한 것이다. (중략) 소득주도성장은 폐기해야 한다.”

자유한국당 심재철 의원과 민주평화당 장병완 의원의 발언이다. 그러나 베네수엘라의 역사를 조금만이라도 살펴봤다면 국민을 게으름뱅이 취급하는 이런 발언은 나올 수 없다.

스페인 사업가 소유인 카라탈(옛 지명은 엘 칼라오) 금광에서 일하는 베네수엘라 광부들(1875)(자료:earlylatinamerica)
스페인 사업가 소유인 카라탈(옛 지명은 엘 칼라오) 금광에서 일하는 베네수엘라 광부들(1875)(자료:earlylatinamerica)

16세기, 베네수엘라를 점령한 스페인 사업가들은 노예들과 현지인들을 동원해 사탕수수와 커피를 경작하고 금광을 개발했을 뿐, 현지인을 위한 산업에는 무관심했다. 19세기 초에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했지만, 베네수엘라 국민들은 3세기 동안 계속된 기형적 모노컬쳐(monoculture) 산업・경제구조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사탕수수와 커피, 금광이 과거 산업의 대표 주자였고 감독자가 스페인이었다면, 지금은 그 자리를 석유와 미국이 대신하고 있다. 미국 사업가들 역시 독립 직후 베네수엘라의 석유를 장악한 뒤 잇속만 챙겼을 뿐, 현지인을 위한 산업은 도외시했다.

1970년대에 불어 닥친 두 차례의 오일쇼크에 놀란 베네수엘라 정부는 1976년 석유 국유화 조치를 단행했다. 그럼에도 미국은 최대 수입국으로써 여전히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산업・경제의 체질이 식민지 시절이나 그 이후나 똑같았던 것이다.

따라서 ‘포퓰리즘에 길들여진 국민’이라는 말은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비난이자 무책임한 국민성 비하이고, 어떻게든 소득주도성장과 꿰맞춰보려는 억지주장에 불과하다.

베네수엘라 경제파탄의 변곡점들

거대한 파산의 직접적인 배경은 총수출의 96%를 원유 수출에 의존하며 ‘자원 부국’이라는 천혜의 혜택에 안주했다는 것이다.

한때는 곡물 잉여생산국이었지만, 지천에 널린 석유 덕에 농사는 뒷전이었다. 1, 2, 3차 산업을 고루 발전시킬 이유도 없었다. 돈이 필요하면 앞마당에서 퍼 올린 석유를 미국에 내다팔고, 먹거리나 의약품, 생필품은 미국에서 수입하면 그만이었다.

우고 차베스 정권이 들어선 1998년 이후에도 평화는 계속됐다. 그러나 차베스 전 대통령은 두 가지 난제를 잊지 않고 있었다. 하나는 미국에 심하게 종속된 산업구조였고, 또 하나는 오일쇼크 여파로 1980년대에 찾아온 외환위기였다.

미국의 베네수엘라산 원유 및 석유화학제품 수입 현황(1990~2018)(자료:미 에너지정보청) ⓒ스트레이트뉴스/디자인:김현숙
미국의 베네수엘라산 원유 및 석유화학제품 수입 현황(1990~2018)(자료:미 에너지정보청) ⓒ스트레이트뉴스/디자인:김현숙

차베스 정권은 먼저 미국에 종속된 산업구조를 바꾸기 위해 반미노선을 분명히 했다. 그러자 미국은 석유 수입량을 2013년 80%까지 지속적으로 줄이는 경제제재조치를 취해가며 차베스 정권을 괴롭혔다.

그럼에도 차베스 전 대통령은 보건 복지뿐 아니라, 인프라 건설, 교육, 자동차산업 육성에 투자하고 서비스산업을 키우는 등 산업구조 개편을 위해 노력했다. 비록 산업구조 개편작업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차베스 정권 13년 동안 베네수엘라의 국민총생산(GDP)은 오히려 이전 정권보다 3.5배가량 증가했다.

유엔총회장에서 엇갈리는 베네수엘라 차베스 대통령과 미국 부시 대통령(자료:miamiherald)
유엔총회장에서 엇갈리는 베네수엘라 차베스 대통령과 미국 부시 대통령(자료:miamiherald)

또한 차베스 정권은 외환위기로부터 자유로워지고자 했다. 그러려면 충분한 외환을 보유해야 했다. 2003년, 차베스 전 대통령은 외화가 미국으로 빠져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외환거래를 중단하고, 고정환율제와 이중환율제를 도입했다. 하지만 이는 파탄의 서막이었다.

식료품과 생필품을 수입에 의존하는 기형적 산업구조 하에서 외화 유출을 막는답시고 수입품에 고율의 관세를 부과하자, 물가가 치솟기 시작했다. 물가를 잡으려면 고정 및 이중환율제를 폐기하고 미국과의 관계개선에 나서야 했지만, 차베스 정권은 ‘국내 기름값 인하’라는 헛발질 정책을 내놓았다. 국제교역에서 발생한 문제를 국내 문제로 해결하려는 우를 범했던 것이다.

끊임없는 상승 행진을 이어가던 물가상승률은 차베스 대통령이 사망한 2013년 세계에서 세 번째로 높은 53%까지 솟구쳤다. 생산과 유통 기반을 서둘러 구축해야 했지만, 차베스 사망 이후 집권한 니콜라스 마두로 정권 역시 중장기적인 산업구조 개편에 무관심했다. 2013년 당시 국민총생산(GDP)이 12,000달러를 상회하는 등 국가경제에 별다른 위험신호가 없었기 때문이다.

2014년, 두 번째 위험이 중국으로부터 다가왔다. ‘세계의 공장’으로 불리며 각종 원자재와 원유를 빨아들이던 중국의 성장 속도가 떨어지면서 국제유가가 배럴 당 30~50달러 선으로 추락했던 것.

베네수엘라의 최대 석유 수출국이던 미국이 셰일가스 개발에 나서면서 수입을 대폭 줄인 데 이어, 때맞춰 불어 닥친 대체에너지 개발 붐과 전기자동차 상용화도 유가 폭락을 부채질했다.

자국통화 볼리바르를 10만분의 1(95~96%)로 액면절하(devaluation)한 ‘100볼리바르 소베라노’ 샘플을 들어 보이는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2018.03.24)(자료:247newsupdate)
자국통화 볼리바르를 10만분의 1(95~96%)로 액면절하(devaluation)한 ‘100볼리바르 소베라노’ 샘플을 들어 보이는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2018.03.24)(자료:247newsupdate)

균형재정에 필요한 유가는 배럴 당 160달러이지만 5배나 추락한 상황. 유가 폭락은 가뜩이나 생산기반이 없는 베네수엘라를 급격한 재정고갈로 몰아넣었다. 유일한 해답은 긴축재정, 즉 지출을 최대한 줄이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니콜라스 마두로 정권은 ‘화폐량 증대’라는 ‘미래 탈취형 정책’을 내놓으면서 하이퍼-인플레이션이라는 돌이킬 수 없는 파국으로 치달았다.

2013년 53%였던 물가상승률은 해마다 기록을 경신, 올해 6월 기준 46,306%까지 치솟았으며, 지금도 국제통화기금(IMF)의 예상치인 100만%를 향해 거침없이 질주하고 있다.

그럼에도 마두로 정권은 국가계획주의 경제시스템을 폐기 또는 수정하는 대신, 식료품 배급, 쇼핑센터 강제 세일, 가동 중단 공장주 구속, 전 국민 강제노동 동원 등을 통해 끊임없이 시장에 개입했다.

베네수엘라 연도별 인플레이션율(2018년 수치는 골드 텔레그라프가 지난 4월 27일 보수적으로 예측한 수치)(자료:goldtelegraph) ⓒ스트레이트뉴스/디자인:김현숙
베네수엘라 연도별 인플레이션율(2018년 수치는 골드 텔레그라프가 지난 4월 27일 보수적으로 예측한 수치)(자료:goldtelegraph) ⓒ스트레이트뉴스/디자인:김현숙

베네수엘라 경제는 복합적인 이유가 중첩되면서 파국으로 치달았다. 정리하면, ▲기형적인 산업・경제구조, ▲극심한 대미 의존 경제 및 대미관계 악화, ▲식량주권 포기, ▲차베스 정권의 외환거래 중단 및 고정・이중환율제, ▲고유가에 기대 무분별하게 늘린 재정지출, ▲살인적 인플레이션을 부른 화폐량 증대, ▲잘못된 가격・생산 통제정책, ▲안이한 현실인식 등이다.

마두로 정권은 자국통화인 볼리바르를 10만분의 1(95~96%)로 액면절하(devaluation)한 ‘볼리바르 소베라노’를 도입했고, 9월부터 최저임금 3,000% 인상, 휘발유 가격 인상 등의 정책을 시행할 예정이지만, 하이퍼-인플레이션이 진정될 것으로 전망하는 애널리스트는 없다.

소득주도성장 하면 베네수엘라처럼 망한다?

베네수엘라 경제가 파탄지경에 이른 원인들 중 ‘퍼주기’로 대변되는 포퓰리즘이 차지하는 비중은 분명 적지 않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퍼주기’ 이전, 즉 스페인 강점기와 미국의 석유 장악기에 산업과 경제 구조가 고루 발전되지 못한 데서 찾아야 한다.

외환거래 일방 중단, 고정・이중환율제, 대책 없는 화폐량 증대, 가격・생산 통제정책 등 차베스・마두로 정권이 둔 각종 무리수들도 미국의 경제제재에 따른 대미관계 악화, 그리고 안이한 상황인식에 따른 엇나간 정책들일 뿐, 포퓰리즘과는 별 관계가 없다.

한국의 산업・경제구조는 베네수엘라와 비교할 수 없이 균형적이다. 미국에 의해 환율조작국으로 낙인찍히는 순간 교역에 엄청난 타격을 입는 터라, 외환거래 일방 중단이나 고정・이중환율제는 꿈조차 꿀 수 없다. 전 사회적인 가격・생산 통제정책 역시 가당치도 않다.

한국과 베네수엘라의 수출 품목 비교(2013)(자료:OPEC/OECD) ⓒ스트레이트뉴스/그래픽:김현숙
한국과 베네수엘라의 수출 품목 비교(2013)(자료:OPEC/OECD) ⓒ스트레이트뉴스/그래픽:김현숙

그런데도 보수 진영은 한국의 소득주도성장과 베네수엘라의 포퓰리즘을 꿰맞춘다. 왜 그럴까? 몇 가지 이유가 있다.

먼저, 경제 패러다임의 대전환을 거부하기 때문일 수 있다. 지금까지 한국경제의 토대는 기업을 중심으로 투자와 수출을 늘리면서 성장하는 ‘이익주도성장’이었다. 그러나 IMF 외환위기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거치면서 경제성장률은 2%대로 떨어졌고, 그 과정에 ‘저성장 불평등’ 구조가 고착됐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문재인 정부는 출범 당시부터 ‘혁신성장’, ‘공정경제’와 함께 ‘소득주도성장’을 경제정책의 핵심 축으로 선정했다. 경제 패러다임을 이익주도성장에서 소득주도성장으로 바꾼 것이다.

소득주도성장은 국제노동기구(ILO)가 2010년 ‘임금주도성장’이라는 이름으로 제안한 이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제통화기금(IMF) 등도 인정한 새로운 경제 패러다임이지만, 보수 진영에는 여전히 이단의 경제학에 가깝다.

두 번째로는 경제 관료 출신인 김동연 경제부총리와 학자 출신인 청와대 장하성 정책실장 간의 조율 실패를 들 수 있다. ‘혁신성장’과 ‘소득주도성장’의 속도 조율이 매끄럽지 못해 과다한 불안과 불만이 조성되고 표출된 것이다.

文 정부 경제정책의 세 축(왼쪽부터 장하성 청와대 정책실장,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 김동연 기획재정부장관 겸 경제부총리) ⓒ스트레이트뉴스/디자인:김현숙
文 정부 경제정책의 세 축(왼쪽부터 장하성 청와대 정책실장,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 김동연 기획재정부장관 겸 경제부총리) ⓒ스트레이트뉴스/디자인:김현숙

세 번째로는 최저임금정책이 소득주도성장정책의 핵심이라는 오해를 들 수 있다. 경북대 경제통상학부 나원준 교수에 따르면, 소득주도성장정책은 기본정책(노동정책, 임금정책), 보완정책(경제민주화정책, 복지정책, 일자리정책, 총수요정책), 공급정책(전통적인 성장정책)으로 나눌 수 있고, 이 세 정책이 맞물려 돌아가도록 배열해야 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기본정책 중 임금정책에 불과한 최저임금만 먼저 치고나가 보완정책들이 제 역할을 못하면서 최저임금의 부작용이 지나치게 부각, 사회적 갈등만 증폭됐고, 그러다 보니 다양한 보완정책들이 묻혔던 것이다.

네 번째로는 소득주도성장에 반드시 필요한 재정확대에 대한 우려를 들 수 있다. 다른 보완정책들이 기본정책(노동정책, 임금정책)을 따라잡게 하려면, 다시 말해서 최저임금과 보완정책들 간에 속도를 조절해 소득주도성장정책이 성공을 거두려면 ‘확장적 재정정책’이 필수적이다.

다행히 우리나라의 재정여력은 여타 선진국들에 비해 매우 양호하다. 하지만 조세저항이 기다리고 있고, 그것이 소득주도성장 전체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소득주도성장과 관련해 벌어지는 논쟁은 베네수엘라의 기형적 산업・경제구조 하에서는 정책의 도마 위에 오를 수조차 없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따라서 기본정책, 보완정책, 공급정책 등 세 가지 소득주도성장정책 중 유독 임금정책, 그것도 최저임금 한 가지에 ‘포퓰리즘’ 또는 ‘퍼주기’라는 옷을 입힌 다음, 파탄 난 베네수엘라 경제와 연결시킬 수는 없다.

베네수엘라는 소득주도성장이나 포퓰리즘 때문에 망한 것이 아니다. 한국과 베네수엘라는 산업・경제구조부터 다르다. 미국과의 관계도 다르고, 국가경제 시스템도 다르며, 외환보유고와 재정여력도 판이하다. 소득주도성장 한다고 베네수엘라처럼 망한다는 말은, 정제되지 않은 정치공세이자 속내가 빤히 들여다보이는 거짓말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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