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 위원장, 풍계리 폐기 검증 위한 사찰단 초청
北비핵화 조치와 美상응조치 두고 상당 수준 교감 시사
文대통령과 강경화 장관의 ‘핵 신고 우회 중재안’ 먹혀
美측, ‘+α’로 종전선언+北체제보장(중・러 보증) 가능


[스트레이트뉴스=김태현 선임기자] 4차 방북길에 올랐던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이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나눈 대화에서 ‘사찰단 초대’라는 가시적인 성과를 거뒀다.

지난 7일(현지시각) 헤더 나워트 미국 국무부 대변인은 폼페이오 국무장관의 방북과 관련, 보도자료를 내고 “풍계리 핵실험장이 불가역적으로 해체됐다는 사실을 확인받기 위해 김정은 위원장이 사찰단을 초대했다”고 밝혔다.

보도자료에는 김정은 위원장과 폼페이오 장관이 싱가포르에서 개최된 제1차 북미정상회담의 4가지 합의사항, 즉 ▲새로운 북미관계 수립, ▲한반도의 항구적・안정적 평화체제,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 노력, ▲전쟁포로 및 실종자 유해 발굴・송환 등에 대해 논의했다는 내용도 포함됐다.

청와대는 전날 문재인 대통령이 폼페이오 장관을 접견한 이후 가진 브리핑에서는 이런 사실을 발표하지 않았지만, 8일 새벽(한국시각) 미 국무부의 발표가 있고 난 후 폼페이오 장관이 문재인 대통령에게 사찰단 초대 부분을 전달했음을 확인해줬다. 미 국무부와 북한이 발표하지 않아 말할 수 없었다는 것이 이유였다.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을 접견한 문재인 대통령(2018.10.07)(자료:청와대)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을 접견한 문재인 대통령(2018.10.07)(자료:청와대)

폼페이오 장관이 이번 방북에서 거둔 성과는 사찰단 초청뿐일까? 청와대 김의겸 대변인은 여전히 “나머지 문제에 대해 드릴 말씀이 없다”며 말을 아끼고 있다. 하지만 비핵화 조치와 상응조치를 두고 북미 간에 상당한 수준의 교감이 있었음을 암시하는 신호가 적지 않다.

가시권에 든 제2차 북미정상회담

남북미 정상들의 평가는 김정은 위원장과 폼페이오 장관이 북한의 비핵화 조치와 미국의 상응조치에 대해 상당한 수준의 의견 접근에 이르렀음을 짐작할 수 있는 바로미터다.

지난 7일, 트럼프 대통령은 자신의 트위터에 “싱가포르 정상회담 합의에 대한 진전이 이뤄졌다. 가까운 미래에 김정은 위원장을 다시 만나기를 고대한다”고 적었다.

북한 조선중앙통신은 8일자 기사에서 “(김정은 위원장이) 조만간 제2차 조미수뇌회담과 관련한 훌륭한 계획이 마련될 것이라고 확신했다”고 썼고, 조선중앙TV도 “제2차 조미수뇌회담 준비를 위한 실무협상을 빠른 시일 안에 개최할 데 대하여 합의하고”라며 북미정상회담을 기정사실화했다.

문재인 대통령 역시 8일 국무회의 석상에서 “2차 북미정상회담이 조기에 열릴 수 있는 분위기와 여건이 조성됐다”고 말했다. 제2차 북미정상회담에 청신호가 켜진 것은 그 자체로 김정은 위원장과 폼페이오 장관이 가시적인 성과를 주고받았다는 명백한 신호다.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북한을 방문한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2018.05.09)(자료:조선중앙TV=UPI)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북한을 방문한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2018.05.09)(자료:조선중앙TV=UPI)

폼페이오 장관이 방북하기 이전, 외교가에서는 제2차 북미정상회담 성사의 전제로 북미 양측이 ‘현 상태보다 진전된 +α’를 제시해야 할 것이라는 관측들이 흘러나왔다. 걸림돌은 그동안 미국이 줄곧 견지해왔던 ‘핵 신고’, 즉 ‘핵 시설 목록 선 제출’이었다.

이와 관련, 문재인 대통령은 뉴욕에서 열린 유엔총회 당시 트럼프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미국 측이 제시할 상응조치는 다양할 수 있다며 미국의 입장 선회를 우회적으로 요청한 바 있다.

강경화 외교부장관 역시 워싱턴 포스트(WP)와 한 인터뷰에서 “북한의 핵 신고 요구를 미루고 핵 시설의 ‘검증된 폐쇄’를 받아들일 것”을 미국 측에 제안하기도 했다.

폼페이오 장관이 방북 전후에 핵 신고와 관련된 발언을 일체 하지 않은 것으로 미루어, 핵시설 파괴 등을 비핵화 조치로 봐야 한다는 우리 정부의 중재안이 어느 정도 먹혀든 모양새다.

워싱턴 포스트(WP)와 인터뷰 중인 강경화 외교부장관(자료:WP)
워싱턴 포스트(WP)와 인터뷰 중인 강경화 외교부장관(자료:WP)

미국이 제시한 상응조치는?

북한이 사찰단을 초청한 것은 경색됐던 북미관계가 다시 신뢰로 돌아서기 시작한 조짐으로 평가된다. 지난 5월 24일, 북한은 제1차 북미정상회담을 앞두고 비핵화에 대한 진정성을 보이기 위해 풍계리 핵실험장을 폐기하는 선제적 조치를 취했다.

그러나 미국은 언론인들만 현장을 참관했을 뿐, 전문가들이 배제됐다며 의혹의 눈길을 보냈고, 이후 북미관계는 교착상태로 빠져들었다. 북미 양국이 신뢰회복을 위한 첫 단추로 풍계리 핵실험장 검증에 우선 합의했으리라는 추측이 가능한 대목이다.

풍계리 검증은 동창리 엔진시험장 및 미사일발사대, 영변 핵시설 등에 대한 사찰과 검증으로 이어지는 출발점일 수 있다. ‘핵 시설 목록 선 제출’이라는 걸림돌도 우리 측의 중재안 덕에 일정 부분 우회한 마당이다. 지금까지 일괄 타결을 주장했던 미국이 단계적・동시적 비핵화를 주장했던 북한에 한 발 물러선 듯한 형국이다.

폼페이오 장관 방북에 동행한 스티븐 비건 미국 국무부 대북정책 특별대표의 발언도 이런 관측을 뒷받침한다.

“우리는 싱가포르 코뮤니케에서 있었던 4개 조항에 대해 취할 수 있는 행동의 첫 번째 움직임을 바라보기 시작했다(We are starting to see a first wave of actions we can take on all four pillars of the Singapore Communique).”

풍계리 지하 핵실험장의 규모・실험능력과 북한의 핵 시설 현황(자료:USGS) ⓒ스트레이트뉴스/그래픽:김현숙
풍계리 지하 핵실험장의 규모・실험능력과 북한의 핵 시설 현황(자료:USGS) ⓒ스트레이트뉴스/그래픽:김현숙

향후 비핵화 일정은 지난달 19일 채택된 평양공동선언에 이미 명시돼 있다. 첫 번째는 유관국 전문가들의 참관 하에 동창리 엔진시험장과 미사일 발사대를 영구 폐기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미국의 상응조치가 있을 경우, 영변5MW 원자로와 플루토늄 재처리 시설, 우라늄 고농축 시설 등 영변 핵시설을 영구 폐기하는 1단계 조치에 들어가는 것이다.

문제는 첫 번째 조치와 두 번째 조치에 대해 미국이 어떤 상응조치를 내놓을 것이냐다. 분명한 것은, 북한이 +α를 내놓은 만큼 미국의 상응조치도 종전선언에 머무르기는 어렵다는 점이다. 미국이 종전선언 +α를 제시했을 것이라는 분석이 나오는 이유다.

미국이 제시한 +α로는 평화협정이 거론된다. 정치적 수사에 불과한 종전선언에 치중하기보다 평화협정에 무게를 둘 수 있다는 추정이다. 실제로 폼페이오 장관 방북 이후, 관련자들은 평화협정을 입에 담고 있다.

北체제보장을 위한 미국의 상응조치 중 하나로 거론되는 주변국 보증 ⓒ스트레이트뉴스/디자인:김현숙
北체제보장을 위한 미국의 상응조치 중 하나로 거론되는 주변국 보증 ⓒ스트레이트뉴스/디자인:김현숙

미국이 종전선언이나 평화협정에 중국과 러시아 등 주변국의 보증을 제시했을 가능성도 있다. 이는 체제보장을 원하는 북한으로서는 반드시 필요한 조치이기도 하다.

폼페이오 장관이 일본, 북한, 한국을 거쳐 중국을 방문한 것도, 김정은 위원장이 러시아를, 중국 시진핑 국가주석이 북한을 방문할 것이라는 관측이 제기되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일 수 있다.

“최종적이고 완전히 검증된 비핵화를 위해 미중 양국이 함께 일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한 폼페이오 장관의 트위터 글에서도 이런 맥락이 읽힌다.

극단적으로, “북한과 일본이 대화할 기회 역시 열려 있다”는 문재인 대통령의 발언(10월 8일 국무회의)으로 미루어 볼 때, 어쩌면 남・북・미・중・러・일이 참여하는 6자회담으로 회귀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또한 미국이 대북제재 중 예외조항 확대나 미국의 독자 제재 중 일부 해제를 통해 남북경협이 돌파구를 마련할 수 있는 방안도 +α로 제시했을 수 있다.

사찰단 외에 성과 없지만, ‘중대한 진전’에 무게 실려

스티븐 비건 미국 국무부 대북정책 특별대표와 카운터파트인 최선희 북한 외무성 부상 간의 실무급 대화가 곧 개최될 예정이다. 이 대화에서 풍계리 핵실험장 폐기를 검증할 사찰단이 꾸려진다.

폼페이오 장관이 8일 가진 브리핑에서 “핵 사찰을 하는 데 필요한 물류가 많다”고 한 것을 보면, 북미 양국이 이미 사찰단의 구체적인 규모까지 논의를 진전시킨 것으로 보인다.

당일치기 방북에서 김정은 위원장과 폼페이오 장관은 오전 2시간, 점심, 오후 2시간 등 무려 5시간 30여 분을 함께하면서, 2차 북미정상회담 개최에 “상당히 근접한(pretty close)” 성과를 만들어냈다.

비건-최선희의 실무급 대화, 그리고 폼페이오-김영철(또는 리용호)의 물밑대화를 통해 북한의 비핵화 조치와 미국의 상응조치에 관한 세부사항이 조율되면, 김정은 위원장과 트럼프 대통령이 최종 결론을 내릴 것이다. 사찰단 초청 이외에 아직 드러난 성과는 없지만, 진행 중인 상황에 비추어, "중대한 진전(significant progress)"이라던 폼페이오 장관의 발언에 무게가 실리고 있다.
bizlink@straigh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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