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세기에 나타난 자본주의로 인해 사람들의 생활은 풍요로워졌다. 그러나 자본가들의 무한 이윤획득에 의해 세계 경제는 불균등하고 불공정해지고 있다. 정치적으로도 강대국의 힘이 거세지면서 각종 모순적 요소가 심화되고 있다. 이러한 문제의 원인을 알기 위해선 현대 경제의 중요한 쟁점들이 무엇인지 이해하고, 그 쟁점들의 핵심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경제학의 세계에서 벌어지는 모든 현상과 논쟁을 우리가 알아야 할까? 몰라도 무방한 것들이 있지만, 반드시 알아야 할 것들이 있다. 경제학 논쟁이 경제 정책으로 이어지고, 그 정책은 보통 누군가에게는 유리하고 누군가에게는 불리할 뿐 아니라 나라의 운명과도 연결되기 때문이다. 스트레이트뉴스는 오늘날 우리 사회에 뜨거운 쟁점으로 떠오른 경제의 주요 요소들을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본지 선임기자 현재욱의 저작인 「보이지 않는 경제학」를 연재한다. [편집자 주]

노동은 재화에 응축된다

올해 고등학생이 된 현수는 푹신한 소파에 비스듬히 몸을 기댄 채로 다큐멘터리 영상을 보고 있다. 눈은 엘이디LED 모니터에 붙들려 있지만 한 손은 쉴 새 없이 탁자 위의 과자봉지를 들락거리며 입으로 과자를 나른다. 오늘의 간식거리는 ‘감자깡’이라는 이름을 가진 식품이다. 이 과자 한 봉지에 얼마나 다양한 지역의, 얼마나 많은 사람의, 얼마나 오랜 기간의 노동이 관여되어 있는지 밝혀낼 수 있을까?

먼저 재료부터 살펴보자. 소맥분(밀: 미국산), 감자(국산), 수입 옥수수(러시아·헝가리·세르비아산)로 만든 전분, 미강유, 팜유, 조미분말(미국산), 콩, 우유, 돼지고기, 쇠고기, 양파, 파슬리. 미국에서 수입한 밀이 국내의 제분소에서 분말로 만들어졌으니 소맥분은 미국 사람과 한국 사람의 합작품이다. 어쨌든 밀을 생산하는데 미국인 농부의 한 해 노동이 고스란히 투입된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 농부가 어떤 사람인지, 전부 몇 명인지는 알 도리가 없다. 아무튼 기계의 힘을 빌렸을 가능성이 아주 크다. 그렇다면 기계를 만든 사람의 노동이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 기계를 움직이는 데는 연료가 필요하다. 따라서 연료인 석유를 생산하고 공급한 노동도 조금은 인정해 주어야 한다.

미국의 일반적인 농법을 생각하면 다량의 화학비료와 농약이 뿌려졌을 것이고, 따라서 비료공장과 농약공장의 노동자도 목록에 올려야 할 것이다. 참, 원시림을 밀밭으로 바꾸는 데 들어간 아주 오래된 노동을 잊을 뻔했다. 아마도 그 노동은 매우 거칠고 위험했을 것이다.

여기까지는 대략 훑어본 것이고, 종자를 개발하고 생산한 노동, 트럭이나 기차 운송에 들인 노동, 컨테이너를 선적하는 노동, 태평양을 건너 부산이나 인천까지 수송하는 노동, 하역하는 노동, 다시 공장까지 운반하는 노동 등 일일이 따지고 들면 한도 끝도 없다.

다음에는 감자를 살펴보자. 국산이라는 말이 어색하게 들리지 않지만 감자의 원산지는 페루와 볼리비아의 고산지대다. 감자가 스페인 사람에 의해 처음으로 유럽에 전해진 때는 16세기 후반이다. 그것이 중국을 거쳐 한반도에 들어온 시기는 1820년대쯤으로 추정한다.

그래서 우리가 아침저녁으로 즐겨 먹는 강원도 감자에는 16세기에 안데스 산맥을 헤매던 스페인 사람의 지난한 노역의 흔적이 아주 조금이라도 묻어 있다. 그것이 미립자 수준의 분량이라 해도, 450년 전 한 유럽인의 노동이 한 알의 감자에 배어 있는 것은 사실이다. 유럽을 기아에서 해방시키겠다는 선의로 그 일을 했을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말이다. 

이쯤 되면 눈치챘겠지만, 세상의 모든 노동은 사라지지 않고 재화에 응축된다. 따라서 재화는 ‘물화된 노동materialized labour’이다. 감자깡에서 보았듯이, 아무리 사소해 보이는 물건일지라도 그 재화에 고정된 노동의 시공간적 연원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깊고 넓다.

단순한 바늘 하나가 지하 수백 미터의 갱도에서 캐낸 철광석에서 비롯했다고 생각해 보라. 그 작은 바늘에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그러나 확실히 존재했던 광부의 고단한 노동이 포함되었음은 분명하다. 우리는 그 노동이 빚어낸 효용가치를 엄지와 검지로 실감하며 떨어진 단추를 옷에 붙인다. 이것은 문학적 표현이 아니라 과학적 사실이다.

서비스 생산에 투입된 노동도 물질적 변화를 일으킨다. 청소부의 노동은 깨끗한 거리로, 미용사의 노동은 만족스러운 헤어스타일로, 요리사의 노동은 맛있는 음식으로, 성악가의 공연은 감동으로 남는다. 이 모든 노동은 삶의 질을 향상시키고 사회의 부를 증진시킨다.

하인의 노동은 생산되는 순간 사라져 버린다는 애덤 스미스의 생각은 틀렸다. 노동의 물화物化는 재화의 본질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이다. 마르크스는 “재화가 가치를 지니는 까닭은 추상적 인간노동이 그 속에 대상화 또는 물질화되어 있기 때문이다”라고 서술했다. 노동은 재화에 고정되고, 재화를 소비한 인간의 몸에 잠시 머물렀다가, 인간의 죽음과 함께 소멸한다. <계속>

※ 이 연재는 저자(현재욱)와 출판사(인물과사상사)의 동의로 게재한 글입니다. 무단 도용을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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