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 연재-보이지 않는 경제학] 〈18〉매우 특별한 화폐 '금'
[ST 연재-보이지 않는 경제학] 〈18〉매우 특별한 화폐 '금'
  • 현재욱 선임기자 (jeffhyun@naver.com)
  • 승인 2019.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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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기에 나타난 자본주의로 인해 사람들의 생활은 풍요로워졌다. 그러나 자본가들의 무한 이윤획득에 의해 세계 경제는 불균등하고 불공정해지고 있다. 정치적으로도 강대국의 힘이 거세지면서 각종 모순적 요소가 심화되고 있다. 이러한 문제의 원인을 알기 위해선 현대 경제의 중요한 쟁점들이 무엇인지 이해하고, 그 쟁점들의 핵심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경제학의 세계에서 벌어지는 모든 현상과 논쟁을 우리가 알아야 할까? 몰라도 무방한 것들이 있지만, 반드시 알아야 할 것들이 있다. 경제학 논쟁이 경제 정책으로 이어지고, 그 정책은 보통 누군가에게는 유리하고 누군가에게는 불리할 뿐 아니라 나라의 운명과도 연결되기 때문이다. 스트레이트뉴스는 오늘날 우리 사회에 뜨거운 쟁점으로 떠오른 경제의 주요 요소들을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본지 선임기자 현재욱의 저작인 「보이지 않는 경제학」을 연재한다. [편집자 주]

매우 특별한 화폐, 금

조개나 소금처럼 그 자체로 사용가치를 지닌 화폐를 ‘물품화폐commodity money’라고 한다. 면포, 비단, 모피, 금, 은, 옥, 철, 알곡(쌀, 보리, 밀, 조, 콩 등)도 화폐로 쓰였다. 심지어는 담배가 화폐로 사용되기도 했다. 1980년대 말 구소련이 붕괴할 때, 모스크바에서는 담배가 루블화보다 인기 있는 화폐로 통용되었다. 그 가운데 가장 오랫동안 화폐 기능을 했고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것은 ‘금gold’이다.

금은 균질하고, 잘게 나눌 수 있고, 운반하기 쉽고, 위조하기 어렵다는 장점 때문에 유사 이래 가장 널리 화폐로 사용되었다. 석유는 원유의 비중(API도), 황 함유율, 성상에 따라 75개 등급으로 나뉜다. 그러나 금은 원소 하나로 이루어졌으며 원자번호는 79번이다. 금은 언제나 금이다.

어떤 돈도 금을 능가한 적은 없다. 송나라 때의 교자交子와 회자會子, 원나라의 교초交鈔, 명나라의 보초寶鈔 같은 지폐가 있었지만 모두 인플레이션의 제물이 되어 사라졌다. 교자는 세계 최초의 종이돈이다. 북송北宋 시대에는 유례없는 경제성장에 힘입어 화폐경제가 고도로 발달했다. 송나라의 표준화폐는 소평전小平錢이라는 금속화폐였는데, 구리로 제작되었다.

그러나 사천四川 지역에서는 구리가 부족해서 철전鐵錢을 사용했다. 철전은 너무 무거워서 사용하기가 불편했다. 비단한 필을 사려면 철전 2,000개를 지불해야 했는데, 무게가 무려 130근(78킬로그램)이나 나갔다. 그래서 사천의 경제 중심지였던 성도成都의 상인들은 지폐 발행이라는 금융혁신을 단행했다. 철전은 창고에 보관하고 그 액수만큼 어음을 발행하는 방법을 고안해낸 것이다.

그러니까 교자는 민간에서 발행한 철태환은행권이다. 교자는 신용도가 매우 높아서 100만 관의 고액 교자를 들고 가도 눈 한 번 깜짝하지 않고 현찰(철전)을 내주었다. 그러나 탐욕은 모든 것을 바꾼다. 교자 발행권을 가진 상인들은 점차 창고에 있는 철전보다 많이 지폐를 발행하기 시작했고, 교자의 신뢰도는 땅에 떨어졌다.

은도 오랫동안 돈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지만, 신대륙에서 어마어마한 은이 유럽으로 유입되면서 대규모 인플레이션을 일으켰다. 16세기에 페루와 멕시코의 광산에서 스페인으로 유입된 은은 1만7,000톤에 달했다. 금과 은에 대한 유럽인의 탐욕은 수많은 원주민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포토시Potosí의 은광을 ‘지옥의 광산’이라고 칭한 스페인 선교사는 “월요일에 건장한 인디언 20명이 들어가면 토요일에 절반은 불구가 되어 나온다”라고 기록했다.

이 시기 스페인의 물가는 4배로 뛰었고, 300년간 변화가 없던 식품가격이 두드러지게 올랐다. 영국의 경우 생계비가 7배 증가했다. 그 결과 고정 지대地代를 받던 봉건지주는 큰 타격을 받았고, 돈 대신 물건을 많이 갖고 있던 상공업자의 지위가 높아졌다. 그 역사의 마디를 우리는 ‘가격혁명price revolution’이라고 부른다. 유럽의 봉건시대를 끝낸 것은 금과 은이다. 그러나 16세기 스페인 통치자들은 통화량의 증가가 인플레이션을 유발하는 이치를 알지 못했고, 금과 은이 국가의 부를 증가시킨다고 굳게 믿었다.

유럽에 상업자본이 형성되고, 신흥 자본가들의 경제적 뒷받침에 힘입어 절대왕정시대가 열렸다. 금과 은이 국부國富의 원천이라는 생각은 오랜 기간 유럽의 통치자들을 사로잡았다. 유럽의 여러 나라는 금과 은을 축적하는 데 온 힘을 쏟았고, 전 세계의 금과 은을 긁어모으기 위해 해적질도 서슴지 않았다.

1581년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Elizabeth I, 1533~1603는 노예무역과 해적질로 악명 높은 프랜시스 드레이크Francis Drake를 해군 중장으로 임명하고 기사 작위를 수여했다. 드레이크는 스페인 선단을 덮쳐서 약탈한 30만 파운드의 재보를 엘리자베스 1세에게 바쳤는데, 이는 당시 영국의 국고 세입보다 많은 금액이었다.

성경에 이르기를 “금은을 많이 쌓지 말라” 했는데, 유럽의 기독교 국가들이 금은을 쌓기에 혈안이 된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왕실 금고에 금은이 가득 쌓여 있으면 재정이 튼튼한 나라, 전쟁과 토목공사로 금은이 빠져나가면 재정이 부실한 나라가 되었다.

프랑스 왕 루이 14세는 베르사유 궁전을 짓고 군대를 육성하느라 금은을 펑펑 써버린 나머지 극심한 재정난에 빠졌다(그가 즉위할 무렵 2만 명에 불과했던 상비군이 재위 50년이 지난 1694년에는 40만 명에 달했다).

루이 16세 대에 이르면 왕실 예산의 거의 절반이 대출금에 대한 이자로 나갈 정도였다. 결국 구체제의 모순이 누적되어 혁명이 터지고, 나폴레옹이 등장한다.

신대륙 발견 이후 유럽은 전쟁이 끊길 새가 없었다. 무역의 주도권, 다시 말해 돈줄을 거머쥐려는 경쟁이 유럽 여러 나라를 전쟁판에 뛰어들게 했고, 혈연으로 얽히고설킨 왕가와 귀족들 간에 상속권을 둘러싸고 전개된 싸움도 많았다. 1517년 루터의 종교개혁을 기점으로 신교도와 구교도 사이에 충돌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상공업이 발달한 북유럽의 상인과 지식인을 중심으로 개신교가 확산되면서 권위적인 기득권 세력에 저항했다.

황금에 눈이 먼 스페인 사람들은 1521년에 아스테카 왕국을, 1533년에는 잉카 제국을 차례로 멸망시켰다. 1562년 프랑스에서 위그노전쟁이 일어났고, 30만 명의 위그노Huguenot(신교도) 가 프랑스를 탈출하여 스위스, 독일, 네덜란드, 영국 등지로 흩어졌다. 스위스의 정밀산업은 위그노 기술자들이 세운 시계공장에서 시작되었다.

1588년에는 영국 해군이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격파했다. 1568년부터 1648년까지 무려 80년에 걸쳐 벌어진 네덜란드 독립전쟁은 개신교와 가톨릭 간의 종교 대립, 무거운 세금으로 인한 경제적 갈등, 영국과 스페인 간의 패권 다툼이 복합적으로 빚어낸 국제전이었다. 1618년 독일에서 30년전쟁이 시작되었고, 1740년에는 유럽의 거의 모든 나라가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에 말려들었다. 1776년에는 영국의 조세정책에 반발한 미국 13개 주가 독립을 선언했다.

전쟁은 주로 왕과 귀족이 벌이고, 돈은 상인이 벌었다. 왕에게 전쟁비용을 대주고 이자를 받는다든지, 왕실 재산을 위탁받아 관리하는 등 여러 수단이 있었다. 전쟁이 일어날 때마다 왕실 금고는 빠르게 축났
다. 특히 ‘가톨릭의 수호자’를 자처한 합스부르크 왕가의 펠리페 2세Felipe II, 1527~1598는 유럽의 거의 모든 전쟁에 끼어들었고, 재위 기간에 모두 네 차례 파산을 선고했다. 이때도 역시 돈 하면 금이었다.

신대륙에서 유입된 막대한 양의 금과 은은 스페인에 잠시 머물렀다가 프랑스, 영국, 네덜란드로 흘러나갔다. 스페인의 낙후된 제조업은 금과 은을 붙잡아둘 힘이 없었다. 그렇게 된 데에는 스페인 통치자가 자초한 측면이 컸다. 1492년 알람브라 칙령Alhambra Decree으로 유대인과 무슬림을 추방했을 때 우수한 인력과 기술도 함께 빠져나갔다. 

※ 이 연재는 스트레이트뉴스가 저자(현재욱)와 출판사(인물과사상사)의 동의로 게재한 글입니다. 무단 도용을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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