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 연재-보이지 않는 경제학] 〈22〉화폐의 유체 이탈 시대
[ST 연재-보이지 않는 경제학] 〈22〉화폐의 유체 이탈 시대
  • 현재욱 선임기자 (jeffhyun@naver.com)
  • 승인 2019.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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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기에 나타난 자본주의로 인해 사람들의 생활은 풍요로워졌다. 그러나 자본가들의 무한 이윤획득에 의해 세계 경제는 불균등하고 불공정해지고 있다. 정치적으로도 강대국의 힘이 거세지면서 각종 모순적 요소가 심화되고 있는 형국이다. 이러한 문제의 원인을 알기 위해선 현대 경제의 중요한 쟁점들이 무엇인지 이해하고, 그 쟁점들의 핵심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경제학의 세계에서 벌어지는 모든 현상과 논쟁을 우리가 알아야 할까? 몰라도 무방한 것들이 있지만, 반드시 알아야 할 것들이 있다. 경제학 논쟁이 경제 정책으로 이어지고, 그 정책은 보통 누군가에게는 유리하고 누군가에게는 불리할 뿐 아니라 나라의 운명과도 연결되기 때문이다. 스트레이트뉴스는 오늘날 우리 사회에 뜨거운 쟁점으로 떠오른 경제의 주요 요소들을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본지 선임기자 현재욱의 저작인 「보이지 않는 경제학」를 연재한다. [편집자 주]

화폐의 유체 이탈 시대

도대체 얼마나 많은 돈이 세상을 떠돌고 있을까? 오늘날 지갑에서 지갑으로, 혹은 금고에서 금고로 이동하는 현금화폐는 물론이고 금융기관과 기업의 컴퓨터 서버에서 다른 서버로 이동하는 통화의 총량은 누구도 어림하기 어렵다.

유발 하라리Yuval Harari는 2011년 시점에 세계 화폐의 총량을 60조 달러로 추정했다. 그 가운데 주화와 지폐의 총액은 6조 달러였다. 그러니까 50조 달러 이상의 돈은 컴퓨터 서버에만 존재하는 전자화폐다. 어마어마한 규모의 통화가 현금화폐가 아닌 전자화폐로 유통되고 있다.

세계 최대의 파생상품 거래소인 시카고상업거래소Chicago Mercantile Exchange, CME의 선물상품이 온·오프의 전자신호로 바뀌었음은 ‘거의 모든 실물상품의 유체 이탈’을 의미한다. 금본위제가 폐기되면서 금으로부터 독립한 화폐는 마침내 종이로 된 육신도 벗어버렸다. 볼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는, 오로지 서버에 파일로만 존재하게 된 것이다. 전자화폐는 순간이동의 마법을 부리는 것 말고는 현금화폐와 똑같은 기능을 한다.

미국의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연준)가 ‘양적완화quantitative easing’라는 이름으로 금융시장에 공급한 돈은 인쇄기로 찍어낸 돈이 아니다. 6년간 총 4조 달러, 미국인 모두에게 1만 2,500달러씩 나누어줄 수 있는 돈이 컴퓨터 자판을 몇 번 두드림으로써 창출되었다. 문자 그대로 허공에서 돈이 만들어진 것이다.

신용카드credit card는 화폐인가? 결론부터 말하면 신용카드는 화폐가 아니다. 신용카드가 화폐라면 카드회사는 화폐 발행권을 가진 중앙은행, 즉 한국은행과 동급의 지위를 갖게 된다. 그러나 오늘날 신용카드는 현금 못지않게 광범위하게 통용되는 거래수단이고, 화폐와 마찬가지로 시장에서 교환의 매개 역할을 한다.

현금이 전혀 없어도 지갑에 쏙 들어가는 신용카드 한 장만 있으면 마트에서 물건을 살 수 있고,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할 수 있으며, 주유소에서 기름을 넣을 수 있다. 이런 말을 하면 “톨게이트에서는 카드를 안 받던데요?”라고 반문하는 사람이 있다. 그것은 국토교통부가 신용카드를 불신해서가 아니라 카드 결제가 교통 정체를 일으킬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신용카드가 화폐처럼 보이는 까닭은 상품을 구매할 때 결제수단으로 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용카드에는 부가 축적되지 않는다. 신용카드는 지불수단이 아니라 ‘지불을 연기’하는 수단이다. 신용카드는 카드 사용자(소비자)와 카드 가맹점(판매자) 사이에서 돈의 이동을 중개하는 단말기에 지나지 않는다. 카드회사는 중개의 대가로 수수료를 얻는다. 카드회사가 가입자에게 온갖 혜택을 주는 데에는 카드 사용을 장려함으로써 수수료 수익을 높이려는 속셈이 숨어있다.

물론 얇은 플라스틱 카드만으로 결제가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고, 가맹점마다 카드 리더기를 갖추고 있어야 한다. 카드와 카드 리더기, 눈도 귀도 없는 두 단말기가 어떤 전자신호를 주고받는지는 카드 주인도 모르고 계산대의 판매원도 관심 밖이다. “한도 초과인데요?”라는 말은 판매원이 하지만, ‘결제 불가’ 판정을 내리는 주체는 사람이 아니라 수십 킬로미터 혹은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카드회사의 컴퓨터 서버다.

미국의 통화량 팽창(1980~2015)
미국의 통화량 팽창(1980~2015)

신용카드는 단말기에 불과하지만 아직 반전이 남아있다. 사람들이 신용카드로 결제하면서 서명한 종이는 일종의 차용증이다. 여기에는 즉시(일시불), 3개월 혹은 10개월 후(할부)에 돈을 갚겠다는 약속이 담겨 있다. 이 차용증은 은행이나 카드회사 입장에서 보면 채권인 동시에 자산이다.

자산이 증가하면 그만큼 신규 대출이 가능하다. 신규 대출이 이루어지는 순간 새로운 통화가 창출된다. 다시 말해 우리가 신용카드를 긁을 때마다 통화가 창출되는 것이다. 누가 플라스틱 카드를 ‘화폐 제조기’라고 불러도 반박하기가 쉽지 않다.

현금 결제와 카드 결제, 그 차이는 무엇인가? 지갑에 두툼한 현금을 넣고 다닐 필요가 없다는 것은 굉장한 매력임에 틀림없다. 단지 그뿐인가? 카드회사는 가입자를 ‘회원’으로 우대하고 그에게 차별적 지위를 부여한다. 카드를 많이 쓰고 카드대금을 잘 갚을수록 지위도 올라간다. 신용카드는 시장경제체제에서 일종의 신분증이자 통행증이다.

나는 화폐와 신용카드의 본질적 차이가 ‘신용을 부여하는 주체’에 있다고 생각한다. 모든 사람이 화폐가 매우 특별한 종이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 까닭은 국가가 법으로 신용을 부여했기 때문이다. 반면에 카드는 민간기업인 카드회사가 카드 소지자 개인의 신용을 보증하는 물표物標다. 고대 상거래에서 두 쪽의 널판 조각을 끼워 맞추듯이, 카드를 카드 리더기에 대고 긁는다. 찌지직거리는 소리를 내며 영수증이 찍혀 나오면 거래가 성사되었다는 뜻이다.

현금은 당신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지만 카드는 당신의 신용을 묻는다. 카드를 발급받고자 할 때 카드회사는 당신의 직업, 급여 수준, 거래 실적을 조회하고 평가하여 1등급에서 9등급까지 신용등급을 매긴다. 수능 성적이나 소고기의 품질등급을 매기듯이 말이다.

음식점에서 밥값을 못 내면 뺨을 한 대 맞거나 덤으로 소금 한 줌을 뒤집어쓰는 것으로 그칠 수 있지만 카드대금을 연체하면 신용등급이 떨어지고 최악의 경우 ‘신용불량자’라는 낙인이 찍혀 모든 금융 거래에서 불이익을 받는다.

‘신용’이라는 추상적 개념에 대한 이해 없이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를 설명하기 어렵다. 자본주의 경제, 특히 금융경제는 신용이라는 기초 위에 세워진 거대한 구조물이다. 신용이 꺼지면 와르르 무너진다.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는 역사상 최악의 신용위기였다. 모기지론의 신용에 구멍이 뚫리자 미국은 거의 망할 뻔했다. 월가를 강타한 충격은 전 세계로 파급되었고, 그 여파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처음으로 돌아가 신용카드를 다시 보자. 화폐의 전자화가 없었다면 신용카드도 없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신용카드를 통해 전송되는 돈은 100퍼센트 전자화폐다. 교통카드로 지불되는 돈도 전자화폐이고 홈뱅킹을 통한 계좌이체 역시 전자화폐 없이는 불가능하다.

우리는 일상에서 아무런 불편 없이 전자화폐를 사용하고 있지만, 18세기의 자본가와 경제학자들에게 이런 개념을 이해시키기란 매우 지난한 일일 것이다. 애덤 스미스가 순간이동의 마법을 어찌 이해하겠는가.

어쩌면 현금화폐가 아주 없어지는 세상이 올지도 모른다. 실제로 덴마크 중앙은행은 2015년부터 지폐와 동전을 발행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세계 최초로 ‘현금 없는 사회’를 만들겠다는 뜻이다. 모든 거래가 100퍼센트 카드나 폰뱅킹으로 이루어지는 세상… 화폐 발 행 비용이 절감되는 장점도 있겠지만, 거래를 감추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나쁜 소식임이 틀림없다. <계속>

※ 이 연재는 스트레이트뉴스가 저자(현재욱)와 출판사(인물과사상사)의 동의로 게재한 글입니다. 무단 도용을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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