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프서비스, 셀프난민에 미개인이고픈 고객
외국은 패스트푸드점 외에 셀프서비스 없어
‘서비스는 또 다른 맛’, 고객 힐링 충족 절실


[스트레이트뉴스=유진형 한국수생명연구소 대표] 힐링(healing)이 대세인 시절, 결코 빠질 수 없는 힐링 분야가 있다. 먹방이다. 오죽하면 TV 채널 한 다리 건너마다 먹방 재방송일까. 그러나 숱한 먹방에는 보이지 않는 ‘잘못된 가치’ 하나가 숨겨져 있다. 셀프서비스(self-service)다.

가족과 함께 쇼핑을 나간 어느 주말, 점심도 먹고 피곤한 다리도 쉴 겸 쇼핑몰 식당가를 찾았다. 늘어선 식당 몇 군데를 기웃거리다 깔끔하고 맛있어 보이는 단품요리 식당으로 들어갔다.

홀 서빙하는 종업원이 다가왔고, 1인분에 14,000원으로 다소 비싸지만 맛있어 보이는 메뉴를 주문했다. 주문을 접수한 종업원은 주방에 주문을 전달한 다음,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 최근 몇 년 동안 식당에서 겪어야 했던 불안감이 밀려들었다.

“여기, 물 좀 주시겠어요?”

종업원은 당당하게 저쪽 한편을 가리키면서 “물은 셀프”라고 했다. 물은 셀프가 아니라 워터 아니었나? 영어도 제대로 못하다니. 직접 떠다 먹으라는 소리다.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였다.

1인분에 14,000원이면 결코 싼 가격이 아니다. 그런 메뉴를 팔면서 물을 서비스하지 않겠다는 상술의 기준은 무엇일까? 아들 뻘인 종업원에게 말해 뭣하랴. 불쾌가 우리 가족의 먹방을 망쳐놨고, 힐링(healing)은 킬링(killing)이 됐다.

일반 식당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셀프서비스 안내판 ⓒ스트레이트뉴스
일반 식당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셀프서비스 안내판 ⓒ스트레이트뉴스

셀프서비스가 우리 사회에서 당연시된 건 언제부터일까? 그리고 소비자는 도대체 무슨 이유로 서비스의 주체가 돼버렸을까?

셀프서비스의 사전적 정의는 “고객이 직접 상품을 선택하는 저가(low price)이고 단시간(short time shopping) 쇼핑을 할 수 있는 판매 방법”이다. 그렇다. 셀프서비스의 목적은 소비자에게 보다 적극적인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가격이 저렴하거나 소비자의 이용성을 높이는 것이다.

셀프서비스는 소비자의 다양한 욕구를 충족시켜주기 위해 고안된 판매 방법이지만, 분명 어느 순간부터 판매자의 이익 확대 수단으로 전락했다. “물은 셀프서비스”, “반찬은 셀프서비스”, “식기반납은 셀프서비스”. 달랑 종이 한 장 붙여두고 종업원 수를 대폭 줄인 가게가 즐비하다.

심지어 어느 식당에서는 주인이 매의 눈으로 살펴보다가 식사를 마치고 일어서는 손님을 향해 “식판을 주방으로 가져가라”며 준엄한 지시를 내리는 경우도 있다. 그런 지시에는 식기를 주방으로 반납하지 않으면 문화시민이 아니라는 경고가 담겨 있다. 14,000원짜리 점심을 먹어도 직접 물을 떠다 마시지 않는다면, 우리 가족은 문화와 동떨어진 미개인 정도로 취급될 수 있다.

셀프서비스가 자연스러운 시절에 고리타분한 소리로 들릴 수 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집필한 밀란 쿤테라가 “별 것도 아닌 일에 신경 끄라”며 트집을 잡을 수도 있다.

하지만 다른 나라 사례와 비교하면 한숨이 절로 나온다. 직업상 해외 출장이 잦은데, 패스트푸드(fast food) 가맹점을 빼고는 해외 일반식당에서 셀프서비스라는 용어를 본 적이 별로 없다. 해외 출장뿐 아니라 학위를 위해 4년 반 동안 머문 일본에서도, 심지어 셀프서비스의 탄생지인 미국에서도 그랬다.

셀프서비스를 적용하기 위한 기본 전제는 ‘소비자의 이익’이다. 그 이익에는 다양한 선택의 기회와 소비자 이용 편의, 그리고 저렴한 가격이 포함된다.

이 전제가 충족되지 않을 경우, 셀프서비스는 아르바이트 학생들이나 우리네 어머니들에게 지급될 인건비를 줄이기 위한 저급 상술, “문화시민의 조건”을 빙자해 손님 호주머니를 터는 강탈과 같다.

실제로, “물은 셀프서비스”라는 종이 한 장 탓에 얼마나 많은 일자리가 사라졌는지는 수치를 대지 않더라도 모두가 실감할 수 있다.

직접 요리하는 대신 식당을 찾는 배경에는 맛있는 식사와 서비스를 동시에 받고 싶은 기대가 깔려 있다. 그에 대한 비용을 기꺼이 지불할 의사도 있다. 이것이 바로 힐링에 대한 욕구다. 그래서 전제가 충족되지 않은 셀프서비스는 ‘킬링’이다.

서비스는 '또 다른 맛'이라 불릴 정도로 맛만큼이나 중요한 장사 밑천이다. 요리의 맛이 덜하더라도 서비스가 특급이라면 그 서비스 덕에 혀끝의 촉감이 살아날 수 있다. 동네 식당들이 손님이 없어 장사하기가 너무 힘들다고 아우성이다. 이럴 때 “물은 셀프서비스”라는 종이를 과감히 찢어버리고 손님을 행복하게 하는 서비스를 제공해 보면 어떨까?

오는 주말 아내와 동네 언덕길 작은 식당에 가서 4,000원짜리 메밀면을 먹고 싶다. 맛도 맛이지만 그보다는 자리에 앉자마자 종업원이 내오는 따뜻한 옥수수물이 그리워서다. “어서 오세요. 이제 봄이 왔죠?” 하며 건네는 인사가 그리워서다. 그곳에 다녀오면 입도 마음도 행복해져서다.

이제 킬링은 싫다. 비싼 돈 주고 사먹으면서 “당신이 당신한테 서비스 하세요” 하는 저급 상술의 명령은 받기 싫다. ‘셀프서비스’ 없는 식당을 찾아 헤매는 ‘셀프 난민’이 되어도 좋다. 이른바 ‘고퀄(높은 수준)’의 서비스가 제공되는 식당이라면, 그곳에서 문화시민 아닌 미개인이 되어도 좋다.
유진형 jhytomal@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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