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故) 조비오 신부 사자명예훼손 혐의 재판을 받고 나온 전두환씨가 대기하고 있는 경호차량에 탑승하고 있다.
고(故) 조비오 신부 사자명예훼손 혐의 재판을 받고 나온 전두환씨가 대기하고 있는 경호차량에 탑승하고 있다.

[스트레이트뉴스 고우현기자] 5·18 민주유공자의 명예를 훼손한 혐의로 기소된 전직 대통령 전두환(88) 씨가 공소 사실을 전면 부인하는 등 논란의 언행으로 광주시민은 물론 대한민국 사회를 공분의 도가니로 몰았다.

전두환 씨는 고 조비오 신부를 비난한 것은 모욕죄는 될지언정, 허위사실 적시에 의한 명예훼손은 아니라는 주장으로 일관해 속죄·참회할 기회를 저벼렸다는 비판이 쏟아진다.

광주지법 형사8단독(부장판사 장동혁)은 11일 오후 법정동 201호 대법정에서 사자명예훼손 혐의로 기소된 전두환 씨에 대한 심리를 열었다. 작년 5월 기소 이후 10개월 만에 피고인 전두환 씨가 참석한 사실상의 첫 재판이다. 

5·18 민주화운동 39년 만에 광주 법정에 선 전두환 씨는 내란죄 등의 혐의로 1996년 형사 법정에 선지 23년 만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신뢰관계인 자격으로 동행한 부인인 이순자(79) 씨와 피고인석에 함께 앉아 재판에 임하다 몇차례 고개를 떨구는 등 졸고 있는 모습까지 보여 주위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전두환 씨의 변호인은 재판 관할지 위반을 거듭 주장하며 재판장의 판단을 바랐다. 아울러 '1980년 5월 헬기사격이 존재했으며, 전 씨가 이를 알고도 회고록을 통해 고 조비오 신부를 원색적으로 비난했다'는 검찰의 공소사실도 모두 부인했다.

전두환 씨는 재판 시작 1분 전 부인 이순자 씨와 함께 재판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전두환 씨는 두 눈을 감고 재판장의 이야기를 들었다. 이후 재판장은 전두환 씨에게 진술거부권을 고지하고 인정신문에 나섰다. 이에 전두환 씨는 "알아듣지 못하겠다"고 했다. 이에 따라 법원은 미리 준비한 '헤드셋'(청각보조장치)을 전두환 씨에게 권했다.

법원 직원 등의 도움으로 헤드셋을 착용한 전두환 씨는 재판장이 다시한번 진술거부권을 고지하고 연령과 주소를 확인하자 그제서야 "예. 맞습니다. 감사합니다"고 말했다.

재판에 검사는 모두 4명이 참석했다. 이들은 전두환 씨 사건을 수사한 전·현 광주지검 소속 검사들로, 미리 준비한 화면 자료를 이용해 전두환 씨의 공소사실을 낭독했다. 전두환 씨는 화면 속 자신의 공소사실과 검사를 번갈아 보며 눈을 감기도 했다.

검사의 공소사실 낭독 다음으로 피고인 모두진술 절차에 이르면서 전두환 씨의 변호인이 일어나 발언을 했다. 변호인은 우선 재판 관할지 위반 설명에 집중, 광주에서의 재판이 위법하다는 그간의 주장을 이어갔다. 공소사실을 전면 부인한 것이다.

양 측의 의견을 청취한 재판장은 증거 정리를 위해 공판준비기일을 한 차례 진행하기로 했다. 이에 오는 다음달 8일 오후 관련 재판을 열 예정이다.

앞서 재판이 끝난 뒤 대기중인 차량에 오르려던 전두환 씨 내외는 모여든 오월단체 회원과 시민에 둘러싸여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전두환 씨는 법정에 들어서기 직전엔 '5·18 발포명령과 광주시민 사과'에 대해 묻는 취재진의 질문에 "이거 왜 이래"라며 격한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또 "광주시민에 사과할 마음이 있느냐"는 질문에도 인상을 쓰며 묵묵부답으로 대응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사자명예훼손 혐의로 재판에 출두한 11일 오후 광주지방법원 앞에서 전 대통령이 탄 차량이 빠져 나가려 하자 한 시민이 막고 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사자명예훼손 혐의로 재판에 출두한 11일 오후 광주지방법원 앞에서 전 대통령이 탄 차량이 빠져 나가려 하자 한 시민이 막고 있다.

오월단체는 "시민 학살로 권력을 빼앗고 죗값을 치르지 않았던 전두환 씨의 뻔뻔함이 39년간 이어졌다"고 비판했다.

5·18 역사 왜곡 처벌 광주운동본부는 이날 오후 광주지법 앞에서 전두환 씨 형사재판 직후 기자회견을 열어 "전두환씨는 학살 책임을 인정하고 광주시민에 즉각 사죄하라"며 "역사 앞에 즉각 회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들은 "알츠하이머, 독감 등을 이유로 재판에 불출석하며 의도적으로 재판을 지연시켰지만 멀쩡하게 골프장에 출입한 사실이 밝혀져 국민의 분노를 샀다"면서 "더 이상 법의 심판을 피할 수 없게 됐다"고 밝혔다.

아울러 "민주주의를 압살한 전두환 씨가 39년이 지나 잘못을 뉘우치고 광주시민에게 사죄할 것이라는 일말의 기대를 했다"며  "하지만 전두환 씨는 광주시민에 대한 학살을 부정하고 자신을 '씻김굿 제물'이라는 망발을 일삼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들은 특히 "5·18 당시 군헬기에서 시민들을 향해 사격을 한 사실은 조비오 신부 뿐만 아니라 수많은 광주시민들에 의해 목격됐고 국립과학수사연구원, 국방부 헬기사격진상조사위원회를 통해서도 공식 확인됐다"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두환 씨는 이를 부인하고 변명과 회피로 일관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고 조비오 신부의 조카 조영대 신부는 "39년 만에 광주 법정에 선 것은 역사적 일이다"면서도 "재판을 통해 전두환 씨의 사죄를 받고 진상규명의 출발점으로 하려 했지만 이날 재판에서는 변호인의 '아전인수'격 변론만 듣게 돼 실망했고 분노를 느꼈다"고 전했다.

기자회견이 끝날 무렵 재판을 마치고 서울로 향하는 전두환 씨의 차량 행렬이 법원 밖으로 나오자 오월 단체 회원 등은 전두환 씨 차량 앞을 가로막아서며 '책임을 인정하라. 사과하라"며 강력하게 항의했다. 전두환 씨가 탄 차량은 경찰의 보호 속에서 항의하는 시민 사이를 빠져나갔다.

재판 전과 마찬가지로 그 후에도 광주지법 안팎에서 거센 항의가 이어졌지만, 전두환 씨는 사과 한 마디 없이 자리를 빠져나가기에 급급한 모습이었다.

전두환 씨는 지난 2017년 4월 발간한 회고록을 통해 '5·18 당시 헬기 기총소사는 없었던 만큼 조비오 신부가 헬기 사격을 목격했다는 것은 왜곡된 악의적 주장이다. 조 신부는 성직자라는 말이 무색한 파렴치한 거짓말쟁이다'라고 주장, 고 조 신부의 명예를 훼손한 혐의(사자명예훼손)로 작년에 재판에 넘겨진 바 있다.

조 신부는 1980년 5·18 민주화운동 시민수습위원으로 활동했다. 이런 이유로 신군부에 의해 체포돼 고 김대중 전 대통령과 함께 옥고를 치렀른 인물이다. 오월 단체와 유가족은 2017년 4월 전두환 씨를 사자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했으며, 검찰은 수사 끝에 전두환 씨를 불구속기소하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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