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 연재-보이지 않는 경제학] 〈38〉금괴 하나가 열 사람에게 팔리다
[ST 연재-보이지 않는 경제학] 〈38〉금괴 하나가 열 사람에게 팔리다
  • 현재욱 선임기자 (jeffhyun@naver.com)
  • 승인 2019.06.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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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기에 나타난 자본주의로 인해 사람들의 생활은 풍요로워졌다. 그러나 자본가들의 무한 이윤획득에 의해 세계 경제는 불균등하고 불공정해지고 있다. 정치적으로도 강대국의 힘이 거세지면서 각종 모순적 요소가 심화되고 있는 형국이다. 이러한 문제의 원인을 알기 위해선 현대 경제의 중요한 쟁점들이 무엇인지 이해하고, 그 쟁점들의 핵심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경제학의 세계에서 벌어지는 모든 현상과 논쟁을 우리가 알아야 할까? 몰라도 무방한 것들이 있지만, 반드시 알아야 할 것들이 있다. 경제학 논쟁이 경제 정책으로 이어지고, 그 정책은 보통 누군가에게는 유리하고 누군가에게는 불리할 뿐 아니라 나라의 운명과도 연결되기 때문이다. 스트레이트뉴스는 오늘날 우리 사회에 뜨거운 쟁점으로 떠오른 경제의 주요 요소들을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본지 선임기자 현재욱의 저작인 「보이지 않는 경제학」을 연재한다. [편집자 주]
보이지 않는 경제학
보이지 않는 경제학

금괴 하나가 열 사람에게 팔리다

상하이금거래소SGE의 금 거래량은 2014년 10월 기준으로 1만 2,077톤을 기록했다. 연말까지 합산한 추정 거래량은 1만 7,000톤이다. 런던금속거래소London Metal Exchange, LME의 거래량은 그 3배가 넘는다. 얼추 계산해도 두 거래소에서만 2014년 한 해에 6만 8,000톤이 사고팔렸다. 전 세계의 중앙은행과 국제통화기금에 비축된 금의 총량은 3만 2,000톤 남짓이다.

이 수치와 비교해 보면 상하이와 런던에서 얼마나 엄청난 물량의 금이 거래되고 있는지 어림할 수 있다. 실제로 이만한 규모의 금괴가 거래 당사자 간에 오갔을까? 시세차익을 노리고 거래소 서버 안에서 사고파는 과정이 수십 번 혹은 수백 번씩 반복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현물로 인도되어 거래소 밖으로 빠져나가는 금은 거래량의 극히 일부다.

그렇다면 저 많은 금은 다 어디서 온 걸까? 오늘날 지구상에서 거래되는 대부분의 금은 깊은 갱도가 아니라 책상 위에서 생산된다. 현대의 연금술사들은 종이로 금을 만드는 비법을 터득했다. 키보드를 몇 번 두드리는 것으로 막대한 금이 프린터에서 찍찍 소리를 내며 인쇄되어 나온다. 현물 금이 금고 안에서 얌전히 잠을 자는 동안, 혹은 존재하지도 않는 금이 증권으로 변신하여 개미투자자들의 계좌로 분배되는 동안, 문서상으로만 금값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월가의 자본가들은 그동안 넘볼 수 없었던 금의 지위를 확 끌어내리는 데 성공했다. 절대화폐였던 금은 수 많은 원자재 가운데 하나로 격하되었다. 마침내 금은 포획되어 우리 속에 갇혔다. 금 사냥에 동원된 사냥개들은 종이 금이다. 월가의 자본가들은 금을 우러르는 민중의 머릿속에 종이 금의 주술을 주입했다.

금을 원한다면 얼마든지 주마. 보거나 만지지만 않는다면. 앞에서 금의 양적완화는 불가능하다고 말했지만, 모든 사람이 종이금을 금이라고 믿는다면 금도 양적완화가 가능하다. 월가의 자본가들이 노리는 것이 바로 이것이었다.

‘비할당 선도판매’란 무엇인가? 미국의 시중은행은 중앙은행에서 금을 빌려서 일반인에게 판매하는 사업을 한다. 금괴는 여전히 중앙은행 금고에 있고, 장부상으로만 시중은행에 임대한 것으로 기록된다. 중앙은행은 건물주가 집세를 받듯이 꼬박꼬박 임대료를 챙기고, 시중은행은 중앙은행 금고에 보관된 금을 고객에게 판매한다. 그러나 고객에게 고유번호가 찍힌 금괴가 할당되는 것은 아니다. 단지 고객이 소유한 금이 은행 금고에 있다는 증서만 발급해 줄 뿐이다. 그래서 ‘비할당’이다.

고객은 그 금을 보거나 만질 수 없다. “내 금은 어디에 있소?”라고 물으면 은행 직원은 장부를 가리키며 “여기에 있습니다”라고 대답한다. 현물 금을 내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은행은 같은 금을 여러 사람에게 거듭해서 팔 수 있다. 사기에 가깝지만 불법은 아니다. 종이금은 이렇게 팽창에 팽창을 거듭하면서 시장에 막대한 물량을 공급한다. 현물 금은 여전히 중앙은행 금고에 있고, 법적 소유권만 이 사람에게서 저 사람에게로 이동한다.

종이 금이 등장하고부터 금은 저축의 수단이 아니라 투기의 대상이 되었다. 심지어 전자상거래를 통한 매도·매수 주문으로 가격 조작도 가능해졌다. 금뿐이겠나? 석유, 밀가루는 물론이고 구리, 니켈, 옥수수, 콩, 돼지고기 등 세계의 모든 선물상품은 실수요자가 아닌 투기꾼의 손아귀에서 놀아난다. 세상 전체가 거대한 도박판이다. 도박에 참가한 사람들은 모두 지정된 게임머니만 사용해야 한다. 게임머니는 물어볼 것도 없이 달러다. 

이제 더 이상 달러의 지위를 위협할 경쟁자는 없어 보인다. 과연 그럴까? 현물 금이 그렇게 약해졌다면 왜 국가부도 위기에 처한 러시아가 오히려 금을 사 모으고 있으며, 중국과 인도는 또 왜 세계의 금을 쓸어 담는 일에 열중하는가? 중국과 인도 양국은 2013년에만 약 2,000톤 이상의 금을 매입한 것으로 추정된다.

제임스 리카즈James Rickards의 분석에 따르면, 중국의 비공식 금 보유량은 4,200톤에 달한다. 미국(8,133톤)에는 못 미치지만 러시아(996톤), 일본(765톤), 인도(558톤), 영국(310톤)에 비해 압도적이다. 유로존Eurozone의 금 보유량은 10,783톤으로 미국을 능가하지만 이는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등 19개국의 금 보유량을 합산한 것이다.

금본위제 시대가 일찌감치 끝났음에도 세계의 중앙은행들이 다량의 금을 비축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충분한 금을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은 자국 화폐의 신뢰도를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된다. 각국 중앙은행의 금 비축은, 금이야말로 가장 확실한 화폐임을 입증하는 증거다.

만약 1997년 외환위기 때 대한민국이 충분한 금을 비축하고 있었더라면 그렇게까지 혹독한 취급은 받지 않았을 것이다. 금본위제는 공식적으로 폐기되었지만, 세계의 주요한 통화들은 여전히 금의 후광에 기대고 있다. 금과 통화가 공존하는 이런 방식을 가리켜 ‘그림자 금본위제’라고 말한다.

종이 금이 거래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면 현물 금의 시대는 끝난 걸까? 만약 전 세계의 금 소유자들이 일제히 금괴은행에 찾아가서 “내 금 내놔라”라고 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어쩌면 그날이 달러의 마지막 날일 수도 있다. 미국 연준의 금 보유고를 믿지 않는 사람이 많다. 미 연준이 발표하는 금 보유량에는 장부상의 종이 금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포트녹스의 금괴는 오래전에 J. P. 모건 같은 골드바은행으로 옮겨졌고, 금이 있던 자리를 텅스텐이 채웠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언젠가 금지금金地金, gold ingot의 실제 보유량이 드러나면 전 세계가 충격에 빠질 수도 있다. <계속>

※ 이 연재는 스트레이트뉴스가 저자(현재욱)와 출판사(인물과사상사)의 동의로 게재한 글입니다. 무단 도용을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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