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이 지난달 28일 인텍스 오사카에서 열린 G20 정상회의 공식환영식에서 의장국인 일본 아베 신조 총리와 악수한 뒤 이동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달 28일 인텍스 오사카에서 열린 G20 정상회의 공식환영식에서 의장국인 일본 아베 신조 총리와 악수한 뒤 이동하고 있다.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 배상 문제를 둘러싼 한일간 외교갈등이 통상분쟁으로 격화되면서 양국간 대치 국면이 본격화하고 있다. 일본이 반도체·디스플레이 핵심 소재 수출 규제라는 강수를 둔 가운데 한국이 세계무역기구(WTO) 제소로 맞서면서 당분간 합의점을 도출할 가능성이 크지 않다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앞서 일본 정부는 반도체 및 디스플레이 제조에 필요한 플루오린 폴리이미드(FPI), 포토 레지스트(PR), 고순도 불산(HF) 등 3개 품목의 대 한국 수출 규제 조치를 발표했다. 이 품목들은 현재 일본이 각각 70∼90%의 점유율로 독과점하고 있기 때문에 국내 제조사들의 생산 차질에 대한 우려도 나오고 있는 상황이다.

이런 가운데 국내 업계는 미중 통상전쟁 장기화와 글로벌 IT 시장 수요 정체 등에 따fms 어려운 상황에서 악재가 추가된 만큼 우려를 감추지 못하고 있는 분위기다. 업계 관계자는 "일본이 소재, 부품, 장비 산업에서 워낙 경쟁력이 강하기 때문에 이번 수출 규제에 따른 파장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면서 "한국에 대한 수출 절차를 강화하는 데 이어 전면적인 수출 금지에 나설 경우 타격이 불가피하다"고 지적했다.

정부는 일본 정부의 대(對) 한국 수출 규제와 관련, WTO 제소를 비롯해 필요한 대응조치를 취하겠다고 강력히 경고했다. 특히 외교부는 주한 일본대사를 통해 일본 정부의 '경제 보복 조치'에 대해 항의하고 유감을 표시하는 등 범정부 차원에서 맞대응에 나섰다.

정부가 이토록 강력한 대응에 나선 것은 일본의 수출 규제 조치가 국내 업계에 미치는 파장이 간단치 않다고 판단한 데 따른 것으로 보인다. 내수 침체에 수출 부진까지 겹치며서 그나마 우리 경제의 대표주자격인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산업이 직접적인 영향권에 들 것이라는 우려가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이 수출 규제 대상에 올린 3개 품목은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산업 등에서 필수 소재로 꼽힌다. 더불어 일본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 삼성전자, SK하이닉스, 삼성디스플레이, LG디스플레이 등은 사태를 예의주시하면서 대응책 마련에 나선 것으로 전해진다.

현재까지는 전면적인 수출 금지가 아닌 수출 절차 강화 수준인 만큼 재고 점검과 대체 수입선 확보 등에 나선 상황이나, 최악의 경우도 발생될 수 있는 만큼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다만 이번 조치가 미국과 유럽 등의 기업에도 연쇄적인 타격을 줄 수 있고, '외교 보복' 차원이라는 비판이 나올 수 있다는 점을 일본 정부도 인지한 만큼 극단적이 상황으로까지 전개되지는 않을 것이란 관측도 나온다.

일각에서는 우리 기업이 이번 수출 규제 품목의 대체 조달 역량을 갖추고 있어 사태가 장기화하지 않을 경우 오히려 경쟁력이 높아질 수 있다는 기대 섞인 전망이 나오기도 한다.

실제로 금융투자업계에서는 양국 외교 문제가 통상 마찰로 번진 데 대해서는 우려를 표시하면서도 상대적인 낙관론도 내놓아 이런 전망을 뒷받침하고 있다.
 
먼저 현대차증권은 3일 일본 정부의 한국에 대한 반도체 소재 수출 규제가 삼성전자의 메모리 제품 가격에는 오히려 긍정적으로 작용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노근창 현대차증권 연구원은 "일본의 주요 소재 수출에 대한 제재는 국내 업체들의 재고 수준이 1개월 안팎이라는 점에서 향후 추이를 지켜볼 필요가 있다"면서도 "일본의 소재 수출 제재는 공급에 영향을 주는 것으로 삼성전자의 핵심 수익창출원(Cash Cow)인 메모리 제품 가격에는 오히려 긍정적"이라고 진단했다.

그러면서 "무엇보다도 한국이 메모리 사업을 과점하고 있다는 점에서, 또 일본의 제재가 이어질 경우 메모리 가격 급등에 따른 부작용이 클 것이라는 점에서 제재가 장기화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이날 NH투자증권도 일본 정부의 반도체 소재 수출규제 조치가 국내 반도체 생산에 영향을 주지 못할 것으로 진단했다.

도현우·박주선 연구원은 "일본의 규제 대상 리지스트 관련 세부 품목 확인 결과 EUV(극자외선)용에 한정된 규제로 확인됐다"며 "EUV용 리지스트는 JSR, 신에츠화학 등 일본 기업만 생산이 가능하지만 아직 삼성전자 등은 EUV 공정을 도입하지 않은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아울러 "D램에서 주로 사용하는 리지스트는 ArF 이머전 노광장비용이고 3D낸드 공정에서 주로 사용하는 리지스트는 KrF 노광장비용"이라며 "ArF 빛의 파장은 193nm이고 KrF 파장은 248nm"이라고 덧붙였다.

특히 이들은 "일본 정부는 193nm 미만 파장의 빛에 최적화한 리지스트만 규제하기로 했으니 이 둘은 규제에 해당하지 않는다"면서 "오는 4일부터 발동되는 플루오르 폴리이미드, 리지스트, 불화수소 등 3가지 품목에 대한 개별 수출 허가 제도는 당장 한국 기업에 미치는 영향이 제한적이며, 오히려 일본 기업들의 피해에 대한 시장 우려가 확산하고 있다"고 부연했다.

이와 달리 키움증권은 일본의 대 한국 반도체 소재 수출 규제가 삼성전자의 비메모리 반도체 산업 확대에 타격을 줄 수 있다고 전망했다.

박유악 연구원은 "삼성전자는 파운드리(반도체 위탁 생산) 사업 확대를 위해 하반기부터 EUV(극자외선) 라인의 양산을 시작할 예정인데, 해당 공정에 사용되는 소재인 EUV용 포토 레지스트를 일본으로부터 전량 수입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전했다.

이어 "일본의 수출 제한으로 고객 확대를 목전에 둔 삼성 파운드리 부문의 영업에 차질이 생길 가능성이 있다"면서 이번 조치가 비메모리 반도체에 미칠 영향을 '부정적(Negative)'이라고 평가했다.

다만 박 연구원은 "이번 조치가 메모리 반도체 업황에 미치는 영향은 미미하다"며 "메모리 반도체의 경우 국내 제조사의 시장 점유율이 워낙 높은 데다 해당 품목이 총 원가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작기 때문에 가격이 오르더라도 수익성 측면에서는 부정적인 효과가 거의 없다"고 분석했다.

그러면서 "국내 반도체 소재 업체들에는 중장기적 성장성 측면에서 매우 긍정적인 상황"이라면서 "이번 사태는 현재 15% 수준에 불과한 반도체 소재의 국산화율을 더욱 빠르게 끌어올리는 촉매제가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일본 입장에서도 반도체 소재 수출에서 차지하는 한국 시장 비중이 상당한 만큼 '최악의 선택'을 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전망도 있다.

한국무역협회 김건우 연구원은 "반도체 설비 시장을 한국 기업들이 상당 부분 차지하고 있어서 일본의 수출규제가 길어질수록 우리 기업에 수출하는 일본 기업들도 상당한 피해를 감수할 수 밖에 없는 산업 구조"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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