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소재 수출규제 이어 ‘백색국가’ 제외 추진 중인 아베 정부
우리 정부, 장기화 가능성 배제 않은 채 외교적 해결 나서
여야 4당과 북한은 일본 비난, 자유한국당의 화살은 우리 정부 향해
대한국 수출규제 배경, 직접 증거 아닌 사린가스 타국 이전 ‘위험성’
아베 정부의 ‘안보상 이유’는 트럼프 대통령의 교역질서 교란과 판박이
수출규제의 배경, ‘개인 대 기업 배상판결의 아시아 확대’일 수 있어


[스트레이트뉴스=도쿄 김태현 선임기자] “정부는 외교적 해결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장기화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일본 정부가 더 이상 막다른 길로 가지 않기를 바란다.”

문재인 대통령이 10일 일본의 수출규제 조치에 대한 대응방안을 모색하기 위해 청와대에서 자산 10조 원 이상 대기업 총수 및 4대 경제단체장과 가진 긴급간담회에서 한 발언이다.

이달 4일부터 단행된 일본의 대(對)한국 반도체 소재 수출규제로 한일관계가 더욱 경색되고 있다. ⓒ스트레이트뉴스/디자인:김현숙
이달 4일부터 단행된 일본의 대(對)한국 반도체 소재 수출규제로 한일관계가 더욱 경색되고 있다. ⓒ스트레이트뉴스/디자인:김현숙

문 대통령은 핵심 부품과 소재, 장비 등의 국산화와 특정국에 의존하는 산업구조 개선에 대해서도 언급했고, 관련 예산의 증액과 세제・금융 지원에 대한 의지도 강조했다. 이날 발언은 전반적으로 일본에 대한 직접적 대응보다 우리의 대비에 초점이 맞춰졌다는 평가다.

지난 1일 일본 경제산업성은 반도체 핵심 소재 및 화학제품에 대한 한국 수출규제를 강화한다고 발표했으며, 지난 4일부터 실제 수출규제를 단행했다. 규제 대상은 스마트폰 디스플레이 핵심 소재인 플루오린 폴리이미드(FPI), 반도체 회로 제조에 사용되는 감광액(PR), 반도체 마무리에 사용되는 고순도 불화수소(HF, 일명 에칭가스) 등이다. 이에 따라 한국 기업이 일본으로부터 해당 품목을 수입하려면 약 90일가량 소요되는 허가신청 및 심사절차를 거쳐야 한다.

또한 일본 정부는 한국을 ‘안보상 우방국가’인 ‘백색국가’ 리스트에서 제외하기로 확정하고 다음 달 시행을 위해 외환법 시행령 개정절차에 들어갔다. 백색국가에서 제외되면 전자부품과 화학소재, 정밀기계 등 한국으로 수출하는 약 1,100여 품목들이 ‘안보상의 이유’로 건별 심사를 거쳐야 한다.

이밖에도 일본 정부는 반도체 이외에 수출규제 확대 및 추가적인 보복조치를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외교적 해결에 초점 맞춘 한국

이번 사태를 대하는 우리 정부의 입장은 ‘감정적으로 대응하기보다 최대한 냉정한 대응기조를 유지한다’는 것이다. 이는 지난 4일 jtbc 인터뷰에서 “상승작용을 원하는 일본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의 의도에 말려드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청와대 김상조 정책실장의 발언에서도 읽을 수 있다.

이를 위해 정부는 외교전략조정회의를 출범시켰다. 일본의 대(對)한국 수출규제가 한일 양국 모두에 피해를 입힌다는 여론을 환기시키고, 미중무역전쟁과 같은 현안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해서다.

일본의 수출규제 조치 이후 우리 정부는 감정적 대응을 자제하는 대신, 외교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분주히 움직이고 있다.

청와대는 세계무역기구(WTO) 제소를 추진 중이며, 미국을 비롯한 주요국들을 상대로 일본의 수출규제가 세계무역기구의 자유무역정신에 위배된다는 사실을 알려나간다는 계획이다.

에티오피아를 방문 중인 강경화 장관은 10일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과 통화를 갖고 우리 기업이 입을 피해뿐 아니라 일본의 조치가 글로벌 공급체계를 교란시키고, 한일 및 한미일 협력에 바람직하지 않을 것이라는 우려를 전달했다.

김현종 청와대 국가안보실 2차장과 김희상 외교부 양자경제국장은 10일 워싱턴에 도착했다. 일본이 취한 수출규제 조치가 국제규범에 어긋나고 세계교역질서에 위협이 된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다. 김현종 차장은 백악관과 상하원을 방문한 자리에서 “한국을 위해 노력하겠다”는 답변을 얻어낸 것으로 알려졌다.

왼쪽부터 대기업 총수 및 경제단체장들과 가진 긴급간담회에서 발언하는 문재인 대통령,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과 통화하는 강경화 외교부 장관, 워싱턴을 방문한 김현종 청와대 국가안보실 2차장, 관계 장관들과 대응조치를 논의하는 이낙연 국무총리 ⓒ스트레이트뉴스/디자인:김현숙
왼쪽부터 대기업 총수 및 경제단체장들과 가진 긴급간담회에서 발언하는 문재인 대통령,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과 통화하는 강경화 외교부 장관, 워싱턴을 방문한 김현종 청와대 국가안보실 2차장, 관계 장관들과 대응조치를 논의하는 이낙연 국무총리 ⓒ스트레이트뉴스/디자인:김현숙

산업통상자원부도 실태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박태성 산업통상자원부 무역투자실장은 11일 가진 브리핑에서 “일본경제산업성이 안전보장무역정보센터(CISTEC) 홈페이지에 공개한 불법수출 사례에서도 일본산 불화수소가 우리나라를 경유해 북한으로 반출되거나 적발된 사례는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며 일본 정부를 향해 근거 없는 비난을 중단하고 의혹 제기에 대한 구체적인 증거를 제시할 것을 촉구했다.

이밖에 이낙연 국무총리는 지난 6일 강경화 외교부 장관, 홍남기 기획재정부 장관, 성윤모 산업통상자원부 장관 등과 함께 대응조치를 논의했고, 7일에는 청와대 김상조 정책실장이 5대 그룹 총수들과 만나 대응방안을 논의하기도 했다.

일본 비난하는 여야 4당과 북한, 자유한국당은...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은 일본에 대한 발언 수위를 높였다. 이해찬 대표는 11일 오전 열린 ‘일본경제보복대책특위’ 1차 회의에서 일본의 수출규제 조치를 “대법원의 강제징용 배상판결에 대한 명백한 보복행위”, “비정상적이고 터무니없는 수출규제이자 정치적 목적을 가진 일방적 경제침략”으로 규정하면서 대응을 위해 최대 3,000억 원 수준의 예산을 추가경정예산에 반영키로 했다.

정의당과 바른미래당, 민주평화당 등 야3당도 일본을 향한 비난에 가세했다. 특히 바른미래당 하태경 의원은 일본 안전보장무역정보센터(CISTEC) 자료를 확인한 결과 불화수소를 북한에 밀수출한 나라가 한국이 아닌 일본이라는 사실을 밝히기도 했다.

북한도 비난 대열에 가세했다. 노동신문은 10일자 기사에서 일본의 대한국 수출규제 조치에 대해 “지난날 우리 민족에게 저지른 천인공노할 죄악에 대해 조금도 인정하지 않고 사죄와 배상을 한사코 외면하면서 과거사 문제를 덮어버리고, 다시금 침략의 길에 나서려는 일본 반동들의 책동이 얼마나 엄중하고 무분별한 단계에 이르고 있는지”라며 거세게 비난했다.

그러나 제1야당인 자유한국당의 화살은 일본보다 청와대와 정부로 향하고 있다. 황교안 대표는 11일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수입선 다변화나 원천기술 확보 같은 대책을 기업들이 몰라서 안 하고 있겠느냐”며 기업인들을 청와대로 불러 단순대책만 반복했다며 날을 세웠다.

나경원 원대대표는 “정부여당이 반일 감정에 편승하는 무책임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며 문재인 대통령을 향해 “왜 트럼프 대통령에게 일본에 대한 설득을 부탁하지 못하는지 묻고 싶다”고 성토했다.

자유한국당 황교안 대표와 나경원 원내대표(자료:sbsnews 화면 갈무리)
자유한국당 황교안 대표와 나경원 원내대표(자료:sbsnews 화면 갈무리)

대(對)한국 수출규제의 배경은 직접 증거 아닌 ‘위험성’

“부적절한 사안이 발생했다.”

이달 1일 일본 아베 정부가 대(對)한국 수출규제를 발표하면서 내세운 이유다. 이를 두고 한국에서 ‘근거가 불명확한 조치’라는 반응이 나오는 동안, 마이니치(毎日), 아사히(朝日), 니혼게이자이(日本経済) 등 일본 유수의 매체들도 아베 정부를 향해 “조치를 철회하라”며 이례적인 행보를 보인 바 있다.

마이니치는 2일자 사설에서 일본의 조치를 두고 “(21일 열리는) 참의원 선거 순항을 위한 아베 정권의 의도”라고 했고, 니혼게이자이는 “부적절한 사안이 발생했다고 했지만, 어떤 사안인지 구체적으로 전혀 밝히지 않고 있다”며 “수출규제 조치를 철회하라”고 촉구했다.

한편 일본 국영방송 NHK는 이번 수출규제 조치의 배경으로 한국으로 수출된 ‘독성신경가스’인 ‘사린가스’의 타국 이전 위험성을 들었다.

NHK는 지난 9일 익명을 요구한 정부 관계자의 발언을 인용, “(한국으로 수출되는) 원재료는 화학무기인 사린 등으로 전용될 가능성이 있지만, 일부 한국기업이 서둘러 납품을 강요하는 일이 일상화됐고, 일본 경제산업성이 이를 문제시 하면서 그런 상황이 계속된다면 군사전용 물자가 한국에서 대량살상무기를 개발하는 타국으로 넘어갈 위험을 배제할 수 없다”는 점이 대한국 수출규제 조치를 단행한 배경이라고 보도했다.

결국 확실한 증거가 아닌 ‘위험성’을 이번 수출규제 조치의 배경으로 지목한 셈이다. 그러나 아베 신조 총리는 지난 3일과 4일 각각 아사히TV뉴스와 NHK 프로그램에 출연해 “(한국은) 국제사회의 국제법 상식에 따라 행동해 주기를 바란다”고 했다. 또한 지난 7일에도 후지TV 토론회에 참석해 “한국이 정직하게 수출관리를 하고 있음을 확실히 보여주지 않으면, 우리는 내보낼 수 없다. 한국이 대북제재를 지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당연하다”며 발언 수위를 지속적으로 높여가고 있다.

총리사무실에서 재팬타임스(Japan Times)와 인터뷰 중인 아베 신조 총리(자료:by Martin Holtkamp, Japan Times)
총리집무실에서 재팬타임스(Japan Times)와 인터뷰 중인 아베 신조 총리(자료:by Martin Holtkamp, Japan Times)

아베 총리의 트럼프 대통령 ‘따라하기’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취임한 후 미국은 유럽 및 세계 각국으로부터 “관세와무역에관한일반협정(GATT) 이후 정립된 세계교역질서를 교란시킨다”는 비난을 받아왔다. 트럼프 행정부가 안보상의 이유를 들어 철강과 알루미늄, 자동차 등에 대해 대미 수출규제 조치를 취해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같은 미국의 수출규제 조치를 세계무역기구에 제소한 사례는 극히 드물다. 관세와무역에관한일반협정(GATT) 제21조에 ‘안전보장상의 이유에 따른 무역제한’은 예외로 두고 있고, 세계무역기구가 ‘안전보장상의 이유’에 대해 명확한 범위와 규정을 내리지 않은 탓에 미국의 각종 수출규제 조치가 세계무역기구 규정에 위반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아서다. 우리 정부의 세계무역기구 제소 방침에 대한 무용론이 제기되는 이유다.

일본 아베 정부의 이번 대한국 수출규제 조치는 세계무역기구의 정신인 ‘다자주의’ 및 ‘법적 분쟁해결’과 배치되는 보호무역주의 행보이다. 그런 점에서 트럼프 대통령의 수출규제 조치와 꼭 닮아 있으며, 정치・외교적 사안에 교역을 끌어들였다는 점에서 조금 더 악의적이다.

일본 수출규제 조치의 진짜 배경은 ‘강제징용 배상판결의 아시아 파급’ 우려?

일본이 수출규제 조치를 내린 배경으로 가장 먼저 언급되는 것은 오는 21일 있을 일본 참의원 선거를 노린 국내 정치용이라는 것이다. 아베 신조 총리는 그동안 일본이 전쟁을 할 수 있는 ‘정상국가’로 만들기 위해 노력해왔다.

미일 군사협력이 강화되는 추세, 그리고 최근 부상한 일본의 유엔군사령부 전력제공국 참여 시나리오도 이와 무관치 않다. 일본이 전쟁을 할 수 있는 정상국가가 되기 위해서는 평화헌법을 개정해야 하고, 그러려면 개헌선 확보가 필수다.

두 번째로 언급되는 배경은 우리 대법원의 강제징용 배상판결이다. 지난해 10월, 우리 대법원이 강제징용 배상판결을 내린 이후, 일본 정부 내에서는 비자발급 정지, 송금 정지, 불화수소 수출금지와 같은 보복조치가 언급된 바 있다.

현재 이 사안을 두고 양국이 충돌하는 지점은 1965년 맺은 한일협정이다. 일본은 그 협정으로 보상문제는 해결됐으며 대일 청구권이 소멸됐다는 입장이다. 이것이 아베 신조 총리가 한국에 대해 “국제법을 준수하라”고 주장하는 배경이다.

하지만 한국은 당시 일본이 지불한 3억 달러는 일본이 ‘독립축하금’, ‘경제협력자금’으로 지원한 돈일 뿐 배상금이 아니며, 우리 대법원도 배상금이 아니라고 판단했으므로 대일 청구권이 여전히 살아 있다는 입장이다.

이는 일본이 3년 동안 지배한 인도네시아와 필리핀에 각각 2억2,300만 달러, 5억5,000만 달러를 지불한 반면, 36년 동안 지배한 한국에는 고작 3억 달러만 지불한 사실에서도 인정되는 대목이다.

2차 대전 당시 행군하는 일본군(황군)과 일본의 점령지(자료:ccmms/youtube) ⓒ스트레이트뉴스/디자인:김현숙
2차 대전 당시 행군하는 일본군(황군)과 일본의 점령지(자료:ccmms/youtube) ⓒ스트레이트뉴스/디자인:김현숙

그러나 일본이 수출규제 조치를 내린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따로 있다는 주장도 있다.

“저번에 우리나라 대법원이 강제징용 배상판결을 내렸잖아요. 그건 국가 대 국가가 아니라, 개인 대 기업이에요. 그걸 가만히 놔두면 어떻게 되겠어요? 중국과 필리핀, 인도네시아 같은 동남아 국가에 있는 개인들도 모두 소송을 걸겠죠? 그게 이번 수출규제 사태의 진짜 배경 아닐까요?”

여권 한 중진 의원의 설명이다. 국가 대 국가의 청구권 문제가 아니라, 개인 대 일본기업의 배상 문제이며, 만약 한국 대법원의 판결에 따라 일본기업들의 배상이 이루어진다면,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의 소송이 아시아 전역에서 제기될 것이므로 일본으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를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오늘(12일), 이 문제를 풀기 위한 한일 간 실무급 대화가 진행될 예정이지만, 서로의 입장을 확인하는 선에서 그칠 전망이다. 전면전으로 치달을 경우, 한일 양국이 입을 피해는 물론, 한미일 삼국 관계에도 악영향이 불가피하다.

사안이 아무리 중하다 해도 정치・외교적 사안에 국제교역을 끌어들인 일본의 행보는 옳지 않다. 더욱이 국내 정치가 어려울 때마다 망언과 이슈몰이를 통해 한국을 이용해왔던 일본 정부라 우리 국민들이 느끼는 분노는 더 크다.

수출규제에 수출규제로 맞대응하는 사태는 발생하지 않아야 한다. 한국의 배후에는 중국과 동남아시아가 있다. 중립을 지키던 미국마저 한국의 입장에 동조하는 모양새다. 가뜩이나 ‘중국제조(中國製造) 2025’와 ‘일대일로(一帶一路, One Belt One Road)’에 우려의 시선을 보내는 터에, 한국 반도체가 위축될 경우 중국제조 2025의 척추나 마찬가지인 ‘반도체 굴기(崛起)’가 급부상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문재인 대통령이 언급한 ‘막다른 길’이다. 일본은 막다른 길에서 돌아서야 한다.
bizlink@straigh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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