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답다, 일본인답다'는 환상에 대하여
'일본답다, 일본인답다'는 환상에 대하여
  • 김세헌 기자 (betterman89@gmail.com)
  • 승인 2019.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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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는 어느 서점에 가든 일본 문화론에 대한 책들이 서가의 한편에 빼곡히 자리 잡고 있다. 일본인만큼 자기 자신의 정체성에 천착하는 민족이 없다는 방증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역설적으로 일본을 형성하는 정체성의 기반이 다소 불확실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일본은 남에게 폐를 끼쳐서는 안 된다는 질서에 대한 강박증과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폭력적이거나 관대한 성문화가 공존하는 나라다. '일본'이라는 나라의 무의식에 대체 무엇이 자리잡고 있고, 현대 일본인의 '정신'에는 무엇이 깃들여 있는 걸까. <일본정신분석>은 이를 수행하는 데 있어서 라캉의 관점을 도구로 삼는다.  

라캉은 우리의 삶과 세계에 존재하는 균열과 파열의 틈새를 잘 들여다본 사상가로 알려져 있다. 그런 그에게 주체는 사유하는 의식의 주체가 아니라 욕망하는 무의식의 주체다. 이러한 라캉의 개념을 통해 일본 문화에 나타난 일본의 무의식적 주체의 이면을 들여다봄으로써 일본의 무의식을 의식의 표층으로 끌어올리는 정신분석을 수행할 수 있다.

이를 위해 일본의 전통 사회와 현대사회 모두를 반영하는 유용한 거울인 영화와 애니메이션에 주목해보자. 일본 영화와 애니메이션은 치밀하고 조직적인 사회시스템 안에서 무의식적으로 억압돼 있는 일본인들의 보이지 않는 틈새를 서사적 이미지로 보여준다. 책에서 다루는 영화와 애니메이션은 대체로 한국 독자에게도 친숙한 것들이다.

특히 일본의 서브컬처 전반에 대해 높은 이해와 관심을 갖고 있다면 일본의 정신과 문화를 관통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일본 영화와 애니메이션 속에 나타난 정체성 위기의 정신적 상황, 일본 특유의 집단주의적 주체성 혹은 부재하는 주체의 집단주의적 문화, '영원의 소년'이나 '구원의 소녀'를 둘러싼 '주체의 성장'이라는 주제, 성적 과잉과 관련된 욕망의 문제 등이 대표적이다.

이러한 문제들은 현대 일본 사회가 실제로 겪고 있는 난제를 배경으로 한다. 전통과 현대의 불협화음이 점점 커져가는 오늘날, 부재하는 주체의 집단주의가 뿌리 깊게 형성된 이러한 일본의 문화적 풍토에서 '개인의 확립', 즉 주체의 형성과 성장과 관련된 문제는 매우 중요한 사회적 과제로 부각됐다.

소노 시온의 영화(<자살클럽>, <노리코의 식탁> 등)와 신카이 마코토(<초속 5센티미터>, <너의 이름은> 등), 안노 히데아키(<신세기 에반게리온>), 미야자키 하야오(<원령공주>, <이웃집 토토로>,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하울의 움직이는 성> 등)의 애니메이션들은 우리에게 일본적 주체가 보이는 분열적 양상을 설명해주는, 현대 일본 사회에 숨어 있는 이러한 틈새의 조각들을 우리 앞으로 끄집어내 보여주는 확대경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서구에서 형성된 라캉의 사상만으로 일본정신을 들여다보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이에 일본의 문화코드를 도입해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일본인에게 내면화된 문화코드를 이해하는 것은 일본의 정신을 이해하는 첫걸음이다.

일본은 '야마토다마시이'라는 고유한 일본정신을 형성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왔는데, 이러한 고유한 집단적 정체성을 위해서는 집단의 논리가 개인의 주체성에 앞설 수밖에 없었다. 수많은 일본문화코드에 내재하는 일본정신의 핵심은 각자가 주어진 자리에서 자기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맡은 역할에 최선을 다하는 것(무사(無私)의 마코토(誠))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일본적 집단주의를 구성하는 무사의 마코토라는 중심은 주체의 부재를 드러낸다는 점에서 실체가 존재하지 않는 라캉적 주체와 연결된다. 한국 사회에 비해 훨씬 더 촘촘하고 조밀한 일본의 사회시스템과 일본인의 인간관계를 이해하는 데 있어 라캉 정신분석과 일본 문화론의 조합은 제법 현실적이다.

일본에 대한 정체성을 둘러싼 균열과 진동은 궁극적으로 일본이라는 집단이 마치 양파와 같이 알맹이가 없다는 것을 드러낸다. 실재하지 않는 고유성을 쌓아올리기 위해 천황제와 같은 상징계적 권력을 강화시키고 집단적 정체성을 엄격하게 강조해온 일본 사회는 '욕망의 끝'이라 할 수 있는 주이상스를 금지하는 '금지 사회'의 속성이 강했다.

그러나 이러한 금지 사회를 유지시키기 위해서는 주체가 사적인 방식으로 주이상스를 추구하도록 함으로써 불만을 완화할 필요가 있었다. 이로 인해 흔히 아는 것처럼 일본의 영화, 애니메이션, 포르노 등에서 자극적이고 도착적인 욕망이 강하게 발달하게 된 것이다.

이렇듯 일견 상반돼 보이는 것이 공존하는 일본 문화를 엿보면 일본만의 고유한 문화가 존재한다는 일본 문화론이 그저 '환상'에 불과하다. 고유성에 집착하는 일본 문화의 환상은 일본인이 과연 누구이며 일본인과 한국인이 역사적으로 어떤 밀접한 관계에 있었는지를 올바르게 알 수 있는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