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세기에 나타난 자본주의로 인해 사람들의 생활은 풍요로워졌다. 그러나 자본가들의 무한 이윤획득에 의해 세계 경제는 불균등하고 불공정해지고 있다. 정치적으로도 강대국의 힘이 거세지면서 각종 모순적 요소가 심화되고 있는 형국이다. 이러한 문제의 원인을 알기 위해선 현대 경제의 중요한 쟁점들이 무엇인지 이해하고, 그 쟁점들의 핵심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경제학의 세계에서 벌어지는 모든 현상과 논쟁을 우리가 알아야 할까? 몰라도 무방한 것들이 있지만, 반드시 알아야 할 것들이 있다. 경제학 논쟁이 경제 정책으로 이어지고, 그 정책은 보통 누군가에게는 유리하고 누군가에게는 불리할 뿐 아니라 나라의 운명과도 연결되기 때문이다. 스트레이트뉴스는 오늘날 우리 사회에 뜨거운 쟁점으로 떠오른 경제의 주요 요소들을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본지 선임기자 현재욱의 저작인 「보이지 않는 경제학」을 연재한다. [편집자 주]

보이지 않는 경제학

거의 모든 것의 증권화

CME그룹의 전자플랫폼을 통해 하루에 거래되는 외환선물Foreign Exchange Futures의 규모만 해도 1,000억 달러가 넘는다. 에너지선물은 하루 평균 180만 건의 계약이 이루어진다.

전자플랫폼 상에서 만들어진 이 유동성의 의미는 무엇인가? 세상의 거의 모든 실물상품이 무형의 파생상품으로 전환되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시카고상업거래소CME가 취급하는 옥수수, 대두, 소맥(밀), 대두(콩), 대두유(콩기름), 생우, 비육우, 돈육은 모두 전자화한 상품, 즉 0과 1의 조합이다.

원유와 천연가스도 0과 1의 조합이고, 금, 은, 구리, 니켈, 아연 또한 0과 1의 조합이다. 그뿐인가? 유로화와 엔화는 물론이고 호주 달러와 브라질 헤알도 0과 1의 조합이다. 10년 만기 미국 국채와 S&P500지수 주간옵션도 0과 1의 조합이다.

게다가 이 모든 상품은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상품’이다. 그래서 선물先物, futures 아닌가? 선물거래소의 고객들은 미래를 사고판다. 농산물 가격이 오를 가능성, 석유 가격이 떨어질 가능성, 심지어는 미래의 날씨와 주가지수까지 거래된다. 대체 누가 미래의 가격을 알겠는가? 그래서 선물시장은 투기에 가깝고, 사실상 도박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

지금은 현물로 존재하지 않지만 미래의 어느 시점에 약속한 가격으로 약속한 물량을 주고받는다는 생각은 오래전부터 있었다. 가을에 거둘 농작물을 봄에 미리 사는 입도선매立稻先賣가 대표적인 사례다.

이런 계약을 가능케 하는 것은 신용이다. 그 약속이 지켜질 거라는 믿음이 없으면 누가 이런 거래에 큰돈을 걸겠는가? 물론 약속이 합리적이지 않은 경우도 있고 시쳇말로 바가지를 쓸 수도 있다. 그러나 약속을 깬 자는 쪽박을 차거나 금융시장에서 퇴출된다. 만약에 대형 금융기관이 약속을 어기면 어떻게 될까? 대참사가 벌어진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떠올리면 바로 이해할 것이다.

미래의 가격을 누가 아나? 아무도 모른다. 이쯤 되면 증권이 빚어낸금융자본주의의 정체가 분명해진다. 돈 놓고 돈 먹기. 증권시장은 글로벌 도박장이다. 왜 ‘카지노 자본주의’가 금융자본주의의 다른 이름이 되었는지 모를 사람은 없을 것이다.

석유값이 오르는 것은 차를 타고 다니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인가? 아니면 그동안 한국 사람들이 겨울에 보일러를 너무 많이 때거나 여름에 에어컨을 너무 많이 틀었기 때문인가? 날마다 공장을 돌리는 사람들과 그들에게 석유를 공급하는 사람들이 시장에서 만나 석유값을 결정하는가?

과거에는 어느 정도 그랬다. 이른바 ‘실수요實需要’와 ‘실물 공급’이 가격을 결정했다. 그러나 지금의 세상은 30년 전과 완전히 다른 세상이다. 상상도 할 수 없는 규모의 ‘가수요假需要’가 세상을 움직이고 있다. 꺼질 줄 모르는 인간의 욕망이 석유에서 달러 자산으로, 주식에서 채권으로, 곡물에서 금으로 이동하며 가상의 수요를 창출하고 필요 이상의 공급을 부추기는가 하면 어느 날 갑자기 ‘거래 절벽’을 연출한다.

평생 흙이라곤 만져본 적도 없는 사람이 러시아의 밀밭을 기웃거리고 브라질 옥수수에 투자한다. 신재생에너지에 관심도 없던 사람이 중국의 태양광 패널 회사에 투자하고, 반도체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반도체 기업의 주식을 열심히 사 모은다.

정육점 주인도 아니면서 미국산 쇠고기를 왕창 사고, 주유소 사장도 아닌데 밤새도록 컴퓨터 앞에서 휘발유와 가스를 사고판다. 과거의 산업사회와 본질적으로 다른 새로운 세상이다. 애덤 스미스도 카를 마르크스도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글로벌 도박판을 만들어낸 것은 종이쪽, 바로 달러를 비롯한 온갖 증권 나부랭이다.

세상은 거대한 도박판이다. 도박에 참여하려면 일단 재산을 달러나 다른 증권으로 바꾸어야 한다. 증권은 세상을 돌고 돌면서 판돈을 키운다. 증권이 창출하는 가수요는 호황의 봉우리를 더 높이고 불황의 골짜기를 더 깊게 만든다. 월가의 금융가들은 판돈을 키우는 수법에 달통한 사람들이다.

원리는 간단하다. 달러와 파생상품을 찍어서 돌리는 것이다. 그들은 양손에 회전율과 레버리지라는 거품 제조기를 들고 있다. 그 결과 파생상품 거래량이 세계총생산의 10배 가까이 팽창했다. 미국 GDP에서 실물경제가 차지하는 비중이 30퍼센트에 못미친다는 주장도 있다.15 세상을 이렇게 바꾼 동인은 세 가지다.

첫째로 달러와 금의 분리, 둘째가 자본의 손쉬운 이동, 셋째가 거의 모든 것의 증권화다.

첫 번째 사건은 1971년에 있었던 닉슨쇼크, 즉 달러의 금태환을 중지했을 때 일어났다. 그때부터 달러는 금에서 독립하여 훨훨 날아오르게 되었다. 노동이 아니라 인쇄기나 컴퓨터 자판이 부를 창조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두 번째는 금융제도의 변화와 인터넷 발달에 따른 결과다. 자본의 이동을 가로막거나 방해하는 대부분의 제도는 월가의 요구에 맞추어 변경되거나 해체되었고, 인터넷 상거래는 거의 모든 원자재를 전자상품으로 바꾸어 놓았다.

세 번째가 결정적인 요인이다. 다시 영화 〈빅쇼트〉로 돌아가 보자.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미국증권화포럼American Securitization Forum’이라는 모임이 열린다. 금융계의 온갖 어중이떠중이가 모여 정보를 교환하고 돈 자랑을 하는 모임이다. ‘증권화securitization’는 현대 금융자본주의를 규정하는 키워드다. 다른 말로 ‘유동화’라고도 한다.

움직이기 어려운 것을 쉽게 움직일 수 있도록 증권이란 종이쪽으로 치환한다는 뜻이다. 부동산은 유동성이 극히 낮은 자산이다. 그러나 주택저당증권으로 바뀌는 순간 날개를 달고 훨훨 날아다닌다. 증권화는 모든 자산의 유동성을 극대화해서 누구나 쉽고 빠르게 베팅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만약 다우지수 등락에 일희일비하고 밤새 뉴욕상품거래소COMEX 시세판을 들여다보고 있다면, 당신은 아마도 그 도박판에 초대받은 사람일 것이다. 원자재 펀드나 파생결합증권DLS에 큰돈을 꽂아 넣고 제롬 파월Jerome Powell(현 연준 의장)의 눈치를 보고 있다면 제법 패를 읽을줄 아는 사람이다.

돈을 따건 잃건 모니터 뒤의 딜러가 수수료를 꼬박꼬박 챙기는 것을 보면서 화가 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그 판에서 빠져나오기는 쉽지 않다. 도박이란 게 원래 그렇다. 탈탈 털려야 정신차리게 된다.

※ 이 연재는 스트레이트뉴스가 저자(현재욱)와 출판사(인물과사상사)의 동의로 게재한 글입니다. 무단 도용을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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