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 중반의 구소련 연방 체코슬로바키아, 지적이지만 냉소적인 청년 루드빅은 여자친구에게 보내는 엽서에 별 뜻없이 농담을 끄적였다. '트로츠키 만세!'. 당시는 스탈린주의가 휩쓸고 있었던 시기, 호시탐탐 인민을 감시하던 당국이 그냥 넘어갈리가 없다. 루드빅은 공산당에서 추방되고 트로츠키주의자로 몰려 수용소로 끌려가 고초를 겪게 된다. 밀란 쿤데라의 소설 <농담>에 나오는 이야기.

1984년 어느 날, 등산을 갔다가 막걸리를 한 잔 걸친 이 씨가 허공에 대고 나라꼴에 대해 불평불만을 쏟아냈다. 누군가가 신고를 했고 이 씨는 끌려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10개월의 징역살이를 한다. 한국 현대사에 있어 블랙코미디같은 '막걸리 보안법'의 등장. 안타깝게도 이것은 소설이 아니다. 

2018년 2월 어느날 강원도 평창올림픽, 남북단일팀과 스위스와의 여자 아이스하키 경기에 북한 응원단이 '어떤 남성의 가면'을 응원도구로 사용한다. 누군가가 이것을 '김일성 가면'이라고 주장하고 새누리당 하태경 의원이 문제를 제기하며 사태는 일파만파. 통일부와 북한이 공식적으로 '그냥 미남 가면'으로 해명하고 해프닝으로 일단락. 하지만 아직도 '김일성 가면'으로 믿고 기억하는 사람이 많다.

2019년 어느날, 이번에는 경기도 성남의 시민단체가 개최한 행사에서 무대 소품으로 '김일성 배지'가 등장한다. 공연 중 북한사람 역을 맡은 시민이 가슴에 부착한 종이문양에 보수단체가 분기탱천. 한국당 민경욱 의원이 SNS에 언급하며 논란에 불을 댕기고 중립을 가장한 언론은 검증없이 현상만 보도한다. 민경욱의 '어그로'는 오늘도 성공.

자유주행 자동차와 AI가 유행하고 '반국가단체의 수괴'가 '우방국' 미국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하는 21세기 대한민국의 한 편에, 국가보안법과 표현의 자유가 충돌하고, 팩트와 맥락이 뒤섞이고, 눈물이 비웃음이 되고, 풍자가 분노가 되는 '거대한 농담의 시대'를 살고 있다. 참을 수 없는 존재들의 가벼움이여, 트로츠키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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