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 연재-보이지 않는 경제학] 〈63〉시장에는 숫자만 있다
[ST 연재-보이지 않는 경제학] 〈63〉시장에는 숫자만 있다
  • 현재욱 선임기자 (jeffhyun@naver.com)
  • 승인 2019.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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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기에 나타난 자본주의로 인해 사람들의 생활은 풍요로워졌다. 그러나 자본가들의 무한 이윤획득에 의해 세계 경제는 불균등하고 불공정해지고 있다. 정치적으로도 강대국의 힘이 거세지면서 각종 모순적 요소가 심화되고 있는 형국이다. 이러한 문제의 원인을 알기 위해선 현대 경제의 중요한 쟁점들이 무엇인지 이해하고, 그 쟁점들의 핵심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경제학의 세계에서 벌어지는 모든 현상과 논쟁을 우리가 알아야 할까? 몰라도 무방한 것들이 있지만, 반드시 알아야 할 것들이 있다. 경제학 논쟁이 경제 정책으로 이어지고, 그 정책은 보통 누군가에게는 유리하고 누군가에게는 불리할 뿐 아니라 나라의 운명과도 연결되기 때문이다. 스트레이트뉴스는 오늘날 우리 사회에 뜨거운 쟁점으로 떠오른 경제의 주요 요소들을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본지 선임기자 현재욱의 저작인 「보이지 않는 경제학」을 연재한다. [편집자 주]
보이지 않는 경제학

 

시장에는 숫자만 있다

유목민에게 구조된 해리와 낙타는 제3의 거점에서 푹 쉬며 기운을 회복했다. 해리는 전직 펀드 매니저답게 주도면밀했다. 여행에 필요한 물품은 베이징에서 출발하기 전에 이미 거점별로, 정해진 날짜에, 지정된 장소로, 계약한 수량이 배송되도록 계획되어 있었다. 위험을 분산하는 것은 투자자들이 흔히 쓰는 수법이다. 해리는 허름한 잡화점에서 값싼 디지털 카메라를 구입했다. 판매원의 강권에 못 이겨 가짜임이 분명한 발렌타인 17년산도 한 병 샀다.

해리는 충분한 물과 식량을 낙타 등에 싣고 다시 비단길 여행에 나섰다. 처음 이틀은 만사가 순조로웠다. 해리는 날이 따뜻해지자 반바지로 갈아입었고, 부드러운 풀로 배를 채운 낙타는 종일 걸어도 불평하지 않았다. 그러나 세상일이 다 계획대로 되는 것은 아니다. 출발한지 사흘째 되는 날 오후, 낙타는 거친 숨을 내뿜으며 자꾸만 뒷걸음질을 쳤다. 갑자기 해가 붉어진 느낌이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거대한 장막 같은 것이 몰려오고 있었다. 사막의 폭군, 모래폭풍이었다. 야차 같은 모래바람은 곧 그들을 덮쳤다. 수천 개의 발톱이 땅을 긁는 소리가 점점 커지더니 마침내 세상의 모든 소리를 삼켜 버렸다. 사방이 칠흑처럼 깜깜해졌다.

낙타는 주저앉아 머리를 땅에 파묻고, 해리는 낙타 꼬리를 붙잡고 바짝 엎드렸다. 크고 작은 모래알이 해리의 종아리와 허벅지를 사정없이 때렸다. 낙타 등에서 뭐가 툭 끊어지더니 바람에 휩쓸려 멀리 사라졌다. 모래귀신이 울부짖으며 머리 위를 지나는 동안 해리는 바람에 날려 간 것이 사소한 것이기를 간절히 바랐다.

모래바람이 가라앉자 세상은 다시 고요해졌다. 그 몇 분 사이에 해리의 종아리에는 별꽃 같은 피멍이 군데군데 생겼다. 그는 상처를 돌볼 겨를도 없이 낙타 등에서 없어진 물건부터 확인했다. 친구 이상의  존재가 된 낙타에게 그의 비상식량인 건초 더미가 통째로 날아갔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지는 않았다.

길마에 걸쳐 놓았던 물주머니가 보이지 않자 해리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는 모래바람이 훑고간 방향을 따라가며 땅바닥을 주의 깊게 살폈다. 다행히도 물주머니는 멀리 안 가고 모래 속에 반쯤 파묻혀 있었다. 그러나 마개가 열린 물주머니에서 반 이상의 물이 흘러나와 모래 속으로 스며든 뒤였다.

낙관적인 해리는 스스로를 안심시켰다. ‘괜찮아, 조금만 더 가면 오아시스가 있어.’ 짐이 가벼워진 낙타와 해리가 오아시스에 도착한 때는 다음 날 해질 무렵이었다. 사실 그곳은 샘물이 솟아 호수를 이룬 오아시스가 아니라 깊은 우물이 하나 있는 작은 마을이었다. 주민은 소와 양을 치며 우물을 지키는 중년 사내와 때가 되면 집을 찾는 유목민 몇 가구뿐이었다.

해리는 물부터 한 모금 청했다. 양치기는 우물에서 두레박으로 길어 올린 물을 해리와 낙타에게 나누어주었다. 물은 달고 차가웠다. 양치기는 유창한 영어로 물었다.

“미국인이오?”
“그렇습니다.”
“낙타에겐 공짜지만 당신에겐 물값을 받아야겠소.”
“얼마든지 드리지요. 이 물주머니를 가득 채우는 데 얼마입니까?”
“얼마든지? 낙타와 식량을 제외하고, 당신이 가진 전 재산을 내놓으시오.”
“아니, 그런 경우가 어디 있습니까? 곤경에 빠진 사람의 처지를 이용하려는 수작 아니오?”

양치기의 시선은 싸늘했다.

“싫으면 관두시오. 당신네 미국인들도 2004년 허리케인 찰리가 미국을 덮쳤을 때 평소 250달러 하던 소형 발전기를 2,000달러에 팔지 않았소? 2달러짜리 얼음주머니를 10달러에 팔았고.”
“그건 어떻게 아십니까?”
“그때 미국에 있었소. 플로리다대학교에서 경제학을 공부했지.”

해리의 얼굴이 밝아졌다.

“아, 저도 경제학을 전공했습니다. 그렇다면 독점의 폐해가 얼마나 큰지도 아시겠군요.” 
“이보시오, 당신들은 세계 최악의 독점기업 마이크로소프트에게는 군말 없이 윈도 가격을 지불하면서, 왜 나한테만 그러시오?”

해리는 할 말을 잃었다. 깊이 생각해본 적은 없었지만 그도 마이크로소프트Microsoft의 가격정책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일찌감치 느끼고 있었다. 세상의 거의 모든 PC(개인용 컴퓨터)와 노트북 가격에 30만 원
이상의 윈도 가격이 얹어진다는 것은, 1억 원짜리 집을 구입하면서 현관문을 여는 비용으로 수천만 원을 지불하는 것과 다를 게 없다. 컴퓨터가 집이라면 마이크로소프트는 집으로 들어가는 문을 독점하고 있다.

“왜 그렇게 미국을 미워하십니까?”
“이라크에 돈 벌러 갔던 내 동생의 가족과 친구들이 몰살당했소. 당신네 대통령이 자랑했던 최소파괴무기의 정밀타격에 의해서 말이오.”
“미안합니다. 아까 얼마든지 드린다고 한 말은 취소하겠습니다. 여행을 마치고 집에 도착하면 난민구호단체에 100만 달러를 기부하겠습니다.”
“그렇다면 물값을 받겠단 말도 취소하겠소. 돈으로 모든 것을 살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 마시오.”

해리의 머릿속에 펀드 매니저로 일했던 시절이 문득 떠올랐다. 그는 매년 수천만 달러를 벌었다. 그에게는 친구와 만날 여유도, 딸과 놀아줄 시간도, 병상의 어머니에게 전화할 틈도 없었다. 아침에 눈 뜨고 잠들기 전까지 수백 번씩 확인하는 주식 차트는 오름, 내림, 종목 간 스프레드, 투자심리선, 거래량, 손절매, 공매도 따위를 지시하는 추상적 신호로만 보였다.

그는 번개처럼 손익을 계산하고, 솔개처럼 매수 시점과 매도 시점을 포착하고, 다음 날 개장하기 전에 뉴욕의 주거래은행과 시카고상업거래소의 잔고를 확인하며 자신의 판단을 검증하곤 했다. 그곳에는 숫자만 있을 뿐 사람이 없었다.

그러고 보니, 그가 젊은 시절에 읽었던 경제학 책에도 사람 이야기는 없었다. 경제란 ‘사람의 일상을 다루는 학문’이라고 정의해 놓고, 정작 경제학 교과서가 다루는 내용은 숫자와 그래프뿐이었다.

양치기는 마른 소똥으로 불을 지피고 갓 잡은 양고기를 노릇노릇 구웠다. 낙타가 낮에 먹은 풀을 되새김질하는 동안 두 사람은 가짜 노동의 결과물인 발렌타인을 마시며 자본주의의 미래에 대한 의견을 나누었다.

이튿날 해리의 물주머니에 물을 가득 채운 양치기는 낙타등에 건초 네댓 단과 마유주 한 통을 얹어 주었다. 해리는 등 뒤로 멀어지는 마두금馬頭琴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낙타와 함께 긴 모래언덕을 넘었다. 그는 평생 불확실한 미래와 싸워왔지만, 그가 베팅했던 금융상품 중에 낙타 등에 실린 마유주와 건초만큼 확실한 것은 없었다. <계속>

※ 이 연재는 스트레이트뉴스가 저자(현재욱)와 출판사(인물과사상사)의 동의로 게재한 글입니다. 무단 도용을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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