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세기에 나타난 자본주의로 인해 사람들의 생활은 풍요로워졌다. 그러나 자본가들의 무한 이윤획득에 의해 세계 경제는 불균등하고 불공정해지고 있다. 정치적으로도 강대국의 힘이 거세지면서 각종 모순적 요소가 심화되고 있는 형국이다. 이러한 문제의 원인을 알기 위해선 현대 경제의 중요한 쟁점들이 무엇인지 이해하고, 그 쟁점들의 핵심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경제학의 세계에서 벌어지는 모든 현상과 논쟁을 우리가 알아야 할까? 몰라도 무방한 것들이 있지만, 반드시 알아야 할 것들이 있다. 경제학 논쟁이 경제 정책으로 이어지고, 그 정책은 보통 누군가에게는 유리하고 누군가에게는 불리할 뿐 아니라 나라의 운명과도 연결되기 때문이다. 스트레이트뉴스는 오늘날 우리 사회에 뜨거운 쟁점으로 떠오른 경제의 주요 요소들을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본지 선임기자 현재욱의 저작인 「보이지 않는 경제학」을 연재한다. [편집자 주]

보이지 않는 경제학

 

시장권력의 집중화

기원전 8세기 무렵 황하黃河 유역에는 크고 작은 800여 개의 나라가 존재했다. 주周라는 종주국이 있었지만 제후국들은 주나라에 형식적으로 복종했을 뿐, 각자 독자적인 정치권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일종의 분권형 지방자치제였다.

주나라의 지배력이 약해지고 힘센 나라가 주변의 약소국을 하나씩 병합하면서 제후국은 춘추시대春秋時代(기원전 770~기원전 403) 중기에 수십 개로 줄어들었다. 전국시대戰國時代(기원전 403~기원전 221)에 이르러 주나라는 유명무실해지고, 중국은 7개의 강력한 독립국으로 재편된다. 이 7개국을 일컬어 전국칠웅戰國七雄이라고 한다.

그 가운데 하나인 진秦나라는 널리 인재를 모집하고, 제도를 개혁하며, 산업을 장려하고, 인구를 늘리면서 오랫동안 힘을 비축했다. 마침내 때가 되었다고 판단한 진왕 영정嬴政은 군사를 일으켜 다른 6국을 차례로 정복하고, 기원전 221년에 중국 역사상 최초의 통일제국을 건설했다. 그가 바로 진시황秦始皇이다.

이 과정을 압축하면 정치권력의 분열-과점-독점으로 요약된다. 이 독점화 과정은 역사에서 무수히 되풀이되었다. 서진西晉은 위·촉·오 삼국의 분열시대를 마감했고, 수隋는 수십 개 나라가 난립했던 남북조시대를 끝내면서 성립되었고, 조광윤은 5대10국시대의 혼란을 종식하고 송宋을 건국했다.

고대 지중해 세계와 오리엔트, 인도, 중앙아시아의 역사를 살펴보아도 분열-과점-독점 과정은 비슷하게 반복된다. 독점 이후에 제국으로 지배력을 확장한 경우도 여러 번 있었다. 로마제국, 몽골제국, 오스만제국이 그 전형을 보여준다.

민주주의라는 정치체제가 고안되어 널리 확산되면서 한곳에 집중되었던 정치권력은 해체 또는 분권화 과정을 밟기 시작했다. 삼권분립, 지방자치, 권력에 대한 감시와 견제 장치가 점차 도입되고 있다.

한국을 포함하여 아직 그 수준에 도달하지 못한 국가가 태반이기는 하다. 그러나 이런 흐름이 갖는 역사적 의미는 매우 중요하다.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 제1조 1항의 이념이 현실세계에서 실현되려면 권력 쪼개기가 제도적으로 뒷받침되어야 한다. 대한민국은 권력에 대한 감시와 견제 기능이 특히 취약하다. 이때 권력은 정치권력뿐만 아니라 시장권력도 포함된다.

역사에서 수천 년간 되풀이된 정치권력의 독점화 경향이 주춤하게 된 것은 인류가 민주주의를 발명했기 때문이 아니다. 민주주의는 이미 기원전 5세기에 아테네에서 발명되었다. 민주주의가 꽤 괜찮은 제도이기는 하지만, 아테네가 지리멸렬한 후로 인류는 오랫동안 민주주의를 모르고 살았다.

과거에 권력을 독점했던 세력이 갑자기 자비롭고 정의로워졌기 때문도 아니다. 인류의 DNA는 인간의 한쪽 눈을 바늘로 찔러서 노예로 만들었던 시대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정치혁명의 가능성이 열린 것은, 과학혁명 이후 ‘지식’이라는 공공재가 널리 보급되면서 인권과 공동선과 정의가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인류 대다수가 자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장권력은 정치권력이 수천 년간 그랬던 것처럼 분열-과점-독점의 길을 고수하고 있다. 시장주의자들은 그것이 효율이고 과학이라고 말한다. 마르크스의 과도한 신념이 마르크스주의라는 종교를 낳았듯, 시장에 대한 과도한 믿음은 시장근본주의라는 종교를 탄생시켰다.

시장근본주의자들은 ‘보이지 않는 손’을 유일신으로 숭배했고, 시장을 숫자로만 이루어진 추상의 천국으로 만들어버렸다. 사람 사는 곳이던 시장에서 사람을 빼버렸으니 삶의 가치를 살펴볼 여지도 없다.

시장권력을 장악한 자본가는 원래 한 몸인 정치와 경제를 분리하여 ‘경제 살리기’를 최우선 과제로 설정한다. 노동자의 요구는 시장 논리를 거스르는 정치투쟁으로 몰아붙인다. 정치권력이 시장권력과 손을 잡고,그들을 감시하고 견제해야 할 언론권력이 협조하면 노동자는 삶의 벼랑 끝으로 내몰린다.

2009년 한강로 2가 남일당 건물에서 발생한 용산 참사는 그 모든 부조리가 집약된 상징적 사건이다. 이명박정부와 보수 언론은 희생된 철거민들을 ‘도시 게릴라’로 규정했다.

이명박 전 대통령
이명박 전 대통령

 

“용역들이 밑에서 올라오니까, 2층에서 3층 올라오는 계단에 아시바(공사장에서 쓰는 비계)로 시건 장치를 했어요. 그런데 너무 급하게 하다 보니까 엉성하게 대충 용접을 해서 용역들이 뜯고 올라왔죠. 그래서 3층에서 4층 올라오는 계단에 시건 장치를 또 한 거야. 이번에는 완벽하게 했죠. 용역들은 결국 3층까지밖에 못 올라오고 거기서 폐타이어 같은 걸로 계속 불을 피워댔어요. 우리가 네 번인가 다섯 번인가 소방서에 신고를 했을 거예요. 4층하고 옥상에 사람들이 있는데 용역들이 건물에 불을 피웠다고. 그런데도 소방관들은 출동해서 불만 끄고 용역들 잡아가지도 않더라고요. 경찰도 그렇고, 늘 그런 식이지. 물대포도 경찰이랑 용역이 같이 쏘고, 건물 주변에서도 같이 이야기하면서 돌아다니고.” - 지석준(용산 참사 생존자)

2009년 1월 20일, 그들은 불태워졌다. 10~20년 해온 장사를 계속하며, 더도 덜도 아니고 살아온 딱 그만큼만 유지되기를 바랐던 그들의 소망은 거절당했다. 그들은 철거되지 않고 소각되었다. 누구도 사과하지 않았고, 누구도 책임지지 않았다. 세상은 빠르게 그들을 잊었다.

시장권력에 저항하는 시장참여자의 요구는 진압 대상인가? 용역 깡패와 경찰 공무원이 합동작전을 펼치는 것이 시장의 효율성인가?

그래서 균형점이 이루어지고 시장참여자 모두가 행복해졌나? 잘사는 나라든 못사는 나라든 시장실패는 흔한 일이다. 시장은 종종 경제공황이나 금융위기 같은 대형 사고를 쳐서 전 세계의 민생을 도탄에 빠뜨리기도 한다. 시장은 효율적이지 않고 때로 폭력적이다.

호모 사피엔스는 사회주의 계획경제가 매우 비능률적이라는 것을 경험했다. 한국인들은 국가주도 계획경제모델이 높은 경제성장률을 달성했던 경험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자본주의 경제체제가 적어도 소련식 사회주의 경제체제보다 생산성이 높다는 사실을 많은 사람이 안다. 이런 깨달음도 지식이 공공재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소련이 망했다고 해서 “그것 봐라, 자본주의가 최고다”라고 말하기에는 아직 풀어야 할 숙제가 많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시장에 다시 사람이 살게 하는 것이다. 공급자와 소비자도 누군가의 아버지나 어머니, 혹은 누군가의 아내, 남편, 아들, 딸, 친구 아닌가. 그들이 단지 숫자의 일부로만 존재한다면 시장은 불행과 재앙을 비용으로 치환하는 보험의 논리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보상비가 얼마야? 손익분기점 이하네. 당장 실행해. 

※ 이 연재는 스트레이트뉴스가 저자(현재욱)와 출판사(인물과사상사)의 동의로 게재한 글입니다. 무단 도용을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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