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 연재-보이지 않는 경제학] 〈68〉시장의 먹이사슬
[ST 연재-보이지 않는 경제학] 〈68〉시장의 먹이사슬
  • 현재욱 선임기자 (jeffhyun@naver.com)
  • 승인 2019.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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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기에 나타난 자본주의로 인해 사람들의 생활은 풍요로워졌다. 그러나 자본가들의 무한 이윤획득에 의해 세계 경제는 불균등하고 불공정해지고 있다. 정치적으로도 강대국의 힘이 거세지면서 각종 모순적 요소가 심화되고 있는 형국이다. 이러한 문제의 원인을 알기 위해선 현대 경제의 중요한 쟁점들이 무엇인지 이해하고, 그 쟁점들의 핵심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경제학의 세계에서 벌어지는 모든 현상과 논쟁을 우리가 알아야 할까? 몰라도 무방한 것들이 있지만, 반드시 알아야 할 것들이 있다. 경제학 논쟁이 경제 정책으로 이어지고, 그 정책은 보통 누군가에게는 유리하고 누군가에게는 불리할 뿐 아니라 나라의 운명과도 연결되기 때문이다. 스트레이트뉴스는 오늘날 우리 사회에 뜨거운 쟁점으로 떠오른 경제의 주요 요소들을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본지 선임기자 현재욱의 저작인 「보이지 않는 경제학(2018)」을 연재한다. [편집자 주]
보이지 않는 경제학

 

시장의 먹이사슬

2016년 2월 4일, 마틴 슈크렐리Martin Shkreli라는 젊고 잘생긴 남자가 미 하원 청문회에 증인으로 출석했다. 그는 시종일관 답변을 거부하거나 손가락으로 볼펜을 돌리며 히죽거렸다.

당시 32세의 슈크렐리는 튜링제약Turing Pharmaceuticals이라는 회사의 대표였다. 2015년에 튜링제약은 에이즈 바이러스와 말라리아 치료제인 다라프림Daraprim의 특허권을 사들인 후 가격을 55배 올려 물의를 일으켰다.

다라프림은 시판된 지 62년 된 항생제로 많은 에이즈 환자가 복용하고 있다. 슈크렐리는 약값을 1정당 13.5달러에서 750달러로 올렸다. 하루에 한 알씩 복용한다고 치면 한 달에 약값만 2,500만 원 가까이 들어간다. 돈 없는 사람은 그냥 죽으라는 이야기다.

청문회에 나온 마틴 슈크렐리의 표정은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비싸면 안 사면 될 것 아니야? 청문회가 끝나고 슈크렐리는 트위터에 짤막한 소감을 올렸다. “이 얼간이들을 우리 정부의 대표로 받아들이기 어렵다Hard to accept that these imbeciles represent the people in our government.” 그가 생각하는 정부는 어떤 정부인지 궁금하다.

상품의 가격은 시장에서 정해진다. 특정 약품의 가격이 비싸면 그와 비슷한 효능을 가진 약품을 개발하기 위해 다른 제약사들이 뛰어들고, 결국 경쟁에 의해 가격은 떨어진다. 그리하여 시장은 발전하고 개인의 삶의 질도 나아진다. 정부는 쓸데없이 시장에 간섭할 필요가 없다. 이것이 신자유주의자들의 핵심 주장이다.

그런데 다라프림 같은 약품은 시장이 너무 작아서 제약회사들이 신약 개발에 자본을 투자하지 않는다. 특허기간이 만료되었지만 다라프림이 독점적 지위를 누리는 이유다.

사회적으로 많은 비난을 받긴 했지만 슈크렐리 자신은 개의치 않는 것 같다. 대중의 분노는 그의 통장 마지막 줄에 찍히는 숫자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 미국식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법으로 튜링제약의 가격정책을 규제할 수 없다. 한국이 한미자유무역협정FTA을 통해 전면적으로 수용한 신자유주의적 질서란 바로 이런 것이다. 그 체제 안에서 먹이사슬의 최상위에는 언제나 금융자본이 자리 잡고 있다.

반면 먹이사슬의 밑바닥에는 노동자가 있다. 슈크렐리는 의사 출신도 아니고 의약 전문가도 아니다. 뉴욕의 명문 헌터컬리지Hunter College를 중퇴한 뒤 줄곧 헤지펀드 업계에서 경력을 쌓으며 일확천금의 야망을 키워왔다.

증권사기 혐의로 검찰에 구속되었다가 500만 달러의 보석금을 내고 풀려나기도 했다. 의약기술 에 투자하여 인류의 행복을 증진하겠다는 소명감 따위는 애당초 가졌을 리가 없다. 그가 창업한 튜링제약은 금융자본이 어떻게 실물경제를 지배하는지 보여주는 전형적인 사례다. 슈크렐리가 좀 더 노련했더라면 검찰에 기소되거나 청문회에 소환되지 않았을 것이다.

오늘날 금융의 실물 지배는 자본주의의 대세다. 이런 추세가 계속되면 평생 한 분야에서 기술과 노하우를 닦아온 실물 분야 전문가들은 대부분 금융자본가의 마름으로 전락할 것이다. 노동자는 언제든 다른 노동자로 대체될 수 있으며, 궁극적으로는 인공지능을 장착한 로봇으로 대체된다. 인간의 노동력에 많이 의존하는 분야에서도 노동자는 더 이상 가치생산의 주체가 아니다. 노동자는 기업의 자산도 아니고 산업의 전사는 더더욱 아니다. 단지 비용일 뿐이다.

세계 최고의 경영 실적을 자랑하는 인천공항은 공기업임에도 노동자의 대부분이 비정규직이다. 2017년 3분기에 정규직은 1,252명, 비정규직(파견·용역) 노동자는 8,067명이다. 안전과 보안을 담당하는 핵심요원도 대부분 비정규직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과 이명박 전 대통령
박근혜 전 대통령과 이명박 전 대통령

 

이것만 봐도 이명박·박근혜 정부가 노동자를 어떻게 인식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려는 문재인 정부의 정책 변화는 노동자를 비용이 아닌 사람으로 보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박근혜 정부가 밀어붙였던 노동법 개정은 대한민국의 모든 기업을 인천공항처럼 만들고 대한민국의 모든 노동자를 비정규직으로 만들려는 시도였다. 그래야 민생이 산다는 말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민생은 죽고 대기업만 산다.

노동자가 비용에 불과하다면 시장은 성공했다. 그러나 노동자도 사람이라면 시장은 실패했다. 시장근본주의는 이제 사회과학이 아니라 종교적 열정으로 이해해야 한다. ‘아는 것이 힘’이라는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 1561~1626의 경구는 시장주의자들에 의해 ‘믿는 것이 힘’으로 바뀌었다. ‘시장은 효율적이다’라는 전제는 주류 경제학의 오래된 믿음이다.

그러나 우리는 속아왔다. 시장은 효율적이지 않다. 완전경쟁을 찬양해온 자본주의는 지난 200년 동안 완전경쟁시장을 단 한 번도 구현해본 적이 없다. 인간의 본성이 크게 변하지 않는 한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시장은 필연적으로 시장지배력의 집중을 초래하고, 그것은 시장실패로 이어진다. 시장실패를 방지하려면 시장지배력의 과도한 집중을 견제하고, 부정적 외부효과가 시장가격에 반영되어야 한다. 공정한 경쟁이 이루어지도록 시장의 룰을 조정하면서 시장의 갈등을 지혜롭게 관리할 필요가 있다. 시장은 끊임없이 균형점에 도달하려는 속성을 지녔지만, 시장권력은 이윤 극대화를 위해 시장의 기본 원리를 거스른다.

로마 공화정 시대에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이 실패하고 북송 말기에 왕안석의 신법이 무력화된 이유는 자명하다. 정치권력이 시장권력에 휘둘렸거나 두 권력이 야합했기 때문이다. 월가를 개혁하려는 도드프랭크법Dodd-Frank Act도 그렇게 걸레가 되었다. 미국에서는 시장도 실패하고 정부도 실패했다. <계속>

※ 이 연재는 스트레이트뉴스가 저자(현재욱)와 출판사(인물과사상사)의 동의로 게재한 글입니다. 무단 도용을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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