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년 사법 역사 오점 남긴 양승태 전 대법원장 구속 사태
발단된 ‘판사 블랙리스트’, 법원 강력 저항에도 실체 드러나
양승태, 상고법원 도입 위해 청와대와 재판 거래 정황
불구속 양승태, 박병대, 고영한, 지지부진한 재판 상황
보수 정권 내내 고장 났던 법원 저울, 사법개혁 시급해

2019년은 국내정치와 국제통상, 외교, 사회 등 모든 면에서 어느 때보다 우울했던 해로 기록될 전망이다. 봉준호 감독은 ‘기생충’으로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이라는 기쁨을 안겼고, 영국 프리미어 리그 토트넘 소속 골잡이 손흥민은 새벽잠을 설치게 했으며, 낙태죄가 제정된 지 66년 만에 폐지되면서 여성의 자기결정권이 제자리를 찾았다. 그러나 유치원 개학연기 사태부터 선거법과 공수처법 표결까지 잠시도 평온한 적이 없었다. 정치는 패스트트랙과 조국 정국으로 얼룩졌고, 전직 대법원장이 사법 사상 최초로 구속됐으며, 고유정, 안인득, 장대호 등 흉악 범죄자는 계속해서 나타났다. 경제성장률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최저치인 2.0%로 예측되고, 청년 취업률과 노인 빈곤율, 자살율은 개선될 기미가 없다. 한해를 마무리하는 시점, 스트레이트뉴스는 2019년을 달군 10대뉴스 키워드로 ▲NO JAPAN과 지소미아(GSOMIA), ▲국회 파행, ▲급랭한 남북미 관계, ▲조국 정국, ▲양승태 구속, ▲홍콩 민주화 시위, ▲화성 연쇄살인범, ▲대형참사와 자연재해, ▲G2 무역전쟁, ▲구설 끊이지 않은 연예계 등을 선정했다.<편집자주>

<목차>
① [사회] 일본 불매운동 ‘NO JAPAN’과 지소미아(GSOMIA)
② [정치] 패스트트랙 등 ‘동물국회’로 극한 대치한 여의도 정가
③ [통일] 역사적인 하노이 만남 이후 급랭한 남‧북‧미 관계
④ [정치] ‘퇴진’과 ‘수호’로 한반도의 가을 양분한 조국 사태
⑤ [사회] 사법 71년 역사에 치욕 오점 남긴 양승태 사태
⑥ [국제] ‘송환법’ 반발해 불타오른 홍콩 민주화 시위
⑦ [사회] 화성 연쇄살인범 이춘재와 흉악범 고유정.안인득.장대호
⑧ [환경] 대형참사‧가뭄‧산불‧폭염‧태풍...고통의 지구촌
⑨ [국제] 일시 휴전했지만 불씨 여전한 G2(미중) 무역전쟁
⑩ [사회] 불법촬영‧성폭행‧도박...구설 끊이지 않은 연예계

[스트레이트뉴스=김태현 선임기자] 2017년부터 시작된 ‘판사 블랙리스트’ 의혹이 2019년 1월 양승태 전 대법원장(71, 사법연수원 2기)이 구속되면서 사법 71년 역사상 초유의 오점을 남기며 막을 내렸다.

발단은 2017년 불거진 ‘판사 블랙리스트’, 4월 7일 대법원이 인사상 불이익을 줄 목적으로 특정 판사들의 성향 및 동향을 담은 블랙리스트를 관리했다는 의혹이 보도되면서다.

전국법관대표자회의가 소집돼 양승태 대법원장에게 조사권을 위임해 달라고 요구했다. 서울중앙지검은 사건을 형사1부에 배당하며 수사에 착수했다.

총 47가지 범죄에 대해 혐의를 받고 있는 양승태 전 대법원장 ⓒ스트레이트뉴스/디자인:김현숙
총 47가지 범죄에 대해 혐의를 받고 있는 양승태 전 대법원장 ⓒ스트레이트뉴스/디자인:김현숙

검찰의 전방위 수사와 법원의 저항

대법원은 진상조사위원회(2017년)와 추가조사위원회(2018년), 특별조사단(2018년) 등을 꾸리며 자체조사에 들어갔다. 그러나 대법원 조사 결과는 “조직적인 법관 사찰이나 인사 상 불이익은 없었다”는 것이었다.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던 판사 블랙리스트 사건은 수면 아래로 잠복했다.

그러나 검찰이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재판 개입 의혹에 대한 수사를 본격화하면서 판사 블랙리스트 사건도 다시 부상했다. 양 전 대법원장은 자택 앞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재판 거래도 없었고, 판사 블랙리스트도 없다”며 의혹 일체를 부인했다.

검찰은 다시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 사건을 서울중앙지검 특수1부에 배당하며 수사에 박차를 가했지만, 예상대로 법원의 저항은 매우 강력했다.

검찰은 임종헌(60, 사법연수원 16기) 전 법원행정처 차장 등 관련자들에 대한 압수수색과 조사를 이어갔지만, 법원은 양승태 전 대법원장, 박병대(62, 사법연수원 12기) 전 법원행정처장, 이규진 전 양형위원회 상임위원, 신광렬 서울고법 부장판사 등 핵심 관련자들과 법원행정처 각 부서에 대한 압수수색 영장을 기각‧재기각하며 강하게 저항했다.

실체 드러난 ‘판사 블랙리스트’와 ‘재판 개입 사실’

11월 6일, 끈질기게 파고들던 검찰은 법원행정처 인사총괄심의관실 압수수색에서 ‘물의를 야기한 법관의 인사조치 검토’ 문건을 확보했다. 문건에는 2013년부터 2017년까지 총 31명의 법관 이름이 적혀 있었고, 그중 9명은 실제로 인사 상 불이익을 받았던 것으로 드러났다. 의혹으로만 떠돌던 것, 바로 ‘판사 블랙리스트’였다.

청와대 영빈관에서 개최된 신년인사회에서 건배하는 박근혜 전 대통령과 양승태 전 대법원장(2016.01.04)(자료:청와대사진기자단)
청와대 영빈관에서 개최된 신년인사회에서 건배하는 박근혜 전 대통령과 양승태 전 대법원장(2016.01.04)(자료:청와대사진기자단)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이 구속기소됐고, 박병대 전 대법관과 고영한(64, 사법연수원 11기) 전 대법관이 피의자로 소환됐다. 그러나 법원은 이번에도 박병대, 고영한 전 대법관에 대한 구속영장을 기각해버렸다. 시민들은 “법원이 조직을 보호하고 있다”며 비난을 쏟아 부었다.

재판 개입 사실도 속속 드러났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숙원사업은 ‘상고법원 도입’이었고, 양 전 대법원장이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상고법원 도입과 관련해 보고 또는 딜(deal)을 추진한 사실이 밝혀졌다. 법원행정처장이 청와대를 방문해 일제 강제징용 재판의 방향에 대해 논의한 사실도 드러났다.

검찰은 통합진보당 해산 소송과 관련해 이인복 전 대법관을, 일제 강제징용 재판거래와 관련해 윤병세 전 외교부 장관을 소환조사했다. 우병우 전 청와대 민정수석도 검찰 조사를 피해갈 수 없었다.

‘법 앞 평등’ 무너뜨린 양승태 구속

2019년 새해가 밝자마자 검찰의 칼날은 양승태 전 대법원장과 박병대, 고영한 전 대법관을 정조준했다.

1월 4일, 검찰은 양 전 대법원장을 피의자 신분으로 소환한다고 통보했다. 7일과 8일에는 고영한 전 대법관과 박병대 전 대법관도 재소환됐다. 1월 9일에는 수감 중인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조사도 시도됐다.

경기도 성남시 자택 앞에서 기자회견 중인 양승태 전 대법원장. “재판 거래도 없었고, 판사 블랙리스트도 없다”며 의혹 일체를 부인했다(2018.06.01)(자료:ytn)
경기도 성남시 자택 앞에서 기자회견 중인 양승태 전 대법원장. “재판 거래도 없었고, 판사 블랙리스트도 없다”며 의혹 일체를 부인했다(2018.06.01)(자료:ytn)

수사에 착수한 지 7개월 만인 1월 11일, 검찰은 사법 71년 역사상 최초로 양승태 전 대법원장을 피의자 신분으로 소환했다. 양 전 대법원장은 서울중앙지검 포토라인 대신 서초동 대법원 앞에서 입장을 밝히는 기자회견을 열고 12일 검찰로 향했다.

1월 24일, 법원이 마침내 구속영장을 발부하면서 “법 앞에 평등”을 무너뜨리고 민주주의 존립 근거인 삼권분립 정신을 심각하게 훼손한 양 전 대법원장은 42년간 몸담았던 사법부에 판사가 아닌 피고인 신분으로 서게 됐다. 당시 검찰이 법원에 제출한 구속영장 청구서는 이명박, 박근혜 전 대통령보다 많은 260쪽에 달했다.

양 전 대법원장은 직권남용, 권리행사방해, 공무상 비밀 누설, 특정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국고손실 등의 혐의로 기소됐으며, 총 47가지 범죄에 대해 혐의를 받고 있다.

현재 양 전 대법원장은 지난 7월 재판부가 직권 보석 결정을 내림에 따라 구속 179일 만에 석방돼 불구속 상태로 재판에 임하고 있다. 양 전 대법원장의 공범으로 지목된 박병대, 고영한 전 대법관 역시 불구속 상태에서 재판을 받고 있다.

사법농단의 주역 4인(왼쪽부터 양승태 전 대법원장, 박병대 전 대법관, 고영한 전 대법관,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 ⓒ스트레이트뉴스/디자인:김현숙
사법농단의 주역 4인(왼쪽부터 양승태 전 대법원장, 박병대 전 대법관, 고영한 전 대법관,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 ⓒ스트레이트뉴스/디자인:김현숙

고장 났던 법원의 저울, 시급한 사법개혁

이들에 대한 재판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을까? 그동안 법정에 선 증인만 36명에 이르지만, 피고인들 측과 검찰 측의 법리공방이 워낙 치열해 지금까지 재판이 53차례나 열렸음에도 끝이 보이지 않는다. 사실 시작도 하지 않았다는 표현이 옳을 정도다. 향후 법정에 나설 증인만 200명이 넘는다. 법조계에서는 1심 마무리 기한을 내년이 아닌 2021년 상반기로 보고 있다.

검찰이 양승태, 박병대, 고영한 등 세 사람에 앞서 조사를 시작했던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에 대한 재판은 아예 6개월가량 중단된 상태다. 임 전 차장이 대법원에까지 재판부 기피신청을 냈기 때문이다. 그밖에 전현직 법관 10명에 대한 재판도 더디게 진행 중이다. 전반적으로, 정권 교체에 따른 재판의 향배까지 우려되는 대목이다.

양 전 대법원장 구속으로 귀결된 ‘사법행정권 남용 사건’에는 박근혜 정부 때 사법부를 이끌었던 핵심 중 핵심인 전현직 법관 14명이 연루됐다.

검찰에 따르면, 진보 성향 판사들은 블랙리스트에 올라야 했고, 일제 강점기 강제징용 피해자 소송, 전교조 법외노조 통보처분 소송, 원세훈 전 국정원장 댓글 사건 소송, 통합진보당 의원 지위 확인 소송 등의 재판은 상고법원 도입을 위한 도구로 거래됐다.

검찰의 판단이 사실로 드러난다면, 지난 보수 정권 내내 법원의 저울은 고장 나 있었던 셈이다. 검찰개혁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사법개혁이 더 절실하고 또 간절하다. 사법은 입법, 행정과 더불어 민주주의를 떠받치는 3대 축이라서다.

행정개혁의 실마리는 2016년 박근혜 전 대통령의 국정농단 사건 때 잡혔다. 입법부 개혁은 요원하지만, 선거제로 실마리를 잡을 수 있다. 2020년 새해에는 사법개혁이 이뤄질까? 입법부 개혁보다 더 회의적이다. 그렇지만 최소한 실마리라도 잡는다면 또 다른 새해라도 기대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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