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인 출신 최종걸, 우리 문화와 역사 깃든 산사 순례 엮어

'천년고찰이야기'. 다우출판 제공
'천년고찰이야기'. 다우출판 제공

언론사에 오랜 시간 몸담았던 최종걸 저자의 '천년 고찰 이야기'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절과 수행가풍을 간직한 청정도량을 중심으로 전국을 순례하면서 만난 명산대찰에 관한 이야기다.

대한민국 전역에 분포된 약 1000여개의 사찰 가운데 ▲5대 적멸보궁 ▲3대 해수관음 성지 ▲삼보사찰 ▲미륵 신앙 성지 ▲지장 신앙 성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산사, 한국의 산지 승원' 등 각 지역을 대표하는 고찰들을 가려 담았다. 기존 답사기 또는 기행 책과는 다르게 기이한 일화와 옛 이야기를 중심으로 기록했다.

◇역사 속 고승 선사들의 깨달음의 이야기

해수관음 신앙을 대표하는 '관세음보살이 상주하는 기도처 보리암'에는 두 가지 창건 설화가 전해 내려온다. 가락국 김수로왕 황비인 허황옥 공주의 삼촌 장유 선사가 창건했다는 설과 신라의 원효대사가 창건했다는 설이다.

서기 683년(신라 신문왕3) 원효대사가 풀집을 짓고 수도하던 중 희뿌연 광채를 뿜으며 나타난 관세음보살을 친견한 감동으로 보리암을 창건했다. '화엄경'에 나오는 관세음보살의 상주처인 보광궁에 착안해 산 이름을 보광산이라 지었다. 관세음의 별칭인 '보문(普門)'의 '보(普)'를 따와 절 이름을 '보광사'라 하였다.

화엄 사상의 발원지인 영주시 부석사에는 의상대사를 호위한 선묘 보살의 애절한 사연이 깃들어 있다. 신라 문무왕 때 당나라에서 유학 중이던 의상대사를 연모한 선묘 낭자는 그리움을 못 이겨 바다에 몸을 던졌다. 이후 '이 몸이 용이 되어 의상 대사가 무사히 귀국하도록 돕겠다'는 원을 세우고 용으로 환생했다.

유학길에서 돌아온 의상대사가 지금의 영주시 부석면 봉황산에 절을 지으려던 때 도적떼들에 가로막히자 용으로 환생한 선묘낭자가 커다란 바위로 변신해 도적 떼를 쫓아냈다. 선묘낭자가 변한 바위는 현재 부석사 무량수전 뒤편에 있는 '부석(浮石)'이다.

조선 시대 임진왜란 때 승병을 이끈 명장으로 꼽히는 서산대사에게는 이런 일이 있었다. 어느 날 서산 대사는 입적을 앞두고 제자들에게 해남 두륜산 대둔사에 자신의 의발을 전하라고 한다. 제자들이 궁금해 하자 서산대사는 "두륜산 대둔사가 만세토록 허물어지지 않을 땅이며 종통(宗通)이 돌아갈 곳"이라며 이유를 설명했다.

스승의 명을 받든 제자들은 묘향산 보현사와 안심사 등에 부도를 세워 서산대사의 사리를 봉안하고 영골을 금강산 유점사 북쪽 바위에 봉안했다. 금란가사와 발우를 대둔사에 모신 후로 두륜산 대둔사는 지금의 대흥사로 이름이 바뀌었으나 서산대사의 법맥은 400년이란 시간을 뛰어넘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후 대흥사는 큰 깨달음을 얻은 13명의 대종사와 13명의 대강사를 배출하며 선교 양종의 대도량으로 자리 잡았다.

◇불교 이야기 속 당대 역사·문화·정치·사회 모습 한눈에 

우리나라에 불교가 처음 전래된 시기인 삼국시대에는 호국 불교의 성격이 강했다. 개인적인 치병이나 구복의 목적도 있었지만 당시에는 왕권 강화 목적이 더 컸으며 이를 위해 토속적 무속신앙을 사상적 기반으로 하던 지배층을 불교로 교화하려 했다.

고려는 불교의 나라였다. 태조 왕건은 불교를 적극 지원했고 불교 행사인 연등회나 팔관회를 중시했으며 광종 때부터는 승과를 실시해 나라의 스승인 국사나 왕의 스승인 왕사를 뽑아 왕실의 고문 역할을 맡기기도 했다. 정혜결사 시작점이었던 '국사 도량 송광사'에서 당시 타락한 고려 불교를 바로잡아 한국 불교의 새로운 전통을 확립하고자 했던 지눌 스님은 정혜결사 장소를 찾던 중 모후산에서 나무로 깎은 솔개를 날렸더니 지금의 국사전 뒷등에 앉았다고 한다.

조선 시대는 지배 세력의 종교였던 불교가 민간신앙과 결합돼 사회 전반에 널리 퍼지게 된 시기다. 고려 말 안으로는 부패한 지배세력으로 인해 피지배층의 삶은 어려워졌고, 밖으로는 이민족의 침략이 잦아 백성들은 이중고를 겪어야 했다. 이때 무장 이성계가 신흥사대부 세력과 힘을 합해 조선 왕조를 세우면서 귀족 종교였던 불교를 배척했고 신흥사대부가 수용한 성리학을 사회 지도이념으로 삼았다. 이러한 억불숭유 정책으로 탄압받던 사찰은 이를 계기로 민초들의 삶 속으로 깊숙이 들어가게 됐다.

◇가장 한국적인 문화원형 가치 재발견…'사찰 창건 설화' 

예로부터 가족 공동체의식이 강했던 우리 민족에게 '조상 숭배'는 가장 오래된 민간신앙 중 하나다. 유교나 불교가 들어오기 이전부터 시체의 훼손을 방지하고 순장을 하거나 시체의 주거지인 명당에 대한 관념이 생겨났다. 그런 점에서 '조상 숭배'는 가장 한국적인 문화원형이며 한민족 고유의 문화유산으로 볼 수 있다. 사찰 창건 설화에는 특히 부모의 은혜를 강조하는 이야기가 유독 자주 등장한다. 

'불국사고금창기'에 따르면 이차돈이 순교한 이듬해인 528년(신라 법흥왕15)에 법흥왕의 두 어머니인 영제부인과 기윤부인은 불국사를 창건하고 비구니가 됐다. 이후 574년(진흥왕35)에 진흥왕의 어머니인 지소부인이 절을 중창하고 비구니가 된 뒤 불국사에 비로자나불상과 아미타불상을 봉안했다고 한다.

'삼국유사'에는 신라의 재상 김대성이 불국사를 창건한 것으로 나온다. 전생의 부모를 위해 석굴암을 세우고 현생의 부모를 위해 불국사를 창건했다는 설화다.

'혜능 대사의 법맥을 이어받은 쌍계사'를 세운 진감 선사는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해서 생선 장수를 하며 가족을 봉양했다. 부모님이 돌아가시자 은혜를 갚기 위해 "길러 주신 은혜를 오로지 힘으로써 보답하였으니 이제 도의 뜻을 어찌 마음으로 구하지 않으랴"는 마음으로 출가를 결심하게 됐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조선의 제22대 왕 정조는 비명횡사한 아버지 사도세자를 늘 가슴에 맺었다. 왕위에 오른 정조는 장흥 보림사의 보경 스님으로부터 '부모은중경' 설법을 듣고 크게 감동해 구천을 떠돌 사도세자의 넋을 위로하고자 수원 화산에 절을 세우기로 하고 사도세자의 묘를 옮겼다. 그렇게 장헌세자(사도세자)의 능인 현륭원(지금의 융릉)이 조성됐고 부친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효행 근본 도량' 용주사가 세워졌다.

◇'전설 따라 삼천리'…'사찰 문화유산' 해설서

지난 2018년 통도사·부석사·봉정사·법주사·마곡사·선암사·대흥사 등 대한민국의 7개 사찰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선정됐다. 한국의 산지형 불교 사찰 유형을 대표하는 사찰들로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곳이며 불자는 물론 일반 순례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명산대찰이다.

그림에 대한 전문 지식이 없어도 미술관을 관람하는 데 어려움이 없듯 우리나라의 산사는 종교와 무관하게 누구나 부담 없이 찾아올 수 있는 지역 명소이자 모든 이에게 열려 있는 휴식 공간이다. 전국 명산대찰을 방문하는 순례객을 위한 '천년 고찰 이야기'는 사찰 안의 전각이나 탑 등 문화재에 얽힌 이야기부터 절 이름에 담긴 창건 의의와 발원의 내용까지 담겨있다.

◇저자 소개

저자 최종걸(춘산)은 대학 졸업 후 연합뉴스에 입사해 금융·증권·경제 기사를 다루며 언론계에 몸담았다. 이후 자회사 연합인포맥스 증권부장을 끝으로 언론계를 떠난 뒤 중견 그룹의 임원으로 재직하기도 했다.

봉은사 월간 사보인 '판전'에 명산대찰을 순례하며 옛 절의 창건 설화를 쓰는 이야기를 연재했다. 현재 일간지 '일간투데이' 주필로 다시 언론계에서 활동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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