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이 고통당할 때 드러나는 두 가지 반응」
「공정한 사람이라 느끼면 공감, 불공정한 사람이라 느끼면 쾌감」
「사회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고 있는 공감 조작 세력」
「공감의 착취, 이제는 스스로 제동을 걸어야 할 때」

타인이 고통을 당할 때, 나는 공감할 수도 있고 통쾌해 할 수도 있다. 왜 그럴까?

고통 공감

‘고통 공감’에 대한 런던대학교 벤 시모어 박사팀의 실험은 유명하다. 연구팀은 피검자 두 명(쇼크자와 관망자)의 손가락 끝에 각각 전극을 연결한 후, 쇼크자에게는 통증을 유발하는 전류를 실제로 흘려보내고, 관망자에게는 쇼크자가 전기쇼크를 받는 모습만 관찰하도록 했다. 그런 상태에서 두 피검자의 뇌 활동을 측정했다.

▲ 고통 공감 실험 ⓒcrave.cnet.co.uk

전기쇼크에 노출된 쇼크자와 전기쇼크에 노출되지 않은 관망자. 결과는 어땠을까? 놀랍게도 두 피검자 모두 동일한 뇌 위치를 활성화시켰다. 전기를 흘려보내지 않았음에도, 관망자는 쇼크자가 느끼는 고통을 실제로 느꼈던 것이다.

자신이 아플 때 반응하는 뇌 부위는 타인의 아픔을 볼 때도 비슷하게 작동한다. 이는 뇌에서 작동하는 ‘공감의 구조’ 때문이다. 그리고 공감은 타인을 돕는 동기로 작용한다.

공감과 무반응

벤 시모어 박사팀은 공감의 구조가 획일적으로 작동하는지 아닌지를 연구하기 위해 조금 다른 방식으로 실험했다. 실험은 위와 동일한 조건에서 두 차례 실시되었는데, 첫 번째 실험에 등장하는 쇼크자는 관망자가 ‘공정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두 번째 실험에 등장하는 쇼크자는 관망자가 ‘불공정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내세웠다.

▲ 공정과 불공정 사이 ⓒspiritscienceandmetaphysics.com

연구팀이 중점적으로 관찰한 뇌 부위는 전두엽의 전도피질 및 측좌핵이었다. 관망자는 상이한 이 두 조건에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먼저, 기분으로 고통을 느끼는 전도피질의 경우. 관망자의 전도피질은 자신이 공정하다고 생각하는 쇼크자의 고통에 강하게 반응하며 공감을 제공했지만, 불공정하다고 생각하는 쇼크자의 고통에는 거의 반응하지 않았다.

다음으로, 보상회로, 즉 쾌감을 얻기 위한 행동과 관계되는 측좌핵의 경우. 관망자의 측좌핵은 불공정한 사람의 고통에 활성화되어 쾌감을 제공했지만, 공정한 사람의 고통에는 활성화되지 않았다.

이 실험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은, 공정하다고 평가받는 사람의 고통은 관망자에게 유사한 고통, 즉 공감을 안겨주고, 불공정하다고 평가받는 사람의 고통은 관망자에게 쾌감을 준다는 점이다.

▲ 전두엽의 공감과 측좌핵의 쾌감 ⓒjodikrahn.com

 

관망자가 고통을 느끼는 이유는 감정이입 때문이고, 쾌감을 느끼는 이유는 불공정한 사람이 설치면 사회가 위태로워지기에 그런 사람을 벌해야 한다는 본질적 욕망이 솟구치기 때문이다.

공감의 조작

인간이 본래부터 상호 의존적인 종족이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 그러나 어떤 계기가 서로를 돌보게 했고, 그런 문화의 축적으로 인해 사회적 종족으로 진일보했으며, 이제 상호 의존 없이 살아가기가 어렵게 되었다는 것은 명확히 말할 수 있다.

‘사회적’이라는 말에는 ‘공감’이 전제되어 있다. 공동의 목표도 배려도 협력도 모두 사회적이며, 공감 없이는 성취할 수 없는 가치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공감이 이 사회에서 차츰 사라져가고 있다. 공동의 목표도 있고, 배려와 협력이 없는 것도 아닌데, 사회 구성의 중추를 맡아야 할 공감의 역할이 줄어들고 있는 것이다. 설 명절을 보내기 위해 모인 가족들 사이가 그렇고, 여야로 첨예하게 갈린 정치권이 그렇고, 끝 간 데 없이 갈라진 세계 종교가 그렇고, 돈 많은 국가에 의한 저개발국 착취가 그렇다.

더욱이 공감은 사라져가고 있을 뿐 아니라, 조작의 도구로까지 활용되고 있다. 전적으로 개인의 마음 영역처럼 보이는 공감, 그 공감을 조작하는 일이 과연 가능할까? 가능하다. 가능할 뿐만 아니라 조작이 너무도 쉬워서 이 사회를 거의 지배할 지경에까지 와 있다.

▲ 공감의 조작 ⓒblogs.psychcentral.com

조작 가능성에 대한 해답은 벤 시모어 박사팀의 실험에서 찾을 수 있다. 관망자는 쇼크자가 ‘공정한 사람’이라는 판단을 내렸을 때 쇼크자의 고통에 공감했다. 관망자는 쇼크자가 ‘불공정한 사람’이라는 판단을 내렸을 때 쾌감을 느꼈다. 그리고 그 쾌감의 기저에는 ‘벌’이라는 보상회로가 작동하고 있었다.

공감 조작자들은 바로 이 부분에 끼어들어 관망자로 하여금 ‘불공정한 사람’을 ‘공정한 사람’으로 오인하게 만든다. ‘정의롭지 않은 사람’을 ‘정의로운 사람’으로 착각하게 만든다. ‘가해자’를 ‘피해자’처럼 느끼게 한다. 심지어 이 지점에 끼어든 배우들은 ‘아무것도 아닌 일’을 ‘엄청난 일’로, ‘중차대한 일’을 ‘흔히 일어날 수 있는 별것 아닌 일’로 뒤바꿔놓을 수도 있다.

공감 착취 요주의

‘불의한’ 벤 시모어 박사들이 이 사회 도처에서 ‘불의한’ 실험들을 거듭하고 있다. 그 실험들이 거두는 혜택의 최종 목적지는 대부분 ‘자신의 이익’이다. 노사勞使문제에서 노는 노대로 사는 사대로 자신을 위해 국민들의 공감을 착취하려 하고, 정치권에서는 여와 야가 그 나물에 그 밥인 어젠다agenda를 위해 국가의 공감을 선취하려 한다. 불의한 종교지도자들과 ‘인간을 도외시한 시장주의’ 역시 그렇다. 공감을 착취하지 않는 벤 시모어 박사를 찾기란 쉽지 않다.

내가 내린 결정은 늘 정확했던가?

내 것이 분명하지만 마음대로 움직이지는 않았던 나의 마음, 내 귀는 이런 이명에 시달려왔다.

“그쪽에서 분명히 그랬다니까...”

“아니, 이걸 보고도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

“시끄러! 이쪽 말대로 하는 게 당신한테 이로운 거야!”

“당신이 옳아! 당신이 다 옳다구!!”

불의는 언제나 선의를 가장하고 접근해온다. 선의의 장막 뒤에 도사린 공감 착취는 나에게 “당신의 결정은 언제나 옳아!” 하고 속삭이며 불의로 이끌고, 나는 불의를 선의로 착각한 채 아무런 의심 없이 뛰어든다.

▲ 착취된 공감 ⓒcommnonverbale.wordpress.com

다시 자문해본다. 내가 내린 결정은 늘 정확했던가?

평생을 종교지도자로 살아온 이가 죽음의 문턱에서 자신의 신념을 거부하고, 보수와 진보가 당리당략과 개인의 이익이라는 불의에 굴복해 이쪽저쪽을 왔다 갔다 하는 걸 보면, 또한 예전에는 원수였던 나라들이 절친이 되는 아이러니를 보면, 내가 내린 결정의 정확성 여부에 대한 판단은... 의미 없다.

2016년의 대한민국, 내 결정의 정확성을 묻기보다는, 질문을 바꿔 나 자신의 마음에 대고 이렇게 물어보는 것이 더 맞을지도 모르겠다.

“나에게는 불의한 벤 시모어 박사가 한 명도 접근하지 않았던가?”

“나는 한 번도 공감 착취를 당하지 않았다고 확신할 수 있는가?”

올 한해는 그동안 선의를 가장한 채 나의 공감을 착취해온 불의의 벤 시모어 박사들에게 “이제 알았으니 그만 꺼져 달라”며 제동을 거는 시간들이 되었으면 한다.

 

김태현 두마음행복연구소 소장, 인문작가, 강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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