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심적 병역거부자 대체복무, 평화의 세상 여는 계기 기대

"평화로 가는 길은 없다. 평화가 길이다."

비폭력의 상징, 마하트마 간디가 남긴 명언이다.

“나의 적은 베트콩이나 중국인, 일본인이 아니다. 당신이 나의 자유를 억압한다. 당신이 나의 정의를 억압한다. 당신이 나의 평등을 억압한다. 당신은 미국에서조차 나의 종교적 믿음을 존중하지 않는데, 그런 당신이 내가 다른 곳으로 가서 싸우기를 원하는가?”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쏘는’ 세계적인 해비급 챔피언으로 알려진 무하마드 알리의 말이다. 그는 종교적 신념에 따라 양심적 병역을 거부해 징역 5년에 벌금 1만 달러를 선고받았지만, 최종심에서 무죄 선고를 얻어냈다. 대신 최종선고가 내려질 때까지 4년여 간 경기에 나설 수 없었고, 챔피언 벨트는 박탈당했다. 이 사건은 그를 반전운동가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세계적인 철학자 버트란트 러셀 역시 반전운동을 위해 양심적 병역거부를 택한 인사다. 영국은 국토방위령(Defence of the Realm Act)에 따라 이 철학자에게 100파운드의 벌금형을 선고했다. 하지만 그는 벌금 대신 6개월 징역형을 택했다. 저항의 의미였다. 영국은 1916년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이 대체복무를 할 수 있도록 병역법을 개정했다.

우리나라의 대체복무제 시행은 우려곡절의 기나긴 나날 끝에 도출한 것이어서 감회가 새롭다. 지난 1969년 대법원이 양심적 병역거부에 대해 유죄판결을 내린 이후 헌재는 2011년까지 잇따라 양심적 병역거부 처벌이 합헌이라는 결정을 내렸다. 법원의 무죄와 유죄의 선고가 엇갈리는 와중에 헌법재판소는 2018년 6월 대체복무제가 빠진 병역법이 헌법에 어긋난다는 '헙법불합치'를 결정하기에 이른다. 이어 국회가 지난해 12월 대체복무제를 허용한 병역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 지금에 이르렀다.

양심적 대체복무 본격 시행. (연합뉴스)
양심적 대체복무 본격 시행. (연합뉴스)

병역 대체복무제는 낙태를 둘러싼 공방 이상으로 보수와 진보 세력 간의 첨예한 이해가 엇갈렸다. 여기에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남은 민족분단의 특수성이 한몫했다. 냉철한 시각에서 반대의견 중에는 ‘양심’이라는 단어와 병역을 거부하는 이유에 대한 이해부족, 그리고 의무와 인권의 경계에 대한 오해가 많은 부분을 차지했다.

현역과 대체의 등가성 논란

유엔인권위원회(UNHRC)가 2012년 발표한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에 관한 분석보고서'에 따르면, 당시 한 해 동안 전 세계에서 종교적・신념적 이유로 병역을 거부해 수감된 사람은 723명인데, 대다수가 한국인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1945년 해방 이후 지금까지 한해 평균 570여 명이 병역을 거부, 누적 인원이 1만9,000여명에 달했다.

이들은 왜 병역을 거부할까? 제60차 UN 인권보고서에 명확한 답이 나와 있다. 총 521건의 조사대상 중 3건을 제외한 518건이 종교적인 이유였다. 이들이 병역을 거부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성경에 제시된 이 구절 때문이다.

“그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그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치 아니하리라.”(이사야 2장 4절)

살인을 하지 말하는 구절이다. 그런데 어디서부터 살인행위일까? 이 질문으로부터 병역을 거부하는 부류에 다음과 같은 차이가 생겨난다.

병역의 대체복무가 70여년 만에 허용됐으나 현역 복무를 수행하는 일반인 사이에 특혜 시비 적잖다. 현역과 대체간 복무의 등가성 성립에 회의적인 정서가 상당한 데 따른다.

“한국에 살면서 의무는 다하지 않고 권리만 챙기려 한다.”, “우리는 가고 싶어서 갔나?”, “국적을 박탈하고 국외로 추방하라” 등의 질타가 대표적이다. 수긍은 간다. 필자 역시 군복무를 마친 보상심리를 발동해 한때 이빨을 부득부득 갈아가면서 여호와의 증인들을 ‘파렴치한 회피자’로 취급했으니 말이다.

양심적 병역거부자의 날인 5월 15일을 기념하는 비석(자료:양심적병역거부국제회의manwhosaidno.org)
양심적 병역거부자의 날인 5월 15일을 기념하는 비석(자료:양심적병역거부국제회의 (manwhosaidno.org)

하지만 양심적 병역거부의 역사는 우리에게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놀라움과 인권에 대한 경건한 자각을 제공한다.

‘양심(conscientious)’의 차이

양심적 병역거부가 사회문제로 부상할 때면 늘 따라붙는 비난 섞인 반론이 있다. “그럼 군대 갔다 온 사람들은 비양심적이라는 말인가?” 하는 것이다. 용어의 차이를 알지 못하는 데서 오는 오해다.

일상의 대화에서 쓰는 ‘양심(conscientious)’이라는 용어는 도덕적으로 선한 마음을 말한다. 하지만 헌법 제19조에 규정된 ‘양심의 자유’에 쓰인 ‘양심’의 법률적 의미는 다르다.

“양심은 어떤 일의 옳고 그름을 판단함에 있어서 그렇게 행동하지 않으면 자신의 인격적 존재 가치가 허물어지고 말 것이라는 강력하고 진지한 마음의 소리로서, 절박하고 구체적인 양심, 즉 법률적인 의미의 양심이다.”

2004년 양심적 병역거부에 관한 헌법소원에 대해 헌법재판소가 합헌 결정(2002헌가1)을 내리면서 밝힌 양심의 정의다. 자신의 신념이나 종교 등에 따라 행동하는 것을 ‘양심’으로 본 것이다.

이는 ‘도덕적으로 선한 마음’을 의미하는 일상의 양심과는 큰 차이가 있다. 따라서 “군대 갔다 온 사람들은 비양심적이라는 말인가?”라는 말은, 법률적으로 “군대 갔다 온 사람들은 양심적 병역이행자들이다”는 말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비난의 번지수가 틀렸다는 말이다.

나에게 살인을 강요하지 말라

서기 295년, 로마 청년 막시밀리아누스(Maximilianus)는 카시우스(Cassius Dio) 총독으로부터 군인으로서 로마에 충성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기독교인이었던 그는 당당하게 명령을 거부했고, “살인을 강요하지 말라”는 말을 남기고 참수 당했다. 기록된 역사상 최초의 양심적 병역거부자였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아내와 딸 셋을 둔 독일의 프란츠 예거슈테터(Franz Jӓgerstӓtter)는 국방군에서 근무하라는 나치독일의 명령을 거부했다. 가톨릭 신자였던 그는 대신 의무병으로 복무할 수 있다고 했지만, 군은 제안을 거부했다. 신부까지 동원한 설득작업이 실패하자, 군은 사기를 저하시킨 죄로 사형을 언도, 참수형에 처했다.

김명수 대법원장이 1일 오전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열린 양심적 병역거부 사건 등 전원합의체에 참석하고 있다. 대법원은 종교적 병역거부는 '정당한 사유'에 해당한다고 판결했다.
김명수 대법원장이 2018년 6월 대법원 전원합의체에서 '양심적 병역거부는 헌법에 어긋나지 않는다'며, 헌법재판소는 2018년 6월 대체복무제가 빠진 병역법이 헌법에 어긋난다는 '헙법불합치'를 결정한다. 

대한민국의 항일운동사에도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이 기록되어 있다. 1939년, 일본은 조선에 거주하는 여호와의 증인 38명을 양심적 병역거부로 체포했다. 그들 중 33명은 6년 후 해방과 동시에 출소했지만, 5명은 모진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옥사했다.

1970년, 10월 유신을 마무리한 박정희 정권은 병무청을 신설, ‘입영률 100%’ 달성을 목표로 내세웠다. 3년 뒤에는 병역기피자의 가족들이 머리를 들고 살 수 없도록 하라는 지시도 내렸다. 병역기피자에게는 최대 10년의 징역형이 선고되었고, 실제로 7년 10개월을 복역한 사례도 있다.

그 와중에 입영은 했지만 집총을 거부한 여호와의 증인 청년 5명이 체포됐다. 그중 현역 이춘길, 방위병 정상복, 훈련병 김종식 등 3명은 구타에 의한 비장 파열, 토혈, 물고문 등으로 사망에 이르렀다.

이후에도 박정희 정권은 입대 거부자들을 강제로 입영시킨 다음, 구타와 고문을 멈추지 않았다. 심지어 집총을 거부할 경우 다시 집총을 강요하고, 또 거부하면 ‘경합범’으로 취급해 법정 형량인 징역 2년에 1.5배의 가중처벌을 더해 3년을 선고하기도 했다. 이 시기, 우리 재판부는 정권의 전횡에 억눌려 시녀 노릇을 할 수밖에 없었다.

군부정권에 의한 살인은 외부로 드러나지 않았고, 국민들에게는 그야말로 서릿발 같은 정권의 반공・안보 공세에 입조차 마음대로 열 수 없는 시절이었다.

그 후 진보 진영의 대통령이 배출되면서 양심적 병역거부자에 대한 처우가 달라졌다. 2001년 이후 병무청의 강제입영조치가 사라졌고, 형량도 대부분 형기만 채우면 병역이 면제되는 1년6개월로 고정됐다. 교도소도 육체노동 대신 행정업무를 맡겼고, 형기의 75%를 채우면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가석방시켰다. 일제강점기부터 집총과 죽음 사이를 오갔던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의 인권이 비로소 보장받기 시작했던 것이다.

양심을 위한 질곡의 투쟁

우리나라는 병역거부권을 보장하는 ‘시민적・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International Covenant on Civil and Political Rights)’의 당사국이다.

인권위원회 첫 특별보고 당시 ‘양심적 병역거부 인정’ 및 ‘국제 인권원칙에 따른 대안 제시’를 주문하는 문재인 대통령(2017.12.07)(자료:민중의소리vop)
인권위원회 첫 특별보고 당시 ‘양심적 병역거부 인정’ 및 ‘국제 인권원칙에 따른 대안 제시’를 주문하는 문재인 대통령(2017.12.07)

유엔은 ‘인권에 관한 세계선언(Universal Declaration of Human Rights)’에 근거, 2006년, 2010년, 2011년, 2015년 등 수차례에 걸쳐 “한국 정부가 병역거부자들에게 대체복무를 허용하지 않고 처벌하는 것은 한국이 당사국인 자유권규약을 위반하는 것”이라며 강력 권고해왔다.

그러나 우리 헌법재판소는 “‘인권에 관한 세계선언’은 선언적 의미만 있을 뿐이고, 유엔자유권규약위원회의 권고는 법적 구속력이 없다”며 계속 거부해왔다. 하지만 법조계, 특히 법관들은 내부적으로 비판의 목소리를 키우고 있었다.

첫 번째 행동은 정권이 보수에서 진보로 바뀐 2002년 1월 29일에 불거져 나왔다. 양심적 병역거부 사건을 다루던 서울지법 남부지원 형사1단독 박시환 부장판사가 사법 사상 최초로 병역법 제88조에 대해 헌법재판소에 위헌법률심판을 제청했던 것이다.

그는 위헌심판제청 결정문에 “(대체복무 여부에 대해) 진지하게 헌법적 검토를 해 볼 단계”라고 명시했다. 어떤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박 판사의 행동은 인권을 향한 작지만 거대한 반항의 첫 걸음이었다.

그의 용기 있는 행동은 36개 시민단체의 모임인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권 실현과 대체복무제도 개선을 위한 연대회의’의 결성 및 노회찬, 임종인 의원 등 정치권의 대체복무제 법안 제출로 이어졌다.

다른 지법의 판사들도 반항의 대열에 합류했다. 2004년 5월, 서울남부지법은 병역법 위반 사건 1심에서 “양심적 병역거부는 양심의 자유에 속하는 문제이므로 대체복무 도입을 권고한다.”며 다수의견으로 무죄를 선고했다. 2007년에는 울산지법의 위헌법률심판 제청과 충북영동지원의 1심 무죄 선고가 이어졌다.

2005년과 2008년에는 국가인권위원회까지 나서서 국회의장과 국방부장관에게 양심적 병역거부자에 대한 형사 처벌 중단과 대체복무제 도입을 권고했다. 그러나 2005년에는 여론의 반대(찬성 25.4%, 반대 74%)에, 2008년에는 이명박 정권의 “국민정서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에 부딪쳤다.

이명박 정권 당시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의 인권은 암흑기였다. 이후 박근혜 정권 후반기에 들어서면서 판사들의 반항이 재개됐다.

2015년 5월, 광주지법은 여호와의 증인 3명에게 무죄를 선고했고, 2016년 10월 광주지법은 사상 처음으로 항소심 무죄판결을 선고했다. 그해 12월, 부산법원과 청주지법도 1심 무죄를 선고했다.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정국과 맞물리면서, 법관들의 반항은 정점으로 치달았다. 2017년 6월, 김이수 헌법재판소 소장 후보는 인사청문회 서면답변서에 대체복무방안이 필요함을 명기했다. 그간 반대로 일관했던 헌법재판소 인사로는 사상 처음이었다. 그러나 다음 달 대법원은 입영통지서에 불응한 양심적 병역거부자에게 징역형을 선고하면서 대응했다.

웰링턴 평화행동(Peace Action Wellington)이 세운 뉴질랜드의 양심적 병역거부자 아치 백스터(Archie Baxter)의 동상(자료:PAW)
웰링턴 평화행동(Peace Action Wellington)이 세운 뉴질랜드의 양심적 병역거부자 아치 백스터(Archie Baxter)의 동상(자료:PAW)

하지만 이미 터진 둑을 막을 수는 없었다. 대법원 판결 일주일 후, 청주지법에서 곧바로 무죄 선고가 터져 나왔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대안 마련이 필요하고 그것이 가능함에도 국가가 이를 위한 최소한의 노력을 기울이지 않은 채 일방적으로 국가의 안전보장이라는 헌법 가치만을 실현하고자 양심의 자유를 제한한다면 헌법의 과잉금지 원칙에 반하는 것이다. 연간 징집 인원의 0.2% 정도인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가 집총 병역에 응하지 않는 것 자체가 군사력의 저하를 가져와 국가의 안전보장이라는 헌법적 가치를 위태롭게 한다고 보기 어렵다”고 했다. 지난해 6월 28일 헌법재판소의 판결문과 별반 다르지 않은 판결이었다.

이후 양심적 병역거부에 대한 무죄 판결은 봇물을 이루어 2017년 한해에만 총 44건의 무죄판결이 나왔다. 2018년에는 부산지법에서 두 번째 항소심 무죄판결이 나오기도 했다. 그 끝에 지난해 마침내 헌법재판소의 ‘기존 병역거부자 처벌 합헌’, ‘대체복무 미규정 헌법불합치’ 결정이 나온 것이다.

양심과 인권, 그리고 평화

문재인 대통령은 후보 시절 국제엠네스티로부터 양심적 병역거부에 대한 질문을 받고 이렇게 답했다.

“양심의 자유는 헌법상 기본권 중 최상위의 가치를 가지는 기본권입니다. 그러하기에 대체복무제를 도입하여 양심적 병역거부로 인해 형사처벌을 받는 현실을 개선해 나가겠습니다.”

영국은 버트란트 러셀의 영향으로 1916년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에 대한 대체복무를 명문화했다. 독일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1949년부터 동, 서독 공히 ‘양심적 집총 거부권’을 아예 헌법에 명시했으며, 1960년부터 대체복무법을 시행했다. 미국은 1977년 지미 카터 대통령이 모든 병역거부자와 병역기피자, 탈영병 등을 사면했다.

헌법재판소는 국회에 내년 말까지 대체복무 관련 입법을, 대법원 전원합의체에 오는 8월말까지 양심적 병역거부에 대한 인정 여부를 맡겼다. 정치권은 이미 대체복무 법안 마련에 공감하고 있다. 문제는 양심적 병역거부자를 처벌해 온 대법원이다.

양심적 병역거부에 대한 인정은 세계적인 추세다. 징병제를 택한 59개국 중 20여 국가가 대체복무제를 시행 중이다. 때마침 한반도에도 평화의 분위기가 찾아오고 있다. 대법원은 하급심에서 하극상이나 다름없는 반항의 물결이 지속되어왔음을, 안보의 시대가 저물고 평화의 시대가 도래하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병역거부라는 동일한 행위를 두고 일제 강점기 때는 독립운동으로 평가했다가 반공・안보주의 정권 내내 ‘비겁자’, ‘책임 회피자’ 딱지를 붙인 바 있다. 병역 대체복무제의 본격 시행으로 매년 600명 가까운 사람들이 양심에 의해 전과자가 되는 일은 사라졌다.

병원이나 요양기관 등 복지 부문, 문화유산 보호 부문, 재난 대비 부문, 경찰이나 소방 등 사회치안 부문, 과학연구나 교정 등 교육봉사 부문, 우체국이나 법원 등 행정 부문 등에서 양심의 자유에 따라 구슬땀을 흘리는 대체복무자들을 만날 날이 다가오고 있다. 반공과 안보, 끔찍한 전쟁의 기나긴 장막에 가려져 있던 또 하나의 인권이 마침내 평화의 세계로 나오려 하고 있다.

"평화를 원한다면 평화를 준비하라. 평화로 가는 길이 평화"라는 간디의 명언과 일맥상통하는 이 경구가 이념과 사상, 분단의 갈등과 반목으로 편한 날이 없는 대한민국에 보편적인 양심으로 자리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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