썩은 무라도 자르지 않는다면 역풍은 칼 주인의 몫

「필리버스터 중단 선언에 성토와 절망감 쏟아내는 더민주 지지층」
「필리버스터 중단은 역풍 우려와 여당의 이념 논쟁 프레임 탓」
 

3월 1일 새벽에 날아든 소식에 포털을 비롯한 SNS가 난리법석이다. 더불어민주당(이하 더민주) 이종걸 원내대표가 3월 1일 오전 9시에 긴급기자회견을 갖고 일주일(158시간)째 이어온 무제한 토론filibuster의 중단을 선언한다는 뉴스 때문이다.

▲ 무제한 토론을 진행 중인 국민의당 최원식 의원 ⓒNewsis

“아무것도 안 하던 당이 이제야 제대로 하는 것 같다 싶더니, 역시나...”

“이제 더민주 탈당한다. 무능에 무능에 무능, 지겹고 역겨우니 잘들 해보쇼!”

“역풍? 필리버스터 중지한다면, 역풍 아니라 태풍을 염려해야 할 거다.”

“3월 10일 이후에 새누리당이 독자적으로 통과시킨다는 걸 몰라서 시작했나? 국민이 바보로 보이나?”

“결국은 새누리당 2중대의 자기 밥그릇 챙기기일 뿐이었다!”

댓글에서 보듯, 더민주 지지층으로 보이는 네티즌의 절대 다수는 ‘부정적인 시각’을 넘어 거리낌 없는 성토와 절망감을 표출하고 있다.

갑작스러운 결정, 도대체 왜?

더민주를 비롯한 야권 전체는 테러방지법의 독소조항을 수정하기 위해 시작된 합법적 의사진행방해에 자발적으로 동조했고, 테러방지법의 독소조항을 염려하는 국민들은 새벽까지 TV를 시청하며 그런 야권 및 필리버스터 참여 의원들에게 전폭적인 지지를 보냈다.

▲ 필리버스터 중인 참여연대 박근용 사무처장 ⓒ참여연대

그런 상황에서 터져 나온 중단 뉴스이니 야권 지지자들이 발끈한 것은 당연한 이치. 야권의 당찬 행보에 국회 방청석은 연일 방청객들로 북적였고, 국회 정문 앞에서는 시민들의 필리버스터가 열렸으며, SNS를 통해 실시간으로 타전되는 소식들로 야권 지지층이 급속히 결집하고 있었다.

이 아침, 야권이 하나가 된 필리버스터를 중단한다는 뉴스에 야권 지지자들은 이구동성으로 이렇게 묻고 있다.

“도대체 왜...?”

강행과 중단 사이

필리버스터를 시작할 당시부터 더민주의 속내는 복잡할 수밖에 없었다. 테러방지법이 총선 선거구 획정안 처리와 연동되어 있어 필리버스터를 계속할 경우 총선 일정이 우려되고, 중단할 경우 테러방지법이 처리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잠시 그간의 과정을 되돌아보자. 정의화 국회의장과 여야는 2월 29일을 선거구 획정의 마지노선으로 정했지만, 그동안 접점을 찾지 못했다. 그러던 차에 새누리당 원유철 원내대표와 더민주 이종걸 원내대표가 국회본회의장에서 만나 대화를 나눴다.

이 자리에서, 원유철 원내대표는 ‘필리버스터의 무조건 중단’을, 이종걸 원내대표는 이미 제안했던 중재안을 들이대며 ‘테러방지법 독소조항의 수정’을 밀어붙였다. 협상은 한 시간 만에 결렬되었다.

▲ 무제한 토론을 진행 중인 야당 의원들 ⓒnocutnews.co.kr

협상 결렬 후, 여야 의총에서는 강경론이 터져 나왔다. 원유철 원내대표는 최고위원회의에서 문제의 책임을 더민주에 전가하고, 아래에서 보듯 ‘거짓 선동’이라는 표현까지 써가며 이념 프레임을 펼쳤다.

“더불어민주당은 광우병 괴담, 천안함 폭침 자작설, 한미 FTA 괴담 등 과거 사례와 같이 거짓 선동을 선거에 활용하고 있다.”

그런데 이날 밤 9시 30분경에 열린 더민주 의원총회에서는, 필리버스터 중단에 관한 몇몇 의견들이 강경론을 뚫고 흘러나왔다.

“역풍이 우려되니 필리버스터를 중단해야 한다.”

“모든 일에 시간이 제일 중요한데, 이를 무시하고 일을 진행할 수는 없다. 4ㆍ13 총선 불변을 전제로 볼 때, 3월 10일까지 필리버스터를 계속한다면 경선도 못하고 아무것도 못한다.”

그리고 몇 시간 뒤 김종인 비대위 대표를 비롯한 비대위원들(우윤근 의원, 박영선 의원, 변재일 의원, 이용섭 전 의원, 표창원 전 경찰대 교수, 김병관 웹젠 이사회 의장), 이종걸 원내대표, 이춘석 원내수석부대표 등이 심야 비대위원회의 테이블에 모였다.

이 회의에서, 이종걸 원내대표는 역풍을 우려하는 일부 의원들을 향해 “항해에는 항상 역풍이 있다. 그 역풍을 순풍으로 바꾸는 것이 정치다. 필리버스터를 계속 이어가겠다”며 고수 방침을 밝혔다.

이에 대해 김종인 대표는 “이념 프레임으로 계속 끌고 가면 당에 득될 것이 없다. 프레임 전환이 없으면 안 된다. (경제 문제로의) 프레임 전환이 필요하다”며 설득해 이종걸 원내대표의 입장 선회를 끌어냈다.

박영선 위원 역시 중단 입장에 동조하면서 “새누리당과 청와대가 경제 실정을 덮기 위해 이념 논쟁 프레임으로 접근하고 있다. 박 대통령의 이념 논쟁과 특유의 야당 뒤집어씌우기를 알면서 그런 쪽으로 호응해줄 수는 없지 않느냐. 굉장히 아쉽지만 필리버스터를 스스로 중단하고 소수 야당으로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 총선에서 과반의석을 달라고 국민들에게 호소하려고 한다”고 했다.

▲ 한 표만 줍쇼... ⓒlivetowrite1.blogspot.com

역풍은 어디로 불까?

더민주는 이미 국가정보원의 통신 감청 요건을 강화하는 테러방지법 수정안을 제시해 놓은 상태이다. 하지만 새누리당은 “더 이상의 법안 수정은 없다”며 거부해왔다.

이런 상황에서 더민주가 취할 수 있는 출구 전략은 두 가지다. 하나는 ‘총선연기론’에 이은 ‘선거는 뒷전’이라는 역풍을 피하기 위해 필리버스터를 중지하는 것이고, 이는 새누리당의 테러방지법을 원안대로 통과시키는 것이다. 또 하나는 이종걸 원내대표의 말대로, 필리버스터를 강행하면서 역풍을 순풍으로 바꾸는 것이다.

더민주로서는 선거법 처리 지연에 따른 여론 악화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또한 ‘19대 국회 내내 일하지 않다가 오랜만에 보는 야당다운 야당’이라는 국민들의 지지를 실망으로 바꾸기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 두 가지 선택지 중 중단을 선택한 더민주. 역풍이 새누리당과 더민주 중 어느 쪽으로 불어 닥칠지를 묻는다면, 현재까지는 더민주 쪽이라는 답이 월등히 우세할 듯하다.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 근거는, 더민주가 필리버스터를 결정할 당시에 이미 3월 10일 이후 새누리당이 단독으로라도 테러방지법을 처리할 수 있다는 사실, 이 사실을 더민주 지지자들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필리버스터를 시작하던 당시나 지금이나 새누리당이 단독으로 처리할 수 있는 현실은 변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시작된 필리버스터였다. 국민들이 야권의 필리버스터에 전폭적인 지지를 보낸 이유는 물어보나 마나다.

역풍을 만들 주역은 누구일까? 최소한 더민주 지지자들은 아니다. ‘선거는 뒷전’이라는 역풍을 만들어낼 주역은 테러방지법을 선거구 획정과 연결해 통과시키려는 정부ㆍ여당의 지지자들과 무당층이지 더민주 지지자들은 아니라는 말이다.

원유철 원내대표가 한 발언으로 보건대, 정부와 여당이 필리버스터를 이념 논쟁 프레임으로 덧씌우려 한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처럼 보인다. 그래서 이념 프레임에 빠질 수 없다는 각오도, 경제 실정의 책임을 부각시켜야 한다는 말도 틀린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러려면 필리버스터가 가져다줄 효과를 능가하는 대책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더민주 김종인 비대위 대표의 “경제 문제로의 프레임 전환이 필요하다”는 말은 한심하기 짝이 없다. 얼마 남지도 않은 기간 동안, 도대체 어떤 방식과 전술로 프레임 전환을 이뤄낼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박영선 비대위원의 호소하는 듯한 말에는 사지가 내려앉을 것만 같다. 참담하다. 소수 야당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 총선에서 과반의석을 달라고 국민들에게 호소한다? 초선도 아니고 당의 원내대표까지 지낸 의원이 필리버스터가 거두고 있는 역사적 성과는 무시한 채 이 따위 무기력한 호소성 발언을 대책이라고 내놓는단 말인가!?

필리버스터는 박근혜 대통령이 발의에 참여해 통과된 법안에 명시되어 있는 엄연한 권리다. ‘합법’이다. 그 합법을 다른 사안과 연계해 마치 ‘비합법’인 것처럼 몰아가는 새누리당의 전략에 휘둘린다면, 진흙탕 같은 기득권 싸움에 탈당 러쉬까지 이르렀던 더민주를 끝까지 믿어준 숱한 지지자들은 절망할 것이다. 역풍이 무섭다 하나, 그들의 절망, 그리고 그 절망이 드러낼 표심보다 더한 역풍이 어디 있겠는가?

 

 

김태현 두마음행복연구소 소장, 인문작가, 강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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