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모론'으로만 치부할 일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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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버스터 정국이 사실상 마무리된 2일 오전 더불어민주당의 김종인 비상대책위 대표가 ‘야권통합’을 전격 제안하며 승부수를 던졌다. 그는 이날 비대위 발언을 통해 “선거가 불과 42일밖에 남지 않았고 국민은 지난 3년간 박근혜 정부가 행해온 정치·경제·사회·외교 모든 분야의 실정을 심판하려고 생각하고 있다.”며 통합 카드를 꺼내들었다. 이어 그는 “야권 승리와 정권교체를 이루기 위해 야권이 단합된 모습을 보여주길 요청 드린다. (당 지도부가 바뀐 만큼 친노 패권주의 청산을 주장해온) 탈당의 명분은 다 사라지지 않았나.”라며 국민의당과 안철수 대표를 압박했다.

이에 대해 국민의당 안철수 공동대표는 곧바로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지금 이 시점에 그런 제안을 하는 의도가 의심스럽다. (더민주는) 먼저 당내 정리부터 하시기 바란다.”고 김종인 대표의 통합제안을 일축했다.

총선을 앞둔 정당의 통합이 항상 승리를 담보하는 건 아니었다. 과거 선거데이터를 살펴보면 통합의 시너지가 극대화될 수 있을 때만이 유의미한 통합기록으로 남아있다. 1990년 민정당-통일민주당-공화당 등 3당은 내각제개헌을 통한 영구집권을 꿈꾸며 밀실 합당을 추진했다. 여소야대 국회를 일시에 역전시키며 거대 공룡여당으로 탄생한 민자당은 한때 218석의 위력을 과시하며 날치기를 일삼았지만, 1992년 14대 총선 때는 과반의석에도 미치지 못하는 국민의 심판을 받고 말았다. 2007년 대선에서 참패한 대통합민주신당은 18대 총선을 앞두고 군소정당인 민주당과 통합해 통합민주당으로 출범했다. 통합민주당은 합당 당시 의석이 151석에 달했지만 역시 총선을 거치면서 절반 가까이를 잃고 81석으로 오그라들었다. 이 두 사례를 보면 결국 정당통합은 선거승리의 필요조건일 뿐 충분조건이 아니라는 것이다.

1991년 6월 20일 30년 만에 부활된 광역의원 선거가 실시됐다. 전국적으로 866개 선거구였으나 민자당은 40.6% 득표율만으로 의석은 무려 56.1%에 해당하는 564석을 석권했다. 김대중 총재는 한국여성단체연합 창설 회장이자 대표적 여성운동가인 이우정, 고려대 총학생회장 출신 신계륜 등 다수의 재야인사들을 수혈하여 신민당(신민주연합당)으로 당명도 바꾸고 안간힘을 다했으나 겨우 165석(점유비 19%)에 머물렀다. 신민당은 3년 전 13대 총선에서 평민당이 얻은 19.3%보다 약간 늘어난 21.9%의 득표율을 기록했지만 의석에서는 이와 같은 성적표를 남겼다. 1년 전 3당 합당에 반발해 민자당 행을 거부한 이기택 총재 등 8명의 의원이 창당한 신생정당 민주당도 14.3%의 득표율을 올렸으나 의석은 고작 21석에 머물렀다. 신민당과 민주당의 합계 득표율은 36.2%로 민자당의 40.6%에 비해 크게 뒤지지 않았지만 의석에서는 큰 차이가 났다. 특히 서울의 경우 두 야당의 합계 득표율이 민자당을 앞섰지만 분열의 후유증은 개표결과에서 두드러졌다. 132명 당선자 중 민자당이 무려 83.3%에 해당하는 110석을 싹쓸이했고 신민당이 21석, 민주당 1석 등으로 여당의 압승이었다. 3년 전 총선에서 1여 3야 구도 속에서도 민정당이 42석 중 10석에 그쳤던 결과와는 전혀 상반된 결과였다.

이러한 선거결과를 받아들고 이듬해 14대 총선을 거쳐 대선을 준비해야 하는 김대중 총재는 화들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신민당은 광역의원선거 참패 직후 이우정 수석최고위원을 위원장으로 하는 야권통합기구를 설치하고 선제적으로 민주당에게 총선 전까지 야권통합을 하자고 제안했다. 민주당 역시 통합파인 조순형 부총재를 야권통합특위 위원장으로 임명하고 통합협상에 대비했다. 물꼬를 튼 것은 역시 정치9단다운 김대중 총재였다. 그는 우선 70석 신민당과 8석(그나마 박찬종·김광일 의원이 통합에 불참해 6석이었다) 민주당의 당세를 감안하지 않고 김대중·이기택 공동대표 체제 카드를 수용했다. 또한 지구당위원장 선정 권한을 갖는 조직강화특위 위원은 동수로, 당직과 공천권 등 각종 지분은 신민당 측 6, 민주당 측 4, 재야 2 비율로 전격 합의했다. 이는 총선에서 다시 한 번 각자도생을 꾀하다간 정말 공멸할 것이라는 위기의식에서 나온 대단한 파격이었다.

1992년 3월 24일 실시된 14대 총선에서 생환한 수도권의 민주당 당선자 분포를 보면 김대중계 19명, 이기택계 15명이었다. 13대 평민당 당선자가 18명이었으니 김대중 총재 입장에서도 계보 의원 숫자는 유지하면서 통합의 효과로 의석을 상당히 불린 셈이다. 또한 충청권의 경우 4명의 의원을 처음으로 배출했는데 역시 통합의 시너지 때문이었다. 물론 4명 모두 이기택계였다. 그러나 이들은 연말 대선에서 김대중 후보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었다. 1992년 5월 27일 잠실 올림픽공원 펜싱경기장에서 열린 민주당 대통령후보 지명대회에서 김대중 공동대표가 전국대의원 중 1413표를, 이기택 공동대표는 925표를 얻어 각각 60.2%와 39.4%의 득표율을 보였다. 통합 당시 지분 6 대 4가 정확하게 지켜졌음이 확인된 것이다.

이처럼 특히 선거를 앞둔 통합은 절실한 쪽에서 통 크게 양보할수록 효과가 배가된다. 총선이 겨우 42일 남은 가운데 김종인 대표가 야권통합 카드를 꺼내들었다. 일부에서는 국민의당 죽이기를 위한 ‘음모론’을 제기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의 진심이 새삼 확인만 된다면 결코 음모로 단정할 순 없다. 2월 넷째 주 한국갤럽 여론조사를 보면 새누리당 42%, 더민주 19%, 국민의당 8% 순이다. 서울의 경우 새누리당 35%, 더민주 21%, 국민의당 8% 등이며 경기인천은 새누리당 38%, 더민주 21%, 국민의당 10% 순이다. 이 상태로 수도권 120석은 대부분 야권 패배라고 예상된다. 물론 현재 지표상으론 두 야당의 단순 합계로도 총선 승리는 없다. 김종인 대표의 야권통합 제안에 진정성이 담기기 위해서는 통합의 대원칙만이라도 천명해야 한다. 신뢰할 만한 여론조사기관의 각 정당지지율이 참고가 될 것이다. 과거 김대중 대통령이 야당 총재 시절 과감하게 양보했던 것처럼 큰 집에서 일정한 배려가 있어야 국민의당을 협상의 테이블로 불러낼 수 있을 것이다.

 

 

최 광 웅

데이터정치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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